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
나는 군인이다.
모든 군인이 그렇듯 아직은 군인이다.
우리 군인에게는 ‘사명’이 있다.
대한민국의 자유와 독립을 보전하고 국토를 방위하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나아가 국제평화 유지에 이바지함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명을 온전히 해내라고 국민의 무력을 합법적으로 위임해 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인들의 무력은 합법의 틀 안에서만 사용되어야 한다.
그 틀을 벗어난 범위, 예컨대 사조직의 영달을 위해 무력시위와 사용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불법 행위이겠다.
법치국가에서 불법은 곧 악이며, 이를 막으려는 시도는 선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 영화는 간단히 말해 선과 악의 싸움을, 그것도 실제로 벌어진 싸움을, 나아가 선이 끝내 패배한 싸움을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심장박동.
대부분 서사의 결과를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 기반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람객들의 심장박동을 뛰게 만드는 영화로 유명하다.
나 또한 원하지 않는 좁디좁은 가능성의 결말로 좁혀짐에 따라 심장이 뛰고, 답답함에 온몸이 가렵고, 탄식이 마른 입술 사이로 새었다.
서사뿐만 아니라 익히 얼굴은 알고 있지만 유연한 연기로만 기억되는 많은 배우들의 열전이 나의 목을 잡고 스크린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도 나의 심장박동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너는! 대한민국 군인으로도! 인간으로도! 자격이 없어!’ 라고 외치는 이태신 장군을 분한 정우성 배우의 처절하고 굳건한 눈빛이 한가득한 장면이었을 테다.
왜냐하면 그 눈빛은 전두광을 향하기도 하지만, 국민보단 전두광에게 충성한 조직에게, 전두광에게 휘둘리는 무능력한 군인들에게, 과거를 잊거나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군인으로 녹을 받고 살았던 나에게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는 전두광이었고, 군인과 인간으로서 부끄러움으로 심장박동이 뛰었다.
세종대로.
영화 도중 탱크와 병력이 전진하는 세종대로에는 이순신 장군이 먼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요즘 육아하며 아기가 자는 침대에서 ‘칼의 노래‘를 다시 읽었었기에 장면이 남다르게 보였다.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 장군은 무위의 죽음, 즉 아무 의미도 없는 죽음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에게 무위의 죽음이란 일테면 허상에 공포를 느끼는 조선 임금에게 죽거나 혹은 일본의 적들이 무사히 돌아간 이후의 세상에서 맞이하는 죽음이다.
그는 대신 자연스러운 죽음, 자연사를 원한다.
그의 자연사란 일본의 적들을 섬멸한 이후에 혹은 섬멸하다가 죽는 것을 말한다.
결국 우리 모두가 알 듯 이순신 장군은 노량에서 그가 그토록 원했던 자연사 한다.(곧 개봉할 영화 ‘노량’ 결말 스포.)
우연인지 이름의 가운데 글자만 다른 이 영화의 이태신 장군에게도 그만의 자연사는 중요한 삶의 목적이다.
수도를 방위하는 부대의 장으로서 국가의 안위를 흔드는 반란군은 당장 탱크를 끌고 가 대가리를 뭉개다가 죽는 것이 그가 원한 여한 없는 자연스러운 죽음, 자연사일 것이다.
결국 나의 심장박동을 뒤흔든 그의 눈빛은, 세종대로에 서계신 이순신 장군이 먼 남쪽을 바라보는 눈빛과 다름없을 것이다.
전선을 간다.
성시경이 그의 유튜브에서 멜로디가 아름답다고 극찬한 군가 ‘전선을 간다’가 엔딩 크레디트에 웅장히 깔린다.
사관학교 생도시절 군장을 메고 숨이 꼴까닥 넘어간다는 깔딱고개를 뛰어넘으며 수 없이 불렀던 군가다.
높은 산 깊은 골 적막한 산하 눈 내린 전선을 우리는 간다.
젊은 넋 숨져간 그때 그 자리 상처 입은 노송은 말을 잊었네.
전우여 들리는가 그 성난 목소리.
전우여 보이는가 한 맺힌 눈동자.
노래를 들으며,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흥분한 마음과 뜨거운 여운을 온전히 감각했다.
확실히 이 영화를 통해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을지도 모를 그 성난 목소리와 한 맺힌 눈동자를 만날 수 있었다.
또 수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있다는 소식도 반갑고 동시에 고마웠다.
결국 스크린이 텅 비었다.
아직 군인일 때 이 영화를 만나서 다행이었다.
많은 순간에 이태신과 이순신의 한 맺힌 눈동자를 기억하겠다.
온 대한민국이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