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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원 Oct 31. 2019

사용자 경험의 법칙

필자가 미국의 N모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끝마치고 학위 수여식을 할 때이다. 졸업생들에게는 오랜 기간 괴롭혔던 논문과 취업의 관문을 넘고 가족과 함께 인생 최고의 시간을 만끽하는 시간이다. 가족과 교수진 모두 강당에 모여 학생 한 명 한 명을 호명하면서 목에 대학을 상징하는 색깔의 후드를 둘러주고 있었다. 한창 행사가 진행되고 있을 즈음, 갑자기 학생들의 환호성과 함께 한 교수가 붉고 푸른 옷을 입고 머리엔 너구리 꼬리가 달린 모자를 휘날리며 등장하였다. 하얀 수염을 가진 조금은 왜소한 체구의 교수였다. 오다가다 화장실에서 마주쳤던 것을 보면 같은 건물에 있었던 것 같았다. 조금 인기가 많은 교수려니 했다. 


그 당시 필자는 오랜 job search 끝에 I모 기업에서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오래지않아 워라벨이 극악인 곳임을 깨달았는데, 직원들은 항상 노트북을 들고 퇴근하였고 매니저는 오후 11시나 새벽 5시나 이메일을 하면 거의 실시간으로 답변을 주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퇴사율도 높았는데 흥미롭게도 팀원 중 누가 회사를 나갈 것인가를 나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다. 점심 시간에 한 구석에서 심각하게 전화를 받고 있는 사람이면 백이면 백 회사를 타 회사와 전화 인터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필자도 영주권을 확보한 후 어렵사리 G모사의 매니저와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책을 데이터베이스화하는 팀의 매니저는 전화를 통해 두가지 문제를 내었다. 트리 알고리즘과 파일 시스템에 관련한 것이었는데 운 좋게 1차 합격통지를 받았고 너무 기쁜 마음에 필자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그 문제와 경험을 익명으로 (한글로!) 직딩 커뮤니티에 올렸다. 웹에 이런 것들이 떠돌던 때라 별 생각이 없었는데 바로 다음날 인사 담당자가 전화가 오더니 (영어로!) "포스팅을 내려 주시고 인터뷰 프로세스를 중단하겠" 단다. 빅 브라더의 위엄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디자인을 가르치게 되면서 문득 디자이너에게는 어떤 인터뷰 질문을 하는지 궁금해 디자인 직군을 위한 입사 시험 문제를 검색한 적이 있었다. 널려 있는 코딩 문제들 속에서 M모 기업의 UX 디자인 직군을 위한 문제 하나를 겨우겨우 찾을 수 있었다.


"시계와 온도 조절계를 하나의 기기로 디자인해 보아라" 




강의를 할 때 "우리 시절에는 말이야.." 라는 이야기를 하는 순간 학생들의 주의력은 급격히 감소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언급할 때가 있는데 바로 A사가 스마트폰을 필두로 화려하게 재기하는, 디자인의 변곡점이라 할 수 있는 시점이다. 이전까지는  M모 기업과 I모 기업이 쿵짝이 맞아서 컴퓨터 성능으로 수요를 만드는 깡패짓을 매우 오랫동안 하고 있었다. 컴퓨터나 전자제품을 구매하면 의례히 두꺼운 메뉴얼이 함께 배달되었고, 중간에 먹통이 되는 경우 언제나 그 책임은 메뉴얼대로 하지 않은 사용자의 것이었다. 시장을 독점을 하고 있었으니 별 다른 옵션도 없었다. 


이럴 때 A사와 함께 등장하여 사자후를 토하던 사람이 UX 구루로 유명한 바로 그 유명한 돈 노먼 (Donald Norman) 아저씨 되시겠다. 그는 저서에서 "네 잘못이 아니야. 디자인이 인간을 고려하지 않는 게 문제지" 라고 기죽은 우리들을 개화시켰다. 지금은 당연한 것이지만 3~40년 전 일어난 일임을 생각해보면 정말 시대를 앞선 선구자였다. 문제는 이 분이 컴퓨터를 공부한 심리/인지공학자라는 것인데, 저러한 비전을 가지기 위해 정녕 인간을 연구한 비 디자이너의 눈이 필요했나보다. 알고 보니 학위수여식에서 너구리 꼬리를 휘날리던 분이 이분이었는데 과연 화장실에서 마주치는 시큰둥한 동양 유학생을 무슨 생각으로 바라봤을지 궁금하다. 


이 분이 정리한 인지공학적 시각에서 디자인을 위한 법칙 중 natural mapping이란 것이 있다. 필자가 이해하기로는 mapping, 즉 A에서 B 집단으로의 '대응'이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으로 A는 작용 가능한 컨트롤러의 집합이고 B에 해당하는 것은 컨트롤러의 작동의 결과의 집합이다. 즉 어떤 컨트롤이 어느 곳의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사용자가 잘 식별할 수 있어야 한다.  



위 예시는 필자 학교 교실에 있는 전등 스위치다. '어떤 스위치'가 '어떤 전등'에 해당하는지가 전혀 (설명을 보아도!) 직관적이지 않다. 고백하자면 필자는 5년 넘게 산 거실 스위치도 여러 번 껐다 켰다를 반복해야 한다. 미니멀리스틱한 디자인을 위해 별 생각없이 예쁘게 줄을 세워버린 디자이너가 그 원흉인데, 내부자의 입장에서 너무 이해가 가는게 문제이다. 자동차는 이러한 mapping의 보고이다. 먼저 운전대를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시키면 좌측으로 움직이도록, 시계방향으로 돌리면 우측으로 움직이도록 mapping되어 있다. 깜빡이 바는 아래로 내리면 왼쪽, 올리면 오른쪽을 켜게 되어 있다. 하지만 와이퍼 속도 조절계는? 바를 내리는게 빨라져야 하나 아니면 올리는 게 빨라져야 하나? 

