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린 시절은 밝지 못했다.
시골에 사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큰 컴플렉스였고, 그로 인해 유난스런 사춘기를 보냈다.
왜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지 않았는지, 왜 나는 여기 이 오지에서 살아야하는지... 등등 남루하고 초라했던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럼에도 조약돌같이 작은 동네에서 조금 똑똑했단 이유로 나는 오만으로 가득찼고, 동네에서 함께 지내던 친구들을 은연 중에 무시했다.
' 난 너네와 달라. 난 여기서 안 살거야. 이따위 초라한 동네에선 난 십대가 끝이야. 난 성공할거야....'
그당시 내 꿈은 미국에 사는 것이었다.
그냥, 미국에서 어떤 일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영어를 아주 좋아한다는 이유로 미국에서 살고 싶었다.
왠지 미국에서 살면 성공한 사람 같았고, 부자같았고, 똑똑해보였다.
가난한 시골 촌뜨기가 미국으로 대학을 갈리는 만무하고, 나이가 차면서 현실을 깨달았다.
미국에서 살고 싶단 꿈은 어디 보이지도 않은 가슴 한 켠에 접어두고 나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대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대학 2학년이 되었을 무렵, 갑작스레 공부를 하겠다며, 아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림동으로 들어갔다.
두평이나 될런지. 침대와 책상만 간신히 들어가 있는 닭장같은 고시원.
그 당시 나는 닭장이래도 '서울'이라는 브랜드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리고 왜인지 그 닭장같은 고시원에서 공부도 더 잘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처음 서울에 등짝을 디뎠고, 대학 내내 서울과 지방에 있던 학교를 왔다갔다 하며 반쯤은 서울사람인양 우쭐해하며 보냈다.
하고싶었던 공부는 '촌년의 서울탐험기'로 끝나며 시험에서 떨어졌고, 그 때 이십대 중 가장 우울한 시간들을 보냈다.
돌이켜보면 시험에 떨어졌다는 그 사실 자체보다는, 내가 다시 '시골'에 살아야 할것만 같은 두려움이 컸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눈물이 났고, 눈물은 하루종일 멈추지 않았다.
삽시간에 티슈 한 통을 다 썼고, 학과 수업도 들어갈 정신이 아니었다.
인생에서 이렇게 불행한 순간이 또 있을까 싶을 때 그 당시 남자친구는 우는 내모습을 보며 몇날이고 옆에서 함께 울었다. (그 때 그 눈물많던 남자친구는 남편이 되었다.)
강단있고, 센척하는 나를 안타깝게 보던 남자친구는 나의 취업을 위해 본인이 나서서 백방으로 알아보러 다녔고, 우연한 기회에 어느 회사에 자소서를 써볼 수 있는 기회를 줬다.
비구름이 지나가면 해가 뜨는 것처럼, 세상이 끝날 것만 같던 내게 '직장인'이란 타이틀이 걸렸고, 그토록 바라고 바랐던 시골을 떠날 수 있는 기회도 생겼다.
행복하고, 즐거웠다. 연착륙 하듯 남자친구도 이듬해 취직을 했고, 그 이듬해 결혼을 했다.
그리고 결혼과 동시에 아이가 생겼고, 그저 요즘 젊은이가 그렇듯 일하며 아이 카우며 정신없는 삶을 보내며 살아왔다.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해 고군분투 하며 살고 있는 어느 시기 즈음, 실시간으로 티비에서 배가 가라앉는 모습이 중계됐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려던 고등학생들 수백명이 주로 타있는 배가 가라 앉았다는 것이다.
이 일을 시작으로 나라 전체가 비통함과 슬픔에 잠겼고, 온 거리에는 우울함과 절망으로 가득했다.
국민들의 우울함과 절망을 어쩜 그렇게 잘 알아차렸을까. 매체에서는 연일 청와대의 잘못이라고 들쑤시며, 온갖 비리와 구린내로 찌든 정치권의 민낯을 파해쳐줬다. 아마 그 때가 내가 인생에서 가장 뉴스를 집중해서 시청한 때가 아니었을까.
