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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우 Jan 02. 2023

'소주'의 고향을 찾아서

술 에세이

 우리나라를 가장 대표하는 술은 과연 무엇일까? 여러 가지 종류가 있겠지만 1인당 소비량 만을 따진다면 혹은 길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술을 꼽으라 함은 역시나 '소주'가 아닐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소비하고 있는 대부분의 소주는 '희석식 소주'라고 보는 것이 맞다. 고구마를 비롯한 비교적 저렴한 원재료를 발효하고 증류하여 얻은 무향 무취의 주정에 물과 아스파탐과 같은 감미료를 첨가하여 만든 일본에서 생겨난 주조법으로 빚은 소주들이나 원래 고유의 소주는 안동 소주나 문배술과 같은 '증류식 소주'라고 보는 편이 맞다.


 대부분 가정에서 각자 고유의 소주 빚는 법이 존재하였다던, 그리하여 굳이 술을 '구매'한다는 개념조차 잘 없었던 우리 민족의 술 문화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특히 증류식 소주의 쇠퇴기를 맞이하게 된다. 조선 총독부의 증류주에 대한 비정상적인 조세 제도와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술의 배급제가 이루어지게 되면서 증류식 소주는 자취를 점차 감추다가 광복 이후 박정희 정권을 거치며 아예 씨가 말라버리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워낙 쌀이 귀했기에 1965년 쌀로 술을 빚는 것을 금지시키는 '양곡관리법'이 시행되며 쌀로 빚은 우리 민족의 전통주 '증류식 소주'는 생산이 전면 금지되었고 위에 말했던 쌀 대신 고구마나 타피오카 등을 증류하고 희석하여 만든 '희석식 소주'가 지금까지도 소주의 메이저 위치에 올라가 있는 현실에 마주쳐 있다.  


 한편, 단군이 홍익인간 이념 아래 나라를 건국한 4000년의 시간 이래 소주의 역사가 약 80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은 참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위스키, 진, 보드카, 코냑 등의 증류주들이 즐비한 유럽 조차도 증류주의 역사는 한국의 증류주 역사와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유인즉슨 증류법 자체가 동양이나 유럽에서 생겨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전의 술의 형태는 역시나 누가 뭐라 해도 '발효주' 들이 대부분 이였다. 유럽에서는 포도를 발효한 '와인', 사과를 발효한 '사이다', 보리를 발효한 '맥주' 등이 있었고 우리나라의 경우 '누룩' 속에 있는 학명 'Aspergillus oryzae' 균을 이용해 곡물 또는 과일의 당분을 알코올로 치환하는 '발효주'를 만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증류주 또는 증류의 역사는 과연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신기하게도 '증류'의 문화의 시발점은 중동의 아랍 문화권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기원전 2000년 전의 세계 5대 문명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증류가 처음 시작 되었다고는 하나 본격적으로는 무슬림 연금술사 들에 의하여 발전되었다는 것이 맞다. 그렇기에 '알코올'이라는 단어의 어원 또한 아랍어에서 기원한다는 점에서도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더욱더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다.


 허나, 여기서 들 수 있는 의문점으로써 술을 지금도 금기하는 이슬람 문화관에서 증류법이 어떻게 발전했을까 하느냐 인데 그 당시의 이슬람권에서는 증류법을 술의 제조가 아닌 말 그대로 연금술의 일종으로써 발전시키고 있었고 그로 인해 얻은 알코올 또한 마시는 용도가 아닌 향수나 다른 화학 물질의 원료로써 사용하던 게 훨씬 보편적이었다.


 그렇다면 증류법은 어쩌다가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을까?


 서양 역사의 중세시대 기준 동양과 서양 각각 큰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중동, 아랍이 엮여 있는 것을 우리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동양의 기준 칭기즈칸의 세계 정복이 되겠고 서양의 기준 기독교의 성지 즉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십자군 전쟁이 그에 해당하게 되겠다.


 약 200년간 지속되었던 십자군 전쟁은 이후 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지만 이때 중동의 증류법 또한 유럽으로 전파되는 시기에 해당되게 된다. 사실 증류법이 유럽으로 전파되던 초기의 경우 무슬림 연금술사 들과 같이 술의 제조 목적보다는 중세시대 연금술의 발전 목적이 더욱 컸으나 의학적인 용도로써 쓰이는 경우 또한 매우 많았다. 그렇기에 영어에서 증류주를 통틀어 'spirits', 프랑스어로는 "l'eau de vie(생명의 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럽 전역에 '흑사병'이 만연하던 시기 폴란드에서는 보드카로 샤워를 하면 흑사병을 피해 간다는 미신이 존재했던 것처럼 말이다.


