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쿠스코의 협곡>에 관하여
본 글은 감상자의 기억력과 연극에 대한 부족한 식견으로 인해, 연극 <쿠스코의 협곡>에 대한 굉장한 몰이해와 왜곡을 함유하고 있음을 미리 알립니다.
공간에 관한 인식은 서로 상이한 대상 사이의 차이와 거리에 따라 이루어진다. 평면이 입체가 되기 위해서는 평면과 평면사이 그들의 거리와 차이가 형성되는 명확한 방식과 과정에 대한 서술이 필요하다. 이미지가 그 차원을 넓혀가는 과정은 단순히 우리가 수학시간에 배웠던 것 처럼 블럭을 쌓아 나가는 중첩과 반복에 따라 평면을 특정 방향으로 연장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평면이 입체가 되기 위해서 서로 상이한 평면과의 차이를 필요로 하며, 차이가 정의내려지는 특정한 설명을 요구한다. 입체란 평면이 자기 스스로 ‘서사’를 전개해나가는 어떤 방식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종이가 종이배나 종이학 처럼 어떠한 종류의 입체적 오리가미로 변신해 나갈때, 종이접는 방식이라는 하나의 메뉴얼은 전제해야 하는 것 처럼, 공간적 확장은 시간에 기대에서, 순서에 맞추어 자기를 펼쳐나가거나 접어나가는 방식이다.
공간과 입체에 대한 위상학적 정의에 대해 골몰하며 나는 연극 <쿠스코의 협곡>의 공간적, 건축적 특성을 분석해 나가고자 한다. 어쩌면 우연이 개입되어 있을 수도 있지만, 나는 여러가지 방면에서 쿠스코의 협곡을 서사가 아닌 공간으로 인식하게 되는 장치를 볼 수 있었다. 먼저 본 연극에 선행하여 수행(?)되었던 연극 ‘웨이 투 와이키키’와 본 연극의 관계에는 오묘한 공통점과 상이성이 있었다. 먼저 두 연극 모두 특정 공간을 전제로, 특히 ‘지나치게' 구체적인 특정 장소를 강력하게 지시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왜 하와이가 아닌 와이키키인지? 왜 페루나 마추픽추가 아닌 쿠스코인지? 지명이 어떤 평면적 레퍼런스를 뚫고 강력하게 자신의 테두리를 그려나가고자 하는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장소성이 강조되는 특성은 단순히 연극적 서사에 소묘를 위한 기능적 역할 이상의 의미가 있어보였다.
두 극 모두 시간적으로 분할된 이야기들과 분할된 캐릭터들이 선율을 리드하는 것이 아니라 불협화음을 형성하면서 어떤 공통된 선율에 인식에 관객이 따라 이동하기를 지속적으로 거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캐릭터를 인식하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들이 어떤 상황에서 철저하게 다른 것으로 교체되기도 하며, 또 전혀 다른 인물로 바뀌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부드러운 동화를 읽어주는 느낌인데 또 이것들이 하나의 집합체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어떤 캐릭터들이 특정 역할을 수행하며 사라질 것 처럼 보이다가도 다른 역할과 임무로 연결지어지면서 강력한 클리셰의 밝은 면과 반대의 어두운 면을 동시에 비추면서 이중적 효과를 보여주는 듯 했다.
극 중간에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의 재즈 선율이 나오는 걸 들었다.(아닐 수도 있음) 남미의 모래 쌓인 오래된 시가지를 연상시키는 그들의 음악은 아리송하게도 페루가 아닌 쿠바의 음악이었다. 그러나 보사노바와 가까운 멜로디가 연상시키는 기억과 코드들이 가리키는 하나의 점이 어디인가 하는 질문은 소용이 없었다. 그 점의 위치는 지면상에서 단일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다시 상기시켜보면 연극 <와이키키>에서도 극의 중간에 하와이를 연상시키는 기타 음악들이 연주되었던 것 같다. 음악과 선율로 부터 쿠스코가 떠오른 것일까. 빨간 화살로 부터 쿠스코가 떠오르고 음악이 덧 붙여진 것일까 하는 재료의 기원을 추측하는 창작자로서의 버릇같은 추리를 몇 번 반복하다가, 그런 어떤 찰나의 색채들의 집합이 연극 전체의 분위기를 각각의 평면으로 연결된 다면체 처럼 연극을 구성하고 있다는 물리적인 감각을 연결지어 불 수 있었다. 빨간색 실이 달린 화살표와 주인과 종의 관계, 알파카와 같이 또 다른, 어떤 구체적인 이미지와 감각들은 연극이라는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은 다면체의 각각의 평면들을 구성하고 있었고 연극의 깊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와같은 각기의 평면들 안에 그려진 평평한 그림들 (문화적, 환상적 코드)를 인식하면서도 그것에 매몰되지 않으며 다면체의 용접면 사이에 비춰지는 코어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어야 했다. 목소리와 이야기 그리움에 관한 이야기는 평면적 문화 코드에 기대고 기대어 깊숙한 곳에 보석처럼 숨어 있었다. 그 메시지 자체로도 이야기 해볼 것들이 있는 연극이었지만, 캐릭터와 이미지 등 재료들을 다루는 방식이 명확한 목적을 갖추지 않은 고대의 유물을 축조하는 건축가의 시선 같았다.
나는 여기서 조도로브스키의 영화에 나오는 붉은 다면체를 상상했는데 그게 어떤 영화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성스러운 피나 엘토포였을 것이다. 남미적 이미지와 컬트가 조도로브스키를 연상시킨다. (물론 엄청나게 다른 스타일의 작품이지만..)
본 연극에서 일종의 반전?? 장치를 다루면서도 그것이 어떤 쥐덫과 같이 미세하게 발견되는 실을 던져주고 그걸 확 잡아 당기면 모든 것이 뒤집어지는 공격적 방식으로 다루지 않고 다면체를 구성하는 지극이 공예적으로 세공된 각기의 면 사이로 비추는 빛, 메시지에 다가갈 수 있고 협곡 사이의 틈새로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계기로서 다루고 있다. 풋새가 자기의 분할된 기억과 전언의 조각들을 맞추어 나가며 이야기를 듣고 자기가 가야하는 곳으로 걸어가듯, 본 연극도 여러가지 상이한 이미지들을 인식하고 붙여나가면서 더 깊숙한 곳으로 우리 손을 잡고 이끌어 나간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보다 그 손을 잡고 들어가는 여정에서 거닐게 되는 길목들 안에서 연극은 더 많은 말들을 들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