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세상의 파괴자, 죽음의 신이 되었도다.”

무슨 뜻일까?

by libcorgi
화면 캡처 2023-08-27 182458.png 게임 '시드 마이어의 문명5' 인게임

게임 문명5 핵분열 연구시 나오는 문구로 글을 시작하려 한다.

"나는 이제 세상의 파괴자, 죽음의 신이 되었도다.“


인류가 스스로를 파괴할 수 있는 무기를 손에 넣었을 때, 그것을 지켜보던 오펜하이머가 인용했던 문장은 너무나 유명하다. 아마 이 문구가 나온 '바가바드 기타'는 몰랐어도, 이 구절은 알고 있을 사람들도 많을 것 같다.

원자폭탄 개발의 총책임자가 했던 말이기에, 우리는 쉽게 이 말을 핵무기의 파괴력을 나타내는 말로 이해하곤 한다. 아니면 혹은 한 과학자의 높은 에고로 이해하던가. 하지만 사실 바가바드 기타의 맥락은 훨씬 더 복잡하다.


meta-v3-ko_KR.jpg 영화 오펜하이머 공식 포스터


오펜하이머 영화에서는 이 문구가 정사 씬에서 인용되며 일종의 인간이 가진 자기파괴적 욕구를 은유하는 장치로 쓰인다 한다. 이에 인도에서는 오펜하이머가 ‘반(反) 힌두교’적 영화로 반대 시위가 열리고 있다는 뉴스도 보았다.


그렇다면 이 문구는 원래 무슨 뜻일까? 그리고 왜 오펜하이머는 이를 인용했을까?

원전 바가바드 기타의 주된 내용은 단순하다.
피 비린내 나는 왕위쟁탈전이 벌어지고 나라와 친족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 전쟁에 나서게 된다. 바가바드 기타의 주인공인 왕자 아르쥬나는 이러한 골육상쟁에 참가하게 된다. 위대한 모험가이자 용감한 전사인 아르주나에게도 피 비린내 나는 내전은 너무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때, 아르쥬나는 양대 진영의 아버지들과 할아버지들과 스승들과 아저씨들과 형제들, 아들들, 손자들, 친한 친구들과 그 밖에도 낯익은 수많은 얼굴들을 보았습니다. (중략)
“내 사지는 맥이 풀리고, 입은 타 마르고, 머리카락은 쭈빗쭈빗하게 서며, 몸서리가 쳐집니다. 활은 내 손에서 떨어지고, 내 살갗은 화끈거리고, 마음은 비틀거려 몸을 제대로 버티고 설 수가 없습니다.
아,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친족과 싸움하여 서로 죽이고 어떻게 좋은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크리슈나여, 나는 승리도 왕국도 쾌락도 다 원치 않습니다. 왕국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 나의 목자, 크리슈나여, 제 친족을 죽이고 우리가 어떻게 인생의 즐거움과 권력과 편안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현대 전쟁을 겪은 군인의 PTSD를 연상시키는 말이다. 아르쥬나는 전쟁 전에 자신의 마부인 크리슈나에게 이렇게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는다. 왕위가 자신의 스승과 친척, 친구들을 죽일만큼 가치가 있을가. 그의 절규는 마치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숙부를 보며 ‘죽느냐 사느냐’를 말했던 햄릿을 연상 시킨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 햄릿은 혼자 광기에 사로잡혀 독백을 했다면, 아르쥬나에게의 대화 상대가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대화 상대는 지금도 인도에서 주요한 신으로 섬김 받는 크리슈나이다. 크리슈나는 당시 인간의 형상으로서 아르쥬나의 마차를 조종하는 마부였다. 따라서 이에 크리슈나가 대답한다.


"그대의 지금 할 일은 오직 행동하는 것이지, 결코 그 행동의 결과에 대한 생각이 아니다. 오, 아르쥬나야, 행동의 결과에 대한 집착은 없이 행동하라. 그러나 또 행동 아니함에도 집착하지 마라.
오, 부의 정복자, 아르쥬냐여, 언제나 요가 안에서 살지어다. 그리하여 모든 집착으로 벗어나 성공과 실패를 하나로 보는 평등한 마음으로 행동하라. 모든 것을 하나로 보는 마음을 일러 요가라고 하느니라."
51Pj2N72-yL.jpg 바가바드 기타 영역본 표지

갑자기 크리슈나 신은 요가에 대한 설명을 들려준다. 그에 따르면 요가란 행동이다. 인간의 삶은 곧 행동하는 것이다. 그 행동이 불러올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행위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크리슈나가 말하는 요가의 삶이다.

