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9
평화로운 밤을 보내고 아침이 다가왔을 때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자명종이 망가져서 뜻하지 않은 늦잠을 잘 수도 있고, 현관문 앞 계단이 부서져서 넘어져 코가 깨질 수도 있다. 어쩌겠는가, 우리는 보기 전까진 아무것도 확실히 하지 못하는데. 양자의 세계 뿐만 아니라 인간 세상에서도 불확실성의 원리는 분명히 성립하고, 우리는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버클리는 이와 같은 사실에 너무나도 심취한 나머지 극단적인 경험론을 추구했다. 우리가 자각할 수 있는 것들만이 존재하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가 흔히 아는 '보통명사'는 언어의 농간에 불과하다는 결론이다. 버클리에 따르면 감정을 다루는 능동적, 영혼적 주체인 우리, 그리고 우리의 감각을 통해 생성된 관념들, (신을 제외한) 이 둘만이 세상의 구성 요소다. 인간은 자신의 '지각'을 분석함으로써 감각의 결과를 통일시켜 개념을 형성하게 된다. 또한 개념을 편하게 부르기 위해 보통명사를 만들어 냈으며 언어의 환상 속에서 자각 전 상태의 물질은 존재할 것이라는 착각에 휩싸여 있다. 이와 같은 행동을 착각으로 명명한 버클리는 보편자로서의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못을 박았다. 따라서 버클리는 일원론 중에서도 관념론자에 속하며, spiritual substance와 idea 외의 나머지는 언어의 산물로 치부했다.
나는 이 글을 2017년에 세상에 나온 맥북 프로 15인치로 작성하고 있다. 이 위대한 노트북은 세계적인 대기업 애플이 만든 것이다. 이런 우연의 일치가 있나! 버클리의 호소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사과를 예로 들려고 하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사과를 시작으로 관념론을 오목조목 따져보자.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상상해 보라. 당신은 공원 벤치에 앉은 채, 종종거리며 뛰어다니는 비둘기 떼를 바라본다. 그때, 저 멀리서 친구가 뛰어오는 것이 보인다. 당신은 반가움에 손을 흔든다. 마침내 당신 앞까지 다다른 친구는 헥헥거리며 묻는다. "좋은 아침이야! 사과 하나 먹을래?"
여기서 주목할 점은 친구는 아직 가방에서 사과를 꺼내지 않은 상태라는 사실이다. 일차원적인 경험론을 적용하자면, 지금 이 시점에서 당신은 친구가 내민 사과의 실물을 보지 않았으니 그 사과가 어떻게 생겼을지 모를 것이다. 과연 그럴까?
답은 '아니오'다. 당신도 나도 사과가 무엇인지 명백히 안다. 우리의 머릿속에 자리잡은 사과는 어떤 존재인가? 어떤 부분은 빨갛고, 어떤 부분은 약간 노랗고, 어떤 부분은 초록기가 도는, 상큼한 향기를 선사하는 과일이다. 아삭 하고 한 입 베어 물면, 적당히 시고 적당히 단 과즙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즙에서는 시큼한 꽃수술맛과 달달한 꿀물 맛이 난다. 한 손에 꼬옥 그러쥐면 그 작은 몸뚱아리에서 과일만이 선사할 수 있는 강인함이 느껴진다. 이와 같은 특징들이 한데 어울려 당신은 친구가 사과를 꺼내지 않아도, 친구가 가져온 사과를 직접 보지 않아도 충분히 사과를 자각하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좌우로 저을 수 있다.
지금까지의 묘사에는 공통점이 있다. 시각, 청각, 미각, 촉각, 후각의 오감이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이다. 이는 버클리의 주장을 충분히 뒷받침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인간은 감각의 결과로 물질 등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버클리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서, 현재 인식하는 가운데 위치하지 않은, 일반화된 추상(떠올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는 끈 이론만큼이나 상상하기 어려운 이론이기 때문에 버클리는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얼굴이 시뻘개진 채 입에 침을 튀겨가며 떠들어댔을 것이다. 그로서도 상당히 힘든 작업이었으리라.