 


조금 더 난이도를 높여보자. 싱가폴 전철인데 혹시 카드 모양의 불빛 6개가 보이는지? 무엇인지 상상이 되는가? 잠시 한 번 고민해보자. 그렇다, 다음 정거장 열리는 문의 방향 표시로서 아래쪽 불빛은 정면을, 위쪽 불빛은 후면의 문이 열릴 것임을 가리킨다. 우리나라 전철에서 '오른쪽', '왼쪽' 방향이라는 방송을 듣느라, 아니면 전방이 어딘지 생각하느라 고생한 적은 없으신지? 




이 분이 주창한 또 다른 원칙으로 mental model이란 것이 있다. 주로 복잡한 제품의 작동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자가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가정들을 잘 알고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컴퓨터를 직접 조립한다고 해보자. 컴퓨터의 작동 방식을 아는 사람은 조립할 때 마더보드를 중심으로 CPU, 메모리가 장착되고 각종 인터페이스를 통해 모니터, 저장장치, 네트워크, 프린터 등을 연결할 것이다. 하지만 컴퓨터가 없던 세상에 태어나신 할머니는 어떠실까? (할머니 심정이 이해가 안 간다면 집의 라우터/스위치/모뎀을 다 해체해보자)



개인적인 사례로 한국으로 귀국하여 처음 케이블 TV를 사용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참고로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너무 심심한 상황이었는데, 리모컨 두 개를 아무리 눌러보아도 채널이 나오질 않았다. 케이블 채널 provider와 TV의 역할분담에 대한 mental model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위의 사진은 스위치 한 번 잘못 눌렀다가 손주에게 두고두고 타박을 당하신 장모님의 디자인이다. 투박하지만 단호한 규칙이 엿보인다: (1) 두 리모콘은 한 운명이다 (2) 전원은 무조건 TV의 그것만 켜고 끈다 (3) 볼륨과 채널은 셋텁박스의 그것만 바꾼다. 


Don Norman이 저서에서 제시한 사례는 집안의 온도 조절계이다. 문제의 핵심은 온도 조절계가 실상 유입되는 공기의 온도를 조절할 수는 없고, 고정된 온도의 공기 유입을 조절하는 계폐기에 가깝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그것을 모르고 타겟 온도를 높일수록 더 따뜻한 공기가 들어오리라는 (어디 다른 곳에서인가 형성된) mental model 로 인해 필요 이상으로 온도를 높이게 된다. 학생들에게 이를 해결하라고 수업 시간에 문제로 주었는데 머리를 싸매봐도, 인터넷을 뒤져봐도 도통 만족스러운 답을 얻기 힘들다. 그러다가 머리를 띵 하게 얻어맞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려 낸 학생은 아마도 별 생각이 없었으리라 강하게 의심하고 있다)

 

by raphaelsilva @ pixabay


왜 이 버튼을 보면 필요 이상으로 온도를 높이지 않고 싶을까? 우리의 목표는 온도를 필요 이상으로 올려도 실제로 원하는 쾌적한 온도에 도달하기 까지는 시간이 같음을 전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히터가 일하는 "열심의 정도가 일정"하다는 것인데, 위 비디오 플레이백 은유는 온갖 거추장스러운 정보없이 그런 느낌적인 느낌을 온몸으로 풍기고 있다. 


이제 M 사에 입사할 준비가 되었는가? 온도조절계에 걸맞는 또 다른 메타포가 바로 시계였던 것이다! 시계의 움직임에 강하게 길들여진 우리는 부채꼴 형태로 할 일의 '양'을 지정하면 그것이 '줄어드는 속도'가 일정하리라 예상한다. 시계와 온도 조절계를 합치는 것은 또다른 문제인데, 바로 '모드 에러'를 최소화하라는 것이다. 모드 에러는 구현된 기능에 비해 컨트롤의 수가 한정되었을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키보드의 영문 대문자와 소문자는 캡스락의 조그마한 램프를 통해 문제없이 잘 통합이 된다. (이에 반해 인터넷 주소를 적을 때 한글로 시작하는 문제는 도무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아침에 울려퍼지는 시계 알람을 끌 때 난방장치를 꺼버리는 참사를 막으라는 이야기이다.  



사실 많은 디자인 문제들이 위에 본 사례들처럼 간단하게 정의되지 않는다. 직관적인 것은 기본이고, 잘 팔려야 하고, 싸게 생산할 수 있을 뿐더러, 무엇보다도 안전하고, 감성도 충만해야 한다. 하지만 노먼 아저씨의 작업은 디자이너들이 간과하고 있는 큰 부분이 몇 가지 법칙을 통해 훨씬 향상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과학적 근거'에 의거한 디자인 법칙 중 이렇게 영향력이 큰 것이 있었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은 벌써 디자인 학부 수준에서 다룰 수 있는 이론들이 되어 버렸다. 여기에서 더 나아갈 방법은 없을까? 인지공학, 더 나아가 심리학은 불합리하기 그지없는 '인간성'에 대한 방대한 관찰기록이다. 이제 그 경계를 한 번 넓혀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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