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눈 씻고 봐도 진보는 없고 보수만 득실거리는 세상이다.
대체 무엇이 진보인지 그 정의조차 혼란스러운 가운데 진정한 진보주의에 대해 생각해 본다.
진보는 현실의 부조리를 파악하고 이를 개선하고 혁신하려는 소수의 노력이다.
반면, 보수는 기득권 다수의 입장이다.
현실이 더욱 공고히 유지되어 자신의 기득권이 보장되길 바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변화란 자신의 이익을 유지하고 더욱 확대하기 위한 변화일 뿐이다.
진정한 진보는 현실에서의 상보적 변화를 추구해야 하므로
이외에 고정된 이념이나 신념이 우선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서,
오늘 열이 올라 해열제를 먹었다고 해서
내일 배탈에도 해열제가 약이 될리는 없다.
그럼에도 해열제가 진리인양 해열제에만 집착해서는 안된다는 얘기다.
증상과 무관한 늘 한결같은 해법은 죄악일 뿐이다.
처방이 중요한 게 아니라
세상의 부조리를 해결하려는 의지 그 자체가 진보주의 아닌가.
세상의 불균형을 치유하려는 진보는
보수에 상반되는 개념이 아니라
보수보다 더 큰 차원의 보수 일지 모른다.
그럼 질문을 던져보자.
노동자를 위하면 진보인가?
여성을 외치면 진보인가?
노동자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현실이라면 노동자를 대변하는 것이 진보가 맞다.
여성의 인권이 차별받는 사회라면 여성의 권익을 살피는 것이야말로 진보가 아니면 무엇이랴.
다만, 사회 변화는 고려하지 않고
한결같이 노동자와 여성만을 외친다면
모든 병에 해열제를 외치는 것처럼 바보 같은 짓이 된다.
고정된 해법은 있을 수 없으니 말이다.
변화하는 사회를 정확히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지 않으면
과거의 진보는 신념으로 무장된 더 골치 아픈 진상 보수로 전락할 수 있다.
오늘은 오늘에 맞는 처방을 해야 한다.
진보는 늘 문제의 편에 서야 한다.
늘 소수이며 차별받는 현실의 편에서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안주하고 지키려 하는 순간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
자기 목을 베고 새로운 아픔을 찾아 나서면서
항상 변화해야만 진보라고 할 수 있다.
진보가 변할 수 밖에는 것은 세상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보의 변화를 말 바꾸기라고 폄하해서는 안 된다.
어제는 권리가 중요했다가도 오늘은 의무가 더 중요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애초부터 진보가 아니다.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하는 것은 가짜 진보다.
오래도록 같은 자리에 있다면 진보일 수 없다.」
아주 어럽게 피어나 향기를 전하고는 짧은 생을 마감하는 귀한 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진보이고 진보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 과연 이런 진보주의가 있는가?
나와 같은 부동의 부동층은 '정말 인물 없다'라는 한탄만 나온다.
우리는 항상 새 리더에 기대를 갖지만
어쩌면 선거 과정에서 나오는 진보적 분위기야말로
우리가 정치에서 얻을 수 있는 전부 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항상 진보에 목마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