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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한균 Aug 02. 2024

4. 지정학에 대하여 (코린토스)

한 번뿐인 그리스 신혼여행기

1. 그리스 자동차 여행

우리는 렌트한 자동차를 여행 기간 내내 장난삼아 “스즈키 상”이라고 불렀다. 차종이 Suzuki Vitara였기 때문이다. 소형 SUV. 그리스 역시 여느 유럽 나라처럼 일제 차가 강세였다. 에게해 섬 투어를 끝마치고 그리스 본토로 들어오는 아테네 공항에서 픽업했다. 스즈키 상은 여행 기간 내내 고생을 많이 한 친구였다. 짐을 잔뜩 싣고 수백km를 달렸다. 마지막으로 반납할 즈음에는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외국에서 운전은 난생처음이었다.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국제면허증을 발급받을 때만 해도 언젠가는 이 면허증이 필요할 날이 있을까 싶었는데. 운전은 그래도 자신하는 편이었지만 워낙 겁이 많은 게 문제였다. 낯선 나라에서 처음 타는 차로 도로를 주행하니, 긴장되어 핸들만 꽉 붙잡고 있었다. 여행 초반에는 아내가 무엇을 물어도 대답조차 못 하고 전방주시만 했다.   

그래도 곧 익숙해지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스의 도로는 뻥 뚫려있었다. 워낙 차가 많지 않았다. 서울에서 복닥복닥한 도로에서만 있다 보니, 그리스에서는 곧 운전이 신이 났다. 바다를 한쪽에 끼고 고속도로를, 골짜기 사이사이로 시골길을 달렸다.   

“어, 저기 거북이다.”   

아내의 말에 쳐다보니 웬 작은 바위만 한 육지 거북이가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그리스 도로는 자연에 가까이 있어 정말 온갖 동물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개, 소, 말, 양. 그런데 거북이는 정말 그들 중에도 압권이었다.   

서른 살이 되어도 신기한 광경을 결국 못 참았다. 잠시 차를 길가에 세워서 구경했다. 생각해보니 그리스는 이솝 우화의 땅이기도 하다. 저런 육지 거북이가 도끼와 달리기 경주를 했다던 그 거북이 종류일까? 그런 생각을 하던 사이, 거북이는 우리는 신경도 쓰지 않고 엉금엉금- 기 숲으로 사라졌다.   

아테네에서 출발해 메가라를 지나 코린토스 운하를 왼쪽에 끼고 한 두 시간 만에 숙소가 있는 루트라키(Λουτράκι)에 도착했다. 그 아름다움에 우와- 하고 탄성이 터졌다. 루트라키는 한국에서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도 코린토스로 가는 길에 우연히 숙소를 구한 것이었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그 아름다움으로 꽤 이름값이 있는 도시라고 한다. 이런 기대치 않은 횡재가 여행의 재미일지도 모른다.


코린토스해, 루트라키, 코린토스 @촬영


어느 그리스인이 루트라키에 대해 설명해주는 것을 엿들었다. 루트라(Λουτρά)는 물, 키(κι)는 장소를 뜻하는 접미사다. 합치면 물의 도시라는 뜻이다. 정확히는 물 중에서도 온천수를 의미한다. 온천이 있는 해안 마을이다 보니 역사가 오래된 휴양지다. 과거 스파르타인들이 전쟁에서 부상하거나, 늙으면 그 몸을 회복하기 위해 찾아왔다는 전설이 있다.   

외곽에 위치한 숙소 덕분에 오직 우리만의 해변을 소유할 수 있었다. 방에서 가운을 입고, 엘리베이터를 타 바로 내려가면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바닷가에는 자갈이 부서지는 해변에 누울 수 있는 비치 벤치들도 놓여 있었다. 그저 구경만 할 수는 없었다. 발이라도 담그니 물이 너무 맑아 바닷물고기들이 지나가는 것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마침 회사생활에 걱정이 있어 퇴사를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여행 중 잠자기 전 호텔 방에서 늘 작은 노트에 일기를 썼다. 이날 내가 쓴 일기는 다음과 같다.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무엇을 보장할까? 나는 적어도 이 광경을 보면서 걱정이 해소되는 것을 느낀다. 발코니에 앉아서 일기를 쓰면서 그 감정을 되씹고 있다. 이 감정은 앞으로도 살아가는데에 힘이 되어줄 것 같다.
너무 오랫동안 질문을 던져야 할 시간에 결혼이라는 눈앞의 일로 핑계를 댔는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 당장 결혼해서 돈이 한 푼도 없고, 내 아내와 처음부터 시작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늘 무언가 방법이 있을 거라 믿는다.’


2. 지정학

신혼 기간 내내 읽은 책이 하나 있었다. 이병한의 ‘유라시아 견문’이다. 솔직하게 말해 신혼여행에 어울리는 적당히 사랑스러운 책은 아니었다. 저자가 유라시아를 여행하면서 국제정세와 역사를 논평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 <한 번뿐인 그리스 신혼여행기>를 쓰고자 하는 마음에 불을 붙인 책이기도 하다.   

책을 보다 보면, 이걸 여행기로 보아야 하는지 역사책으로 보아야 하는지 의문도 든다. 저자가 말하길 과거 조상들의 견문록을 그 벤치마크로 삼았다고 한다. 하긴, 생각해보면 연암의 열하일기도 읽어보면 현대적인 의미의 여행기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보다 자신의 여정을 글감으로 삼아서 하고자 하는 말을 하는 방식을 취한다. 나도 이 <한 번뿐인 그리스 신혼여행기>를 그런 방식으로 구성해야지 생각했다.   

