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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 Apr 08. 2021

현장 콘티를 안 하는 콘티 작가

천천히 가는 지금도 만족스럽다


콘티 지망생 때 생긴 불안으로 현장 콘티를 하나씩 안 하게 되었다. 지금도 현장에서 그리는 콘티는 작업하고 싶지 않다. 현장에서 콘티 발주를 받고 바로 작업하는 방식이 아닌 난 대부분 안전지대인 집에서 작업한다. 콘티가 필요하지만 급하지는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내가 받는 스케줄은 다른 콘티 작가들보다 상당히 넉넉한 편일 것이라 예상이 된다. 나의 이런 작업방식으로 직업에서 오는 불안과 스트레스는 많이 줄어들었다. 코로나 19가 오면서 오히려 더욱더 빛을 발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작업을 잘할 수 있는 공간에서 온라인으로 일을 받고 작업물을 전달하는 방식은 나한테 최적화된 작업방식이었다.


콘티작가라면 어디서든 빠르게 작업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이 있다. 하지만 다른 콘티 작가와 약간 다른 작업방식은 남들에게 숨기고 싶은 콤플렉스이기도 했다. 내가 정말 콘티 작가가 맞을까? 콘티 작가를 흉내 내고 있는 사람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작업 속도가 느린 이유 중 하나는 콘티 퀄리티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사실 콘티는 잘 그릴 필요가 없는 그림이다. 콘티는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서 그려지는 그림이다. 쓸모를 다 했을 때 버려지는 그림이고 다시 재활용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런데도 나는 자꾸 퀄리티에 집착하게 된다. 초반에는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한쪽 모니터에 다른 작가의 콘티를 띄워놓고 작업을 하였다. 어떤 작가님이 나의 그림을 보고 “소정 작가 그림은 정성스럽게 그린 게 느껴져요. 힘을 다 주고 그린 그림 같아요”라고 말했다. 어느 정도는 힘을 뺄 줄도 알아야 하는데 나는 집착을 내려놓기 힘들다. 아니면 아직 요령이 없어서 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날것의 그림을 보여줄 용기가 없기도 하다


그럼 나는 왜 집착하는 걸까? 아마도 PD 시절의 경험 때문인 거 같다. 내가 PD일 때는 구글에서 이미지를 찾아서 붙이거나 졸라맨으로 직접 그려서 붙이는 방식으로 발주 문서를 콘티 작가에게 넘겼다. 그런데 몇 시간 후에 나한테 오는 작업물은 정말 완벽한 그림이었다. 항상 그림을 받을 때마다 놀라웠다. 그 콘티를 PPT에 올려놓으면 문서가 더 완벽해지는 것 같았다.  다 같이 고생해서 나온 아이디어가 실제로 완성되어서 나오는 느낌이었다.  그때의 그 감정 때문일까, 보는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매번 하는 것 같다.  클라이언트의 기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에 계속 계속 정성을 쏟고 싶다. 하지만 문제는 나보다 더 잘 그리면서 손이 빠른 작가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가 현장 콘티를 하는 작가가 되는 건  언젠가 다시 마주해야 하는 숙제라고 생각한다. 급한 상황에 내몰렸을 때 실력이 빨리 는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천천히 단계를 밟아가면서 가는 것도 괜찮다고 믿고 싶다. 그리고 나는 콘티를 계속 그리면서 일러스트 작업도 접해보고, 글도 쓰면서 계속 계속  관심사를 놓지 않고 나의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면서 천천히 가는 지금이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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