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ME Standard & Code의 배경
모든 산업에는 표준과 규격(standard & code)이 존재합니다. 적어도, 통용되는 규칙이나 관례라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효과적인 생산 활동이 가능하고 공급망이 유지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생산되는 배관재의 가장 많은 물량을 소화하고 다양한 설비로 구성된 플랜트 산업 역시 대부분의 국가에서 통용되는 규격과 표준이 있는데, 그게 ASME(American Society of Mechanical Engineers)입니다.
플랜트 산업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빠꾸미”까지는 아니어도 ASME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싶었지만, 욕심이었습니다. 양이 너무 방대합니다. ASME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는 것은 (제 입장에서는) 불가능에 가깝고, ASME 정리를 평생의 역작으로 삼겠다는 각오로 어떻게 정리한다고 해도, 자주 사용되지 않는 내용까지 모든 내용을 정리하는 작업이 (누가 참잘했어요 붙여주지도 않고..) 정말 필요한 일인가 싶었습니다. 게다가, ASME가 아무리 헌법처럼 여겨진다고 해도, 돈이 오가는 계약에서는 발주처가 여러 표준과 규격을 짜깁기한 스펙이 더 우위에 있는 경우가 대다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얻은 조언은 일이 있을 때마다 관련된 내용을 찾아서 공부하는 것이었고, 필요한 내용을 찾기 위해 알아야 하는 ASME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들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ASME가 왜 만들어졌고,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떻게 구성되어서, 어디에 쓰이는지 대략적이라도 알고 있으면, 필요할 때 관련 내용을 찾아보기 훨씬 수월하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 ASME에 대한 기본적인 소개를 시작으로 몇 주에 걸쳐서 전달드리려고 합니다.
ASME를 이해하려면, 우선 ASME Standard & Code가 어떻게 무슨 이유로 만들어졌는지 그 배경부터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탄생 배경 1 - 19세기 후반 미국의 사회 문제 – 보일러 사고
1760년대 영국에서 시작한 산업혁명이 미국까지 퍼지면서 미국도 기계의 힘으로 엄청난 산업발전을 이뤘지만, 1860년대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미국 내에는 끊이지 않는 보일러 사고에 의해 재산 피해는 물론 심각한 인명 피해까지 발생합니다. 안전에 대한 어떠한 규제도 없이 보일러가 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보일러 폭발에 의해 불타오르는 증기선, Sultana 호
1865. 4. 남북전쟁 후 석방된 포로를 이송하는 증기선(Sultana)이 미시시피강에서 보일러 폭발로 침몰, 1,547명 사망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때 사망한 인원의 두배)
1895–1905, 3,600건이 넘는 보일러 사고로 76,000명이 사망.
1905. 3 메사추세츠 주의 신발공장에서 보일러 사고로 58명이 사망, 117명 부상.
위와 같은 사고들에 의해, 보일러 제작 시 안정성 확보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거세지게 되었고, 1907년 메사추세츠 주에서 보일러 관련 법을 제정하기 위한 위원회가 만들어지고 1909년, 보일러 제작과 관련된 법인 "증기 보일러의 작동 및 검사에 관한 법률 (An Act Relating to the Operation and Inspection of Steam Boilers)”이 발표되었습니다. 메사추세츠 주를 시작으로 오하이오 주에서도 보일러 관련 법률 초안(1911년)이 작성되고, 다른 주에서도 법령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법령들의 내용이 주마다 달랐기 때문에 법이 다른 주에서 제작된 보일러는 사용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탄생 배경 2 - 20세기 초반 보일러 관련 표준을 만든 ASME
ASME는 미국의 각 주에서 보일러 관련 법률을 저마다 제정하기 이전부터 ‘표준화’의 필요성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ASME를 설립한 창립자들은 (Henry Rossiter Worthington, Alexander Lyman Holley, John Edson Sweet) 보일러의 안전, 신뢰성 및 운영 효율성을 보장하기 위해 설계와 운영에 관련된 표준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하고 1884년 ASME 설립과 동시에 보일러와 관련된 첫 번째 표준인 “증기 보일러 시험 수행 코드(Code for the Conduct of Trials of Steam Boilers)”를 발표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주마다 다른 보일러 관련 법률을 지켜보던 ASME는 보일러 산업을 포함한 모든 산업의 미래를 위해 모든 주에 표준화된 규격(code)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보일러 및 압력용기의 설계, 제작, 운전에 대해 표준화된 권고사항을 제정하기 위해 팀을 구성했습니다.
ASME의 노력에 의해 1914년 보일러 및 압력 용기 코드(BPVC, Boiler and Pressure Vessel Code) 초안이 만들어지고 1915년 봄, 최초의 ASME Boiler Code인 Section 1 - Power Boiler가 발행되었습니다.
Standard? Code?
미국의 사회 문제가 되었던 보일러 사고를 계기로 만들어진 ASME Standard & Code는 “설계를 하는 엔지니어들이나 제조사, 제작자, 최종 사용자(end user)들이 생산 활동 전반에서 적용하거나 참고할 수 있도록, 미국(현재는 세계 각지의)의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해당 산업의 안전과 효율적인 생산 활동을 위해 필요한 내용들을 모아서 만든 기술적 지침서(guides)”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궁금했던 건, standard(표준)와 code(규격)의 차이였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분 중 가장 유능한(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QC(Quality Control) 전문가 님이 알려주신 내용에 따르면, standard(표준)는 ASME와 같은 단체에서 발행한 표준집으로 생산 활동 전반에 필요한 ‘권고사항’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code(규격)는 다른 말로 법규, 규정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법규로 해석될 수 있으니 강제요건(mandatory)을 의미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ASME에서 정리한 표준이 미국 국립표준협회인 ANSI에 의해서 미국의 국가 규격으로 정해지듯이, 표준이 어느 국가의 정부 기관에 의해 차용되어서 법으로 강제되면 해당 국가에서 통용되는 규격이 되기 때문에 code(규격)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당 code가 어떤 상황에서든 반드시 적용해야 하는 강제요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는 standard는 일반적으로는 권고사항을 의미하더라도 계약 당사자 간에는 계약자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강제요건이 됩니다.
그러니까, 표준이든 규격이든 계약서에 적힌 내용이 갑이고, 계약서에 명시된 조건만이 강제요건이 될 수 있습니다.
다음 주에는 ASME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그 기본 구조와 각 섹션과의 관계를 정리해서 전달드리겠습니다.
좋은 한 주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