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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봉선 Mar 16. 2024

죽고 싶다는 생각...



이런 말을 하면 누구나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쉽다.



삶을 놓고 싶을 때,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느낄 때,

너무 힘든 상황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할 때,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힘들어 편해지고 싶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죽음을 생각한다.


살면서 죽음을 떠올리지 않고 산 사람이 있다면 좋은 환경에, 좋은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죽음을 떠올리는 때,

우리는 죽음을 계획을 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잠깐, 잠깐의 생각에 힘들다고 느끼고, 편해지고 싶다고 생각할 때마다 그 생각은 나를 잠식하고,

그 잠식은 그저 안식으로 끝날 것이라 생각하고, 실행에 옮기길 위해 정당함을 위장하기도 한다.


사람은 제 각각의 생각과, 환경과 외형으로 살아간다.


생각이 좋으면 좋은 행동이 나올 수 있어 많은 이들이 좋아할 수도 있다.

외형이 좋으면 호감을 얻을 수 있기에 이 또한 많은 이들이 좋아할 수도 있다.

환경이 좋으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막힘이 없이 그저 나아가는 일만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람 사는 일이라 좋을 환경만 있을 수 없고, 좋은 생각만 있을 수 있으며 없으며, 좋은 외형을 못 갖출 수도 있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던 이들에게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이 날아올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린

'왜?'를 떠올린다.

그 사람에게 좋은 환경이 있을 수 있고, 좋은 생각이 있을 수 있으며, 좋은 외형도 있을 수 있다.

헌데 '왜?"



남에게 좋은 인상으로 좋은 호감을 갖게 하는 사람일지라도 남이 모르는 아픔이 있을 수 있고, 이겨내지 못하는 정신이 있을 것이다.

그저 겉으로만 웃고 있다고 그 사람이 온전히 웃고 있는 게 아닌 것이다.



눈물을 흘리면 '저런 사람이 뭐가 부족해서 울어? 우리처럼 힘들어 봤어?'

화를 내면 '좋게 봤는데 저렇게 성질도 부리네.'



세상에 사람들은 갖가지 사연으로, 갖가지 이유로 인해 힘들어한다.

어떤 이 에게 별개 아닌 말이지만, 어떤 사람에겐 비수가 되는 말이 있기도 하다.

어떤 이 에게 어떤 행동을 하면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이 에겐 칼을 들게 하는 행동일 수 있다.

그만큼 환경적인 생각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는 이겨낼 수 있는 아픔이지만,

누구에게는 이겨낼 수 없는 아픔이 있게 마련이다.


불교에서는 윤회라는 삶이 있는데,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닌 다시 시작이란 뜻이다.

돌고 돌고 돌아 삶을 산다는 윤회.


리셋버튼 하나로 인생이 새로 시작되지는 않지만,

지금 내가 죽는다고 새로운 인생이 지금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는 얘기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게 마련이다.

내 삶도 시작이 있기에 끝이 있을 것이다.

그 끝을

'잘~ 정리해서 잘~ 살았다.' 마무리를 짓는다면 다음 생에 윤회로 다른 삶이 왔을 때, 다시 시작되는 삶은 좀 더 여유롭고, 행복하게 시작하지 않을까...


내 삶이 끝이 났을 때,

주위에 안타까움과 슬픔이 존재한다면 난 잘 살았을 것이고,

당연한 죽음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다면 난 잘 못살았을 것이다.


언젠가 내 장례식장에 있을 사람들에게

'참~ 멋진 사람이었어'

라는 말을 듣고 가는 길이 있다면 조금은 아주 조금은 이 험난한 세상에 잘~ 참고, 잘~ 견디고 그렇게 잘 마무리하고 가는 길이 가볍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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