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영화 리뷰, 한계상황(Over the Limit)
우리는 한 배를 탄 거야
네가 날 떠나지 않으면, 나도 널 안 떠나
코치는 교사와 다르다. 교사는 여러 반을 순회하는 반면, 코치는 선수들과 한 배에 탄다. 함께 전장에 나선다. 그들은 함께 성공하고 함께 실패한다. 혹은 함께 살아남고 함께 죽는다. 그들의 시간은 교사와 학생의 시간보다 치열하며, 보다 내밀하다.
Over the Limit(한계상황), 마르가리타 마문이 2016 리우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담아낸 다큐멘터리 영화다. 또는, 반짝이는 금메달 반대편에 드리우는 어두운 그림자를 고스란히 담아낸 작품이기도 하다. 체조계 콩라인(만년 2위)을 그린 작품인 만큼 영화는 마문이 한 대회에서 2등을 차지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1등은 항상 야나쿠드럅체바) 왜 2등은 잘하고도 불행한 걸까. 이미 상처 입은 마문에게 이리나 비녜르 수석코치(우리나라로 치면 국대 감독)는 연고를 발라주지 않는다. 형체가 없는 말은, 형체가 없는 마음의 상처를 후벼 판다.
비녜르: 너 무슨 생각 했어? 17점 받을 줄 알았어?
마문: 17점 받을 줄은 몰랐어요.
비녜르: 그래?
마문: 당연하죠.
비녜르: 그럼 왜 그렇게 긴장했어?
마문: 긴장 안 했어요.
비녜르: 닥쳐, 아니긴 뭘 아니야. 똑바로 안 해? 니 오늘 경기는 아주 형편없었어. 완전히 엉망이었다고.
딱 한 경기 빼고 아주 나뭇잎처럼 바들바들 떨더라. 그나마 생긴 게 예쁘니까 점수라도 딴 거야. 뭐가 문제였는지 말해봐. 뭐가 문제야?
마문: 경기 내용을 분석해야겠어요.
비녜르: 지금 말해. 생각해봐. 연습 땐 잘 됐잖아. 근데 왜 대회에선 못 해?
2등으로 대회를 마친 후 앞으로의 목표를 묻는 기자에게 마문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이 영화의 제목은 여기서 인용했을 것이다. Over the Limit. 제목만 보면 최고 수준의 체조선수가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뛰어넘는 인간 극복의 서사를 보여줄 것 같지만, 우리는 70분 내내 한계를 뛰어넘는 대가에 대해서 보게 된다. 그리고 결국 한계를 뛰어넘은 것인지도 모르겠고, 꼭 뛰어넘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는 상태로 카메라는 꺼진다. (물론 마문의 체조 장면을 보면 도저히 인간의 동작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놀랍고도 아름답지만, 그런 거라면 올림픽 자료화면을 통해 훨씬 더 잘 느낄 수 있다. 유튭에서 봐라.)
너는 인간이 아니라 운동선수야
영화 기준으로 올림픽 전 마지막 대회에서 마문은 코치에게 소심하게 말대꾸한다.
아미나: 왜 화가 났어?
마문: 저도 인간이니까요.
아미나: 넌 인간이 아니야. 운동선수지. 그런 건 너한테 해당 안 되는 얘기야.
인간이 갖추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자질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장 이상적인 모습은 “인간적인 것”일 테다. 그래서 인간에게 가장 모욕적인 비방은 “인간도 아니”라는 말이다. 대본이 있는 각본 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그러니까 실제 상황에서, “넌 인간이 아니야”라는 말이 어쩌면 이렇게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일까. 심지어 비방의 맥락에서 나온 말도 아니다. 그저 잘못된 정보에 대한 사실을 되새기는 듯한 건조한 음성 앞에, 잠시나마 인간이 돼보려 반항했던 인어공주는 목소리를 잃었는지 대꾸하지 못한다. 운동선수는 과연 인간일 수 없는 것일까?
이 영화는 한 번 난 상처를 결코 가만 두는 법이 없다. 물론 연출이 아니지만. 인간이 아니라는 최악의 비방을 놀라운 방법으로 뛰어넘어 다시 한번 들쑤신다. 역시 수석코치(비녜르)는 다르다.
비극을 표현해! 비극을 표현하라고!
아까는 사랑을 표현했으니 이젠 슬픔을 표현해봐
아버지를 생각해. 전부 표현해!
