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어떠한 재료를 익혀먹는다 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릴 행위들은 역시나 불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가열을 통한 조리법을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대표적인 가장 좋은 예로써 역시나 마이야르 반응(la réaction Maillard)이 있다. 프랑스의 화학자 마이야르가 발견한 단백질의 화학적 변화로써 단백질 속에 포함되어있는 아미노산과 당 성분이 적당량의 수분과 기름, 열이 만나면 일어나는 반응이다. 가장 좋은 예가 고기를 구웠을 때 갈색으로 변화하는 점, 빵을 구웠을 때 빵의 겉이 갈색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 이외에도 우리가 무언가를 익힌다는 생각을 했을 때 찜통에 넣고 쪄먹는 만두, 끓는 물에 데친 시금치 등 늘 불과 관련된 행동을 떠올리는 걸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아주 원초적인 이유로써 왜 인류를 무언가를 익혀먹게 된 것 일 까에 대한 고찰을 해보게 된다. 진화론에 입각하여 생각해보면 사실 인류가 지금의 과정에 오기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발견 중 하나로써 불의 발견을 늘 꼽는다. 불이 인류에게 끼친 영향으로 잡아온 사냥감을 익혀먹을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는 인류의 진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유인즉슨 사냥해 온 고기를 익혀먹음으로써 치아의 구조가 두개골 안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줄어들게 되었고 그에 따라 뇌의 용량이 크게 늘게 되면서 인간의 사고방식이나 지적 능력을 가지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사실 무언가를 익힘으로써 얻는 장점은 매우 많다. 우선은 맛이 훨씬 좋아지며 익힘을 통해 영양가가 더욱 올라가는 재료들 또한 많이 존재한다. 그리고 생존적 측면에서 익힘은 정말 너무나 중요하다. 재료 속에 남아있는 박테리아나 바이러스들을 살균해 버림으로써 우리의 일상을 더욱 안전하게 만드는 측면이 존재한다.
그러나 ‘익힌다’라는 행위의 고찰을 해보고 싶었는 이유는 위에 언급했듯이 대부분 우리가 익힌다라는 단어를 불을 통해서만 가능한 화학적 변화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좀 더 깊게 우리 일상을 들여다본다면 꼭 불에 닿지 않고도 사람이 안전하게 먹을 수 있게 재료가 소독이 되고 맛이 변화하며 영양가를 높이는 경우가 많다.
예전 프랑스 파리에서 요리사 일을 처음으로 하던 시기 셰프에게 크게 질책을 받은 적이 있다. 노른자를 베이스로 만드는 커스터드 크림을 만들 때 셰프가 알려준 순서대로 재료를 섞지 않고 눈앞에 설탕이 먼저 있기에 노른자에다 설탕을 뿌려둔 채 커스터드를 만들기 위한 우유 양을 개량하고 있을 때였다.
지금 돌이켜 본다면 정말이지 큰 실수가 아닐 수 없지만 셰프가 나에게 질책을 했던 이유는 노른자에다 설탕을 저렇게 뿌려두면 ‘익는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냥 설탕만 뿌려놨는데 왜 노른자가 익는다는 건지 이해를 못했던 기억이 있다.
영어의 조리 단어에 보면 ‘curing(큐어링)’이라는 단어가 있다. 한국어 단어에서 찾아보면 ‘염지’에 가장 가까운 표현이 아닐까 싶다. 사실 위의 노른자에서 언급했듯 무언가가 익는다는 건 꼭 불을 통해서만 익는 것이 아니다. 우리 한식 속의 ‘간장 게장’이 이 큐어링의 가장 큰 좋은 예가 아닐까 싶다. 게장은 겉으로만 봐서는 절대 불에 닿지도 않았고 어떻게 보면 싱싱한 게를 간장에서 절였다가 우리가 꺼내 먹는 음식인데 이 행위 자체가 사실 익혔다고 보는 게 맞다.
소금이라는 바다에서 온 물질에서 참 경외심을 느낄 때가 많은데 우리의 전통문화에서 악귀를 쫓기 위해 소금을 뿌려두는 것처럼 소금은 조리에서 간을 맞추는 역할 이외에 ‘살균’이라는 엄청난 역할을 하는 재료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날 것의 게 속에 간장이라는 소금물이 들어감으로써 게살을 살균을 하게 하고 그 맛을 올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소금이 게를 익힌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이러한 소금을 통해 익히는 방식은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스페인의 하몽, 이탈리아의 보타르가, 유럽의 각종 햄들 등을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도 또 다른 익힘을 예를 ‘산(Acid)’에서도 볼 수 있다.
일본의 고등어 조리법 중 ‘시메사바’라는 음식이 있다. 규슈 지방에서 시작된 조리법으로 고등어를 소금에 염지를 했다가 식초를 비롯한 산에 담가서 고등어를 익히는 방식이다. 쉽게 부패하는 데다 기생충까지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고등어를 회로 먹기 위해 소금과 식초로써 살균 즉 익힘을 한 방식이다.
지구 저 넘어 반대편 남미에서는 산을 통해서 이렇게 재료를 익히는 방식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예로써 멕시코의 아구아 칠레, 페루의 세비체, 남미 전체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에스카 베체가 있다. 그중 세비체만을 예로 들어보자면 싱싱한 생선회에다 라임즙을 짜 넣어 산이 생선 살 안에 침투하게 하고 그 자체로 생선을 익혀먹는 방식이다. 물론 생선과 산의 만남 시간을 얼마나 두느냐에 따라 고기가 레어부터 웰던까지 익힘 정도가 있듯 이 조리방식도 비슷한 맥락으로 진행되게 된다.
예전 요리학교를 다니던 시절 선생님 셰프께서 해주시던 말이 생각난다 ‘요리는 기하학으로 시작해 화학을 거쳤다가 예술로써 마무리한다’라는 말이다. 단순히 라면을 끓이는 데 있어서도 화학적 반응을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영역에서 보자면 꼭 요리적 측면만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일상의 사고를 좀 더 넓게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