아무튼 몇개월이 흘렀고 고등학교 때 '정치와 사회' 교과서에서만 보던 '대통령 탄핵'이 결정됐다.
국민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지켜야할 의무를 다하지 않고,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 대기업 등에 위력을 행사하여 사리사욕을 탐하였다는 등... 국민이 느낄 수 있는 모든 나쁜 행동은 다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국민 모두가 한마음으로 기뻐했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고, 희망찬 미래를 상상하면서. 사람들은 환호했고, 열정적으로 지지했다.
나 또한 반가웠고, 내 삶이 더 나아지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으며 그저 인류 역사의 점 하나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공정과 평등을 외치며 사람들은 갈라섰고, 가진 자와 못가진 자를 편가르기 하며 싸우기 시작했다.
그 때마다 나는 내가 속해있는 이해관계에 따라 이쪽 저쪽을 오가며, 나랑 다른 쟨 나빠. 라는 식의 입방정을 내뱉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행복하고, 잘살 수 있을거라는 실낱같은 희망과 함께.
그런데, 점점 시간이 갈수록 내가 생각하는 미래와는 거리가 멀어졌고. 어떤 분야든 진영 간의 갈등은 격해졌다.
간호사와 의사의 편가르기, 공공의대의 설립,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다주택자에 대한 비난, 특목고와 자사고의 폐지, 각종 세금 인상...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정책에 관심이 많았을까.
나는 그저 시골이 싫어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다는 서울에서 살아보고 싶은 그냥 촌뜨기였는데.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정부 정책을 피부로 느끼고, 나한테 어떤 효과가 미치는지 자로 재면서 머리아파 했을까.
그리고 어린시절 갈망하던 이민 이야기가 몇년 전부터 식탁위의 안주로 종종 등장하기 시작했다.
여러 강대국에 끼어 눈치만 보는 나라.
뭐하나 제 힘으로 할 수 있는게 없는 나라.
비위와 비리로 몸살을 앓는 나라.
독감 주사 하나도 목숨을 담보하고 맞아야 할 정도의 신뢰도가 없는 나라.
소 귀에 경 읽기라는 말을 실감하는 나라.
여기서 나와 내 가족이 계속 살아야 하는 게 맞을까.
참. 뭘해도 믿지를 않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믿게 하려고 용을쓰고.
진짜 요지경같은 나라가 되어버렸다.
이런 요지경을 탈피하자고, 이민을 간들 해결이 될 수 있을까.
인종차별은 고사하고.
삼십년이 넘도록 한국 짬밥을 먹은 내가 그쪽 문화에 적응할 수 있을런지.
가서 뭘 먹고 살 것이며.
미국이라고 비위와 비리가 없을리가 있나.
빈익빈 부익부는 미국만한데가 없는데, 거기서 내가 어떤 위치에 있을 수 있는지.
거기도 사람사는데는 마찬가진데. 비상식적이고 알고싶지 않은 일은 훨씬 많을텐데.
어딜 가도 불편하고 불쾌한 진실은 감히 내가 셀수도 없을만큼 넘쳐나겠지.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사회도 다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니.
실제로 내가 이민을 갈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리고 지나간 세월 탓인지, 나도 한국인이랍시고. 외국가서 낯선 문화에 적응하는 게 이제는 두렵기도 귀찮기도 하다.
이 땅에서 한 창 자리잡고, 안정적인 삶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야하는 삼십대가 이렇게나 진지하게 나라를 떠나고 싶다는 건.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는 건.
앞으로의 미래가 어떤 식으로든 밝지는 않아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요즘은 이상하게 답답하고 한숨이 자주 나온다. 머리도 자주 아프고...
다시 예전처럼 내 통장 배불릴 걱정이나 하고, 내 아이 예쁘게 키울 걱정이나 하면서 살고 싶다.
며칠동안 신문기사를 집중해서 보니, 하도 요지경인지라....
'그렇게 요지경인 때도 있었구나.' 라고 기억하기 위해
나의 한 평짜리 서재에서
BY. 에이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