 시간이 흘러 15세기가 되어서야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증류법을 이용한 술을 빚기 시작하나 증류주 들은 어느 정도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공기와 맞닿아 산화가 되는 통에 '식초'가 되어버리는 발효주 들과 달리 장기 보관이 가능했으므로 대항해 시대가 시작된 이후 특히 크게 발전할 수 있었고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 단골로 등장하는 '럼주'가 여기에 해당되겠다.) 남부 유럽의 술의 '갑질' 또한 어느 정도 피해 가는 역할 또한 한다.


 가장 좋은 예가 사실 나폴레옹 시대의 '영국'이 아닐까 한다. 본인 또한 육군 사관학교 출신이었던 나폴레옹의 군대가 유럽의 재패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써 '포병'을 꼽는다. 그렇기에 나폴레옹의 가장 큰 골치 덩어리 나라 중 하나는 역시나 옆나라 영국이었으나 그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을 가지고 있던 영국을 포병이 주 부대인 프랑스 군이 정복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폴레옹의 외교적 압박으로써 '대륙 봉쇄령'이라는 악수를 두게 되는데 즉, 자기가 정복하고 있는 모든 나라의 공산품들의 영국으로의 수출을 전면 금지 시키는 정책이었다. 사실 지금도 서양 미식 문화에서의 와인의 중요성은 쉽게 느낄 수 있으나 몇백 년 전의 유럽에서는 얼마나 와인이 식음료로써의 가치가 높았을지는 쉽게 예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영국의 경우 vitis vinifera 즉 와인 양조용 포도의 재배가 불가능했기에 전량 남부 유럽으로 부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으나 대륙 봉쇄령에 의해 와인 수입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에 반하여 영국군과 나폴레옹의 프랑스 사이의 전면적인 전쟁이 일어나게 되나 영국 내에서는 역으로 '스카치 위스키'에 대한 수요 증가와 함께 주조법이 더욱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


 다시 동양으로 넘어와 한국과 중국, 일본 그리고 폴란드와 러시아의 보드카까지도 사실 몽골과 큰 연관성이 있다. 


 우리나라 역사에 고려시대 때 겪었던 원 간섭기로 인해 먹거리로써 들어오게 된 가장 주요한 두 가지로써 '수박'과 '증류주'가 아닐까 한다. 몽골의 대표적인 술로써 양이나 말 젖을 발효해 만든 술이 있으나 그 큰 대륙을 보급하는 데에 사실 적합한 술은 아니었다. 이유인즉슨 유제품이다 보니 장기 보관이 불가능했기 때문인데 중동 지역을 정복하고 거기서 얻은 증류법을 통하여 몽골은 장기 보관이 가능한 주조법을 익히게 된다. 


 동시에 이 주조법을 자기네 통치 아래에 있던 나라들에 퍼뜨리게 되는데 중국의 백주, 우리나라의 증류식 소주가 여기에 해당되게 된다. 몽골의 지배하에 있던 몇몇의 동유럽 국가들과 러시아 또한 보드카 주조법이 여기서 시작된다 볼 수 있는데 그렇기에 소주와 보드카의 유래가 같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현대로 돌아와 요즘 다시금 전통주 즉 증류식 소주가 재조명받는 것은 참 좋은 소식이라는 개인적인 생각이 있다. 애초에 희석식 소주가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식 술 주조법이라는 점, 그리고 원래 전통적으로 증류주가 참 발전 했었던 나라였다는 점을 생각해 보아도 원래 우리의 고유 브랜드가 다시 부활하려는 움직임이 아닐까 하는 인상을 받기 때문이다. 


 물론 증류식 소주가 희석식 소주에 비하면 가격이 저렴하지는 않다. 그러나 와인이나 위스키 등의 수입된 술들을 비싼 값에 마시는 것들은 당연시되는 반면에 우리 고유의 술들을 비싼 값에 소비하려는 것에 부정적인 시각이 있다는 점을 느낄 때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의 술을 조금 더 응원해주어야 할 시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 또한 해보며 이 글을 마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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