앞 문단을 읽은 당신의 표정이 궁금해진다. 당신은 웃음지었는가, 아니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재빠르게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머릿속에서 싹 지워버렸는가?
버클리의 모습을 상상하는 구절에서 당신은 현재 죽고 없는 사람의 감정에 주목하며 고개를 주억거렸을 것이다. 우리는 왜 글을 읽으며 공감할 수 있을까? 글 속에서 우리가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고 그때 당시의 경험을 되돌리며 '그땐 그랬지'를 읊조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생각은 답답함을 느끼는 상사나 후배나 학창 시절 선생님의 모습에 접근했을 것이고, 추억 속 한 지점에서 본 적 없는 버클리의 존재가 투명종이처럼 겹쳐졌을 것이다. 이 점에서 나는, 버클리에게 미안하지만, 그에게 반기를 들 만한 요소를 쉽게 찾아냈다.
영화 '프로메테우스'의 여주인공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파악하고자 하는 안드로이드 데이비드의 수작으로 크나큰 곤경에 처한다.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자발적으로 수술대에 뛰어오른 그녀의 두려움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컸을 터. 남성 기준으로 맞춰져 있는 수술대라 꽤 난감하긴 했지만, 어찌저찌 하여 자궁 속의 외계 생명체를 꺼내버릴 수 있었다. 여기서 버클리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이 나온다. 산모는 자신의 아기를 낳기 전까지 뱃속에 있는 생명체가 '인간의 아이'임을 어떻게 장담하는가?
다소 섬뜩한 질문이다. 과학자들은 당연한 소리를 뒤집는 나 같은 사람에게 기가 찬 눈빛을 보낼 것이다. 사실 버클리의 입장에 서면 그렇게까지 황당한 의문점은 아니다. 지금까지 원하는 사람은 동물의 특성을 자연스럽게 구동해 자식을 낳아 길러 왔다. 그러나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감각을 통해서만 '그 안에 생명체가 있다'를 파악했을 뿐 두 눈 똑바로 뜨고 직접 보지는 못했다. 태아가 명백한 인류의 후손인 것은, 관념론적으로 솔직히 말하자면 '생물은 있으나 낳기 전까지는 모르는 법이다'. 하지만 관념론자가 계속 부정한다고 해서 DNA 등으로 분명히 증명되는 유전 법칙과 종의 보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 예시를 들어 보자. 열대 지방에 사는 원주민들이 쓰는 명사에는 '눈'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민족이 '눈'을 알 자격이 없는가? 이들이 하늘에서 펑펑 쏟아지는 눈을 모른다고 해서 핀란드 벌판에 퍼부어지는 눈폭풍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핀란드의 숲에도 사람이 살고, 그 사람은 충분히 눈을 인지하고, 감각으로 느끼고, 명백히 깨닫고 있다. 하지만 지구 위의 다른 사람이 자신이 깨달은 존재를 모른다고 해서 자신의 머릿속에서 '눈'이 갑자기 뿅 하고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오직 관념 뿐인데, 관념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 것과 이미 형성된 것, 다양한 인식 속도의 차이들, 인식하지 않아도 동물적 본능으로 갖고 태어나는 idea들(두려움, 배고픔 등)은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철학은 제 1 원인을 통해 세계를 설명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오직 인간만이 인지할 수 있는 존재들만 세상에 가득 찼다면 천지만물을 꿰뚫은 인간에게 그 누가 대적할 수 있으리요, 인간의 경험적 절차에 동참하지 않는 존재들은 어찌 그 가치를 보장받으리오까? 버클리 또한 지구상의 모든 생물, 무생물을 만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일반화할 수 있는가? 버클리의 논리대로라면 철학은 너무나도 불안정하고 오만한 학문이 아닌가?
나는 버클리가 철학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한낱 인간 따위가 눈으로 관찰하지 않아도, 몸으로 느끼고 있지 않아도 '무슨 일'은 어디에선가 분명히 일어나고 있기에 관념과 더불어 물질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여러분은 안심해도 좋다, 물질은 존재한다. 물질은 불확실성의 원리에게 축복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