쿵푸는 한자어로 공부(功夫)라고 한다. 우리가 말하는 공부(工夫)와 한자가 조금 다르지만 뜻 차이는 없다. 따라서 무협지에서 스승의 원수를 갚기 위해 무술을 수련하는 것도 쿵푸이고,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쿵푸이며, 커리어를 위해 회사에 다니는 것도 쿵푸이다.


요가 역시 비슷한 점이 있다. 우리는 어떤 특정 스트레칭 동작을 요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더 넓은 맥락에서는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가 요가이다. 먹고 마시고 자고, 혹은 아르쥬나처럼 전쟁에 나가서 자신의 친족을 죽이는 것도 모두 요가이다.

크리슈나는 이러한 요가가 인간의 삶이며, 그러한 요가를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지 설명한다. 위의 인용문 다음 바로 이어지는 말이다.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라.
행동은 행동 아니함보다 낫다. 그리고 행함 없이는 네 육신을 지탱조차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오, 아르쥬나야, 이 세상의 모든 행동은 욕망의 굴레에 얽매어 있다. 그러므로 너는 그 욕망을 초월하여 행동하라. 그것이야말로 참 행동이니라.“

크리슈나는 말한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행동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행동의 결과에 집착하면서 생겨나는 고통이다.

예를 들어 대입을 준비하는 고등학생을 생각해보자. 이 고등학생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사실 공부 그 자체가 아니다. 공부를 하는 목적이 그를 고통스럽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학에 가고 싶단 욕망과 실패할거라는 두려움을 필연적으로 가져오기 때문이다.


"타고난 자기의 성품에 빠져 있는 사람은 그 성품의 작용에 얽매여 집착함에 빠진다. 그러나 초월적 바탕을 지닌 사람은 각 바탕 속에 빠져있는 어리석은 사람을 흔들어 주지 않는다.
이 무지한 의식을 아트만에 의해 사라지게 하라.
모든 행동의 결과를 나에게 맡기고, 마음 없이(無心), 나 없이(無我) 일어나라. 그리하여 나아가 싸워라."


슬픔도 기쁨도 없이 행동하라.

전사인 아르쥬나에게 전하는 크리슈나의 말이 꼭 수행자에게 이야기 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행위를 하면서 그 결과 때문에 번민한다.
예를 들어 전사인 아르쥬나는 나가서 싸우면서 아마 상대를 이겼다는 희열감도, 혹은 친족을 살해한다는 죄책감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크리슈나는 그 어떠한 마음에도 휘말리지 않고 행위하라고 주문한다. 오직 싸움 그 자체를 목적으로 행동하길 말한다. 우리는 그 결과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오직 신의 영역이길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아르쥬나는 크리슈나에게 우주적 모습을 제발 드러내달라 애원하게 된다,


"오, 크리슈나시여, 나는 당신으로부터 모든 존재의 생과 사에 대하여, 그리고 또 당신의 영원한 영광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오, 지고의 신이시여, 당신께서 당신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은, 오, 그것은 진실입니다.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오, 성스러운 분이시여, 나는 당신의 우주적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오 나의 신이시여! 오, 모든 신비스러운 힘의 주인이시여!
만약 제가 당신의 그 우주적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오, 저에게 부디 우주 그 자체로서의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시옵소서."

크리슈나의 설득을 듣고 아르쥬나는 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달라고 부탁할까?

현재 인간 마부의 모습으로 자신의 곁에 있는 크리슈나가 아닌, 신성(神性)을 가진 크리슈나를 자신의 눈으로 보고 싶다고 말할까?

한낱 인간인 크리슈나에게는 결과에 대한 집착. 자기 행동이 갖는 도덕적 딜레마. 이 모두를 버릴 방안을 찾지 못 했다. 그에 대한 가르침을 들었지만 정작 행동에는 나서지 못 한다.

그렇기에 크리슈나의 진짜 모습을 눈으로 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관장하는 우주적 모습을 통해서 자신이 겪는 고통과 집착과 딜레마가 덧없다는 것을 느끼고 싶어한다.

이에 크리슈나는 선뜻 자신의 우주적 모습을 아르쥬나에게 드러낸다.