신께 기도를 올려! 알겠어?
이 대회 전에 마문의 아버지는 암 투병을 시작한다. 비녜르는 역시 최고의 코치답게(?) 극도의 아픔까지 기량 향상의 도구로 활용한다. 그는 인간이 아닌 운동선수를 만들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일까. 아이러니한 건지 원래 그런 것인지, 마문은 좋은 경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 다큐영화의 감독인 마르타 프루스는 이 경기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간신히 울음을 참는 마문에게 비녜르가 잘했다는 칭찬인지 선언인지 하는 장면만을 남겨둔다. Over the Limit이라는 제목을 달아놓고 왜 한계를 넘는 경기 장면을 보여주지 않은 것일까. 역시 그녀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한계를 넘는 '대가’인 것인가.
운동선수는 인간일 수 없고, 스포츠는 정말 인간성의 반대편에 있는 것일까?
스포츠의 기원이 그리스의 종교 행사일수도, 외교수단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의 발생과 발전이 인간 내면의 유희적 본성에 있다는 것에는 딱히 토를 달기 어렵다. 스포츠는 일종의 가상현실이다. 인간은 이성을 지녀서 즐거운 활동이라도 인간에게 고통을 준다면 금기하지만(인권). 인간은 스스로 금기한 활동에서 쾌락의 욕구를 느끼는 모순적 존재다. 인간의 욕구는 일종의 에너지라서 형태가 변할지언정 절대 보존되기 때문에, 억제될 게 아니라 건강하게 해소되어야 한다. 건강하게 해소해야 다시 건강한 욕구가 된다. 그래서 놀이, 게임, 스포츠라는 가상의 공간이 필요하다.
사람을 때리면 범죄고, 전쟁은 인류의 해악이지만, 사람을 때리는 권투를 우리는 소리 지르면서 관람하고, 흡사 전쟁인 축구에 미친 듯이 열광한다. 재밌으니까. 그래, 스포츠는 재밌어서 존재한다. 안전을 보장한 채 놀고 싶은 본성적 욕구를 마음껏 표출하려고 만든 세상이 스포츠다. 놀고 싶은 인간의 가장 인간다운 활동이다. 그런데 러시아 체조선수는 인간이 아니란다. 인간이면 안 된단다. 스포츠가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네가 실수하면 우리까지 다 망하는 거야
늘 마문의 곁에 있는 이미나 코치가 한 번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실수하면 우리까지 다 망하는 거야. 여기 이 코치도, 나도, 비녜르 코치님도 모두 다” 이곳에서 스포츠는 더 이상 가상의 전쟁터가 아니다. 생존이 걸린 진짜 전쟁터다. 마문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하면 마문뿐만 아니라 모두가 망한다. 모두가 죽는다. 실제 전쟁이라면, 목숨이 달렸다면, 그러면 말이 된다. 전쟁터에서 살아남으려면 병사의 인권이고 뭐고 장군은 부대의 군기를 유지시켜야 한다. 폭풍을 만난 배에서 살아남으려면 선장은 인권이고 뭐고 일단 선원 각자의 역할을 완벽히 수행하도록 명령해야 한다. 스포츠는 왜 현실 전쟁터가 되었을까?
사실 운동선수는 인간이 아니라는 표현이 한국사람에겐 다소 익숙하다. 우리나라 체육계 비판의 언어 중 단연 대표되는 것이 “메달 따는 기계”니까. 마문의 이야기가 우리에겐 남 일 같지 않다. 오히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는 씁쓸한 안도마저 든다. 스포츠가 국가주의(nationalism)에 오용되면 더 이상 가상이 아니라 현실 전쟁터가 된다. 2014년 러시아에 도핑 스캔들이 터지면서, 국가대표 선수단 30%가 2016 리우 올림픽에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국가 차원에서 범죄를 저질러가며 금메달에 매달렸다. 스캔들 이후에 러시아의 국가주의가 갑자기 사그라들었을까? 그럴 리가. 다행히 출전하게 된 리듬체조 국가대표 마문과 쿠드럅체바는 더 무거워진 국가적 사명을 짊어지게 되었다. 영화 초반 쿠드럅체바의 인터뷰처럼 그들은 러시아를 위해 경기할 뿐이다.
