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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봉선 Nov 21. 2024

큰 며느리는 그렇게 해야지.





참, 희한하다.

왜 큰 며느리는 그렇게 해야 할까?


난 큰 며느리다.

내가 되고 싶어 된 것이 아니고, 나이순으로 짱 먹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저 신랑 만나 결혼하니

"큰 며느리야~"가 됐다.



직장을 다니다 연예를 했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결혼을 하게 됐다.

밥을 잘 하진 못해도 전기 스위치는 누를 수 있었고, 계란프라이는 정확하게 노른자를 터트리지 않게 할 수 있을 때 결혼을 했다.

신혼집을 차리고, 시댁 식구들을 초대했었다.

엄마 음식 솜씨가 좋으니, 언니 또한 솜씨가 좋았고, 난 맛을 잘 느꼈다.

맛을 잘 보면 간을 잘 맞춘다. 그래서 음식이 맛있을 수 있다.

장금이는 아니더라도 어디서 음식을 먹으면 비슷하게 흉내를 낼 수 있었다.

내가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겠는가, 엄마와 언니는 우렁각시처럼 상을 거하게 차려 놓고 가셨고, 잔처리 하고 있으니 시댁식구들이 오셨다.

음식이 맛있다고 아버님, 어머님은 좋아하셨고, 지금도 가끔 그때 먹은 미역국이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하실 정도로 맘에 들어하셨다.

그러니 자연히 나 또한 음식을 잘하시는 줄 아셨다.


결혼하고 처음 맞는 명절에 신랑을 데리고 하루 전 가서 앞치마를 입고 기다렸다.


"어머니 음식할 거 주세요."

"아니 천천히 해도 되는데."

"네? 시간이..."

친정에서는 아침 9시부터 전을 부치기 시작하면 2시에 끝날 정도로 일이 많았다. 근데 점심을 드시고 tv를 보시는 어머니께 재촉을 했다.

그때 어머니는 냉장고에서 돼지고기 간 것을 꺼내셨다.

"이거 내가 시장에서 사 갖고 왔는데..."

어마 어마한 양이였다. 돼지고기 간 거... 딱 그것만,

"이걸루 뭐 하실 거예요?"

"동그랑땡이나 만들지 뭐."

'아~시댁에서는 돼지고기로만 동그랑땡을 만드는구나.' 했다.

하지만, 두부, 홍당무, 양파를 넣으니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나를 시험하시려고 그러시나?'

프라이팬에 혼자 동그랑땡모양을 만들고, 밀가루 옷을 입히고, 달걀에 담가 이쁘게 모양을 내며 부치기 시작했다.

"어머니, 동서는 왜 안 와요?"

"아기가 있잖니."

"그럼 아가씨는요? 시집가기 전에 친정에서 마지막 명절인데 어디 갔어요?"

"음~~ 저... 회사 갔다. 회사"

(알고 보니 친구들과 놀러 갔다.)

그 한 가지 전만 난 밤 11시까지 했다.

허리 한번 피지 못하고 하루종일 혼자 만두며, 전을 부치니 화딱지가 났다.

방에서 자고 있는 신랑이 미워 발로 차며 친정 엄마한테 전화를 하는데 눈물이 났다.


"음식은 다 했니?"

"엄마는? "

"난 아까 다 했지. 좀 쉬고 있다."

더 이상 말을 못 하는 내게 엄마는

"내일 잘하고 와."


그 이후부터 제사, 명절에는 집에서 음식을 해갔다.

이것저것 상에 올릴 것도 미리 사 갖고 가니 박스로 3박스 정도가 나왔다.

그렇게 상을 차리면 음식 놓을 자리가 없이 가득한 상을 보면

"와~ 많구나."

아버님은 그렇게 얘기하시고, 신랑은 뭔가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18년을 했다.

그러다 신랑과 심한 다툼이 있어 명절에 가지 않았다.

그래도 걱정이 돼서 막내 동서에게 상은 이렇게 놓고, 음식은 이렇게 간단하게 라도 해야 한다 전화하니

"형님, 전 그런 거 몰라요. 아버님이 그냥 큰며느리가 알아서 하니깐 전 가만히 있으라는데요?"

그 말에 머리를 잡고 쓰러졌다.


"왜!!"

난 당연히 해야 해?


어머님이 아프셔서 병원에 계실 적에도 간병을 하고 병원에서 자는 건 아버님과 나였다.


"큰 며느리니깐 할 수 있는 거야."


묻고 싶다.

"왜? 큰며느리는 할 수 있는 겁니까?"