수없이 많은 입들과 무수한 눈들을 가지고, 가지가지의 기이한 얼굴로, 모든 종류의 거룩한 장식을 하고, 수많은 천상의 무기를 높이 들고, 천상의 꽃줄 옷을 입고, 천상의 향수를 바르시고, 눈부시게 모든 방향을 보시는 낯으로 그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일천개의 태양이 하늘에 떠올라 그 빛을 단번에 쏟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워히 거룩한 분의 몸을 나타내는 영광입니다.
그때, 판두의 아들 아르쥬나는 수많은 종류로 갈라져 있는 온 세계가 신 중의 신이신 그의 한 몸 속에 하나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초자연적인 모습에 아르쥬나는 압도된다.

이에 크리슈나가 이 글의 그 유명한 문구를 뱉는다.


그러자 슈리바가반 크리슈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완벽한 힘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시간이다.
이 시간을 가지고 나는 모든 것들을 파멸시킨다. 이제 그 때가 다 되었으니 나는 이 모습 사람들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여기에 왔다. 네가 만약 싸우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 모든 군사들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일어나라! 그리고 너의 대적을 정복하고, 이 왕국을 번영 시켜라.
그리하여 네 영광을 얻으라. 그들은 이미 나에 의하여 죽기로 결정되어져 있다. 오, 왼손잡이여. 너는 그저 이 싸움터에 하나의 도구에 불과할 뿐이니라."


크리슈나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아르쥬나에게 자신이 그저 신의 도구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역사와 시간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 자신의 하찮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 트리니티의 성공 이후 이 구절을 떠올렸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현대의 아르쥬나인 오펜하이머에게 크리슈나는 원자폭탄의 형태로 자신의 우주적 모습을 드러냈다. 인류가 만든 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 무기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알게 되었다.

다시, 바가바드 기타의 주장으로 돌아가자. 자기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는 것은 고통을 낳을 뿐이다. 시간과 역사 앞에서 우리는 모두 덧없다. 결국 우리 인생의 하나의 도구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망치는 못질의 의미를 상상할 필요가 없다. 그저 망치는 망치질을 위해 사용될 뿐이고 그것으로 족하다.

핵실험에 성공하고 오펜하이머가 인용한 바가바드 기타는 마지막 장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가 끝난다.

"오, 프리타 부인의 아들, 아르쥬나야, 너에게 말한 나의 이 모든 말씀을, 너는 잘 들었는가? 오, 부의 정복자, 아르쥬나야, 이제 너의 미혹함은 사라졌는가?"
아르쥬나가 말하길
"오 아츄타 크리슈나시여, 당신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나의 미혹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제 마음은 의심 없이 굳게 서 있습니다.
저는 이제 당신의 말씀에 따라 행동을 할 것입니다."


햄릿은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했고, 아르쥬나는 전쟁에 나가야 하는지 고민했고, 오팬하이머는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것이 옳은지 고민했다.

이에 크리슈나는 이에 고민은 내려놓고 행동할 것을 이야기한다. 그 모든 결과는 신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래된 인도 철학이 옳은지 혹은 자기 합리화에 불과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 문장이 과학자이자 맨해튼 계획 총책임자였던 오팬하이머에게는 위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 그럼에도 영화 오펜하이머에 나오는 것처럼 오펜하이머는 고민을 내려놓지 못 했다. 끝까지 원자폭탄 개발이라는 원죄에 대해 불편함을 느꼈다. 전쟁 이후에도 자신의 손에 피가 묻혀져 있다고 느낀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도 결국 아르쥬나가 되지는 못 했다. 혹은 원자폭탄도 크리슈나 신이 되지는 못 했던가.


++) 인터넷에서 흔히 진짜 천재라고 부르는 폰 노이만은 같이 원자폭탄을 개발하면서도 ‘과학자로서 도덕적 딜레마’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으로 바가바드 기타스러운 삶은 살았던 사람일 수도 있다.
영화에서도 나오는 리처드 파이만은 당시 젊은 과학자였다. 그래서 맨해튼 프로젝트 초기에 원자폭탄 개발에 대해 남들과 마찬가지로 역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던 도중, 폰 노이만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그 이후 그는 폰 노이만에게 설득되어 근심을 잊고 젬베를 치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 그럼에도 영화로 나온 것은 폰 노이만이 아닌 오펜하이머라는 점은 생각해 볼만 하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오펜하이머의 고민을 반복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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