다행인지 뭔지, 리우 올림픽에서 마문은 금메달(쿠드럅체바는 은메달)을 차지한다. 시상대에서 웃고 있는 마문의 모습을 영화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과 함께 보여준다. 러시아로 귀국한 지 이틀 후 마문의 아버지는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마문은 은퇴를 결심한다. 마문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금메달은 비로소 마문을 인간답게 해 주었을까? 이전에 상처는 모두 없었던 일이 되었을까?
신형철이 최근 칼럼에서 논쟁 변질에 대해 이런 글을 썼다.
가까운 이와 논쟁하다 보면, 별 확신 없이 택한 내 입장을 상대방이 지지하지 않을 때, 상대를 이기는 게 목적이 되기 시작하면서 내 입장도 걷잡을 수 없이 강화되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깨닫는 것이다. 나의 '옳음'보다 너의 '있음'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네가 없는 나의 옳음이 무슨 소용인가 싶을 때, 우리는 문득 얼마나 유연해지는가.
(2020.11.30.<신형철의 뉘앙스: 극지에서만 서식하는 괴물처럼>)
스포츠에서 단순히 상대방을 이기는 게 목적이 되기 시작하면, 너의 ‘메달’이 너의 ‘있음’보다 소중하게 된다. 현대 인권의 개념이 두 번의 세계대전에 대한 성찰을 기반으로 발전했다는 관점에서, 인류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치르고 나치가 인류 1천1백만 명을 무참히 학살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의 ‘우월’보다 너의 ‘있음’이 소중하다는 것을. 우리의 스포츠는 어디까지 가서야 정신을 차리고 깨달을 것인가. 너의 ‘메달’보다 너의 ‘있음’이 소중하다는 것을. 네가 없는 너의 메달이 무슨 소용인가를.
다큐멘터리 거장인 마르타 프루스의 Over The Limit은 세계 최고 권위의 다큐멘터리 영화제인 Amsterdam International Documentary Film Festival에서 노미네이트 될 만큼 국제적으로 주목받은 작품이다. 다큐멘터리 영화는 각본이 정해져 있지도 않고, 감독이 세계관을 만들지도 않는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하나도 알지 못하면서 펼쳐지는 장면을 그저 있는 그대로 담는다. 프루스는 만년 2위였던 마문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차지하고,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실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녀는 어떻게 각본 없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영화를 찍었을까.
판타지를 만들어내는 상업영화의 시대에 돈도 안되면서 묵묵히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우리가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 외면하고 있는 이웃의 삶을 기록하고 보여준다. 잘못한 게 없는데 시설에 갇힌 장애인의 삶. 장애인 학교 설립에 반대하는 이웃 주민들 앞에서 무릎 꿇는 아버지의 삶, 아무래도 아침에 준 용돈 3만 원이 부족한 것 같아 학교에 찾아갔더니 되려 2만 원을 돌려주던 아들을 차가운 바닷속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죽은 주검으로 만난 어머니의 삶. 우리 곁엔 여전히 꾸역꾸역 살아내는 연약한 삶들이 있다. (홍은전의 <그냥 사람>에 잘 소개되어 있다)
“그리워를 영어로 말하면 ‘I miss you’. 내 존재에서 당신이 빠져 있다, 그래서 나는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런 의미라고 어디에선가 보았다”는 홍은전의 글을 본 적이 있다(홍은전의 <그냥, 사람>). 내 삶도 버거워서 애써 모르고 싶지만, 우리 곁에 엄연히 존재하는 연약한 삶을 빠뜨린 나의 존재는 충분할 수 있을까.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은 내가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충분히 인간 다운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내가 잘 모르고, 혹은 의도적으로 빼먹은 연약한 삶들을 알려준다. 외면할 텐가, 충분한 존재가 될 텐가.
다시, 코치는 교사와 다르다. 코치는 선수들과 한 배에 타고 함께 전장에 나선다. 함께 죽고 함께 산다. 그래서 선수를 인간 취급하지 않고, 스스로도 인간이기를 포기한다. 살아야 하니까.
도대체 누가 스포츠를 전쟁터로 만든 것일까? 스포츠는 놀이터다. 유희적 욕구를 건강하게 해소하고 다시 건강한 욕구를 만들어내는 놀이터. 그 과정에서 타인과 세상을 인식하며 나의 존재 가능성을 실현하고 확장하는(Sport Literacy) 배움의 장. 스포츠는 본래 그런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