인공지능이 점령한 고객센터, 고객은 더 답답하다
65인치 TV를 새로 사면서 인공지능 셋탑박스 지니가 함께 왔다. 처음에는 지니가 마냥 신기했다. 귀찮게 리모컨을 누르지 않고 "지니야"하고 부르고 "TV 켜라", "OO채널 틀어라" "소리 줄여라" 말만 하면 지니가 실행했다.
그런데 이 지니는 언제나 말을 잘 듣는 건 아니었다. 어떤 때는 아무리 목이 터져라 지니를 불러도 들은 체를 안 하고, 때로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말하며 속 터지게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니는 주변이 조용해야 잘 알아듣는다. 여름에 더워서 창문을 열어두면 밖에서 들어오는 소음 때문에 사람 목소리를 잘 구분을 못하는 것 같다.
좀 똑똑하지 못한 지니지만 괜찮다. 말을 잘 안 듣다 어쩌다 잘 알아들고 척척 시킨 대로 하면 대견하다. 영 정신 못 차리고 헤롱 거리며 딴 소리하면 리모컨으로 직접 TV를 조정하면 되니 크게 불편할 것은 없다.
요즘에는 기업 고객센터도 사람 대신 지니와 같은 인공지능이 서비스를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면 거의 마지막쯤 상담원과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는데, 점점 그마저도 없어져 이제는 웬만해서는 사람과 통화하는 게 하늘에 별따기처럼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고객센터를 점령한 인공지능이 그리 똑똑하지 않다. 인공지능을 대상으로 말을 하는 것도 어색하다. 인공지능은 편하게 알고 싶은 걸 이야기하라고 하는데, 어색함을 꾹 참고 이야기하면 뭔 소리인지 못 알아들겠다고 답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또 일반적인 문제에서 조금만 깊게 들어가면 아예 답변을 못한다.
집에서 TV를 조정할 때 부르는 지니는 덜 똑똑해도 괜찮지만 고객센터 인공지능이 헛소리를 하면 그야말로 부아가 치민다. 제발 사람하고 통화하게 해 달라는 아우성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다.
어쩌면 인공지능이 좀 더 고도화되면 더 똑똑하게 대답하고 고객의 갈증을 풀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장은 너무 답답하다. 고객센터에 전화했다 문제 해결은커녕 더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고객센터 상담원을 인공지능으로 바꾸면 기업 입장에서는 인건비를 크게 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단편적으로 생각하면 감정노동에 시달렸던 상담원이 좀 편해졌을 것 같기도 한데, 인공지능에 밀리지 않고 살아남은 상담원의 말은 그렇지가 않다. 상담원과 연결된 고객들은 대부분 인공지능과 씨름하다 이미 열을 받을 대로 받은 분들이라 다짜고짜 욕설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꽤 많다고 한다. 그러니까 상담원은 예전보다 훨씬 강도 높은 감정노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사람이 그립다. 기술이 발달해 점점 사람 대신 기계나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추이이다. 그럼에도 나는 소통은 사람과 하고 싶다. 기계적으로 정해진 프로그램대로 종알거리는 똑똑하지 않은 인공지능은 정말 별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