그래서 큰 며느리니깐 할 수 있는 걸 했다.

집에서 하는 차례, 제사를 없애고 제사는 따로 절에서 지냈다.


엄마는 내 모습을 보고 갈등을 하셨다.

"엄마 나이 80을 넘게 했으면 엄마도 아빠 조상님한테 할 만큼 했어. 엄마도 처음 하기가 어렵지 나처럼 해봐."


지금은 가족이라고 해봐야. 다섯도 많다고 할 시대다.

부모님의 시대는 6~9의 형제들과 그 배우자들 그리고 그 자식들이 가족을 이뤄 모였다 하면 대가족이 됐다.

그러니 음식도 많이 해야 하고, 사람이 모이니 북적북적하는 흥이 있었다.

그곳에서 큰 며느리의 명분은 뭐였을까...

노동은 당연시였고, 실수는 꾸지람이 되었다.

큰 며느리는 그 집안의 안 살림이라는 생각에 언제나 잘~ 해야 하는 것이였다.

큰 며느리가 손을 놓으니 아무도 할 사람이 없다.


시어머니도 큰 며느리였다. 대가족은 아니였지만, 그만큼의 무게는 있었다.

음식을 잘하시지 못하는 건 젊어서 일찍부터 직장에 나가 가장처럼 일하다 보니 집안 살림을 잘할 수가 없었다. 큰 며느리다 보니 할아버지, 할머니의 치매를 집에서 간병하셨야 했다.(그때는 요양원이 없었다.)

누가 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큰 며느리니깐 하는 거였다.

고된 몸으로 퇴근을 해도 할아버지, 할머니를 돌봐야 했던 그 고단함을 누가 알겠는가...


나도 큰 며느리라 어머니 간병을 했다.

하다 하다 병이나 드러누워버렸다.


"이제 다른 자식들도 시키셔요."


아버님께 다른 자식(아버님 자식들)도 제발 돌아가면서 하자는 말이었다.

그 스타트가 큰 아들인 남편이었다.

그날 남편은 어머니 병실에 하룻밤을 자면서 큰 가방을 싸갖고 갔다. 오락기며, 노트북이며, 간식이며.... 그 하루를 지내면서도 집에 있는 내게 계속 전화를 했다.

다음날 아버님은 어머님을 요양원으로 보낸다는 말씀을 하셨다.

"자식들 고생시켜서 뭐 하냐."

"!!!!!!??????"


그때의 서운함이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왜? 난 큰 며느리니깐....


처음 신랑감이라고 엄마한테 소개할 때 엄마는 못 마땅해하셨다.

"큰 아들이면 네가 큰 며느리가 될 텐데.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그 말이 그때는 왜?라는 물음표를 갖게 했는데 살면서, 살아보니 왜 그 말을 하셨는지 알게 됐다.

할 줄 아는 게 없으면 공부하고 배워서 알아야 했고,

병간호 또한 자연스럽게 내 차지고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 됐다.


그런 큰 며느리라는 자리를 누가 만드는 것일까?

가족이라는 굴레에 '넌 일꾼!'이라고 낙인을 찍어 꼼짝하지 못하게 하는 게 아닐까 한다.


난, 요즘 말해서 "T"다.

할 말 가슴에 담고 속앓이를 하지 않는다.

원래는 가슴에 담고, 울고 속상해하는 여자였지만 유부녀가 되면서 시간에 쫓기듯 자연스럽게 "T"가 됐다.

가만히 있으면 가니로 보니 당연히 튕겨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0여 년이 지난 세월을 살다 보니 그 잠깐의 시간이 내 세월이었고, 추억이었던 거 같다.

내가 하고자 하지 않았지만, 했으며 욕을 듣지 않았으니 내 할 일을 다 했다고 남편 앞에서 당당히 얘기한다.


중요한 건 "큰 며느리가" 중요한 게 아니다.

하고자 하는 것과,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의 문제다.

그래 "큰 며느리"자리가 있는 거 같다.


그저 하는 일에 '넌 큰 며느리라 할 수 있는 것이다.'가 아니라 '니가 노력하니 고맙다.' 그 한마디면 족할 거 같다.






 






아버님과는 아직도 소주 한잔을 같이 마신다.

그럼 또 그때 얘기를 하신다.

"그때 너 고생도 많이 했다."

"아시니 감사합니다."

"엄마하고도 대화 많이 하고, 니가 며느리가 아니라 딸이지."

"아시니 감사합니다."


알아주시니

그래도 어찌 됐던 "괜히 했어"가 아닌

"그래도 잘했지 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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