사실 논란이 많은 책이다. 인터넷 신문사에서 연재된 글을 모았다. 인터넷 신문사에서 연재될 당시부터 악평(惡評)이 많았다.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특정 독재 국가들에 우호적인 것이 문제였다. 물론 정치적인 글이라는 게 늘 반대를 불러올 수밖에 없긴 하다. 나 역시 동의하지 못하는 지점이 많았다. 하지만 한국에서 소수의 목소리라는 것은 귀하기에 이런 생각도 있을 수 있구나 하면서 읽었다.


역사를 바라보는 두 가지 상반된 시선이 있다. 하나는 역사는 이미 과거에 불과하다는 견해다. 이미 과학기술을 통해 하부구조가 완전히 달라진 우리는 옛것에서 배울 것이 없다. 반면 다른 견해도 있다. 우리가 아직 인간인 이상 조상들과 그리 다를 게 없다는 의견이다. 그렇다면 우린 조상들과 같은 성공 혹은 실수를 반복할 수 있고 역사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지정학은 후자의 견해를 지지한다. 인간이 땅 위에 사는 이상, 역사의 패턴이 있다고 본다. 그 전범(典範)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여행 중 도로 위에서 지나쳤던 메가라와 지금 내 여행의 목적지였던 코린토스가 2400년 전 분쟁을 벌였다. 이 분쟁에 당시 최강국이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개입하면서 전 그리스로 확전된다. 투키디데스는 이 전쟁의 진짜 원인을 아테네의 급부상에 대한 스파르타의 두려움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지정학은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전쟁을 벌인 이유는 육지 세력과 해양 세력의 대립 구도 때문이라 분석한다. 육지 세력과 해양 세력의 대립은 인간이 반도 지형에 사는 이상 보이게 되는 행동 패턴이다. 그 지형이 작든 크든 작은 도시국가이든 거대한 현대 최강대국이든 차이가 없다.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통제권을 차지하기 때문에 서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지정학은 간접적이나마 암시한다. 육지 세력의 목표는 반도를 통일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층적이고 위계적이다. 또 균형 있게 말하자면 연결하여 혼합하고자 한다. 육지 세력은 그런 의미에서 용광로(Melting Pot)다. 반면 해양 세력은 좀 더 수평적인 집단인데다 바다를 통해 반도 어디든 접근하고자 한다. 따라서 육지 세력의 목표를 반드시 저지해야만 한다. 해양 세력의 전략은 그렇기에 분할하고 통치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해양 세력의 세계는 샐러드 그릇(Salad Bowl)에 가깝다.   

이제 그리스 지도가 아니라 세계지도를 보자. 우리의 지구는 멀리서 보면 하나의 반도처럼 보인다. 북극에서 뻗어 나온 거대한 대륙(유라시아)을 크고 작은 섬들이 감싸고 있는 모양새다. 이에 지정학은 우리가 고대 그리스인들과 다를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 크기가 어떻든 반도에 살아가는 이상, 해양 세력과 육지 세력의 충돌은 역사의 패턴이다.   

19세기에는 대영 제국이 아테네(해양 세력), 러시아가 스파르타(육지 세력)였다. 20세기에는 그 역할을 미국과 소련이 이어받았다. 21세기 초입인 지금 보기에는 중국이 새로운 육지 세력으로 대두된다.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의 급부상에 대한 스파르타의 두려움을 이야기했지만, 지금 서점에 가보면 중국의 급부상을 염려하는 책들이 가득하다.    

‘유라시아 견문’의 저자는 한국에서 흔치 않게도 육지 세력의 논리를 사용한다.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유라시아를 여행하면서 그는 점차 유라시아 대륙이 하나가 되어가는 모습을 그린다. 그리고 그 잡종적이고 혼합적인 세계야말로 우리 지구촌의 미래가 아닌지 되묻는다. 나는 마틴 자크의 책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을 떠올리기도 했다.   

고대 코린토스 유적을 둘러본 뒤, 차를 타고 ‘아크로코린토스’를 올랐다. 아클로폴리스는 고대 그리스 폴리스들이 신께 제사를 지내는 곳이자 유사시 요새로 사용할 수 있는 언덕이다. 아테네에 있는 아크로폴리스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아크로코린토스’도 그러한 아크로폴리스 중 하나다. 그리스 로마신화에서는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벌을 받은 시시포스 전설로 유명하다.

고대 코린토스 유적과 아크로코린토스 언덕 @촬영


산 위에 올라 보니 시야를 가리는 것 없이 대지(大地)가 펼쳐져 있었다. 유럽에서 온 기사단과 오스만 제국군이 차례로 지배한 성벽이 감싸고 있었다. 코린토스 만(灣)은 대륙에 붙어있는 중부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나눈다. 여행 중에도 한쪽 해안에 반대편 해안이 한눈에 담길 정도로 폭이 좁았다. 잔잔한 이 바다를 사이에 두고 우리가 익히 아는 고대 그리스 도시들이 세워졌다. 이 중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도시가 만의 어원이 되는 코린토스였다.   

나는 작은 반도인 한반도 절반 남쪽에서 평생을 살아왔다. 신혼여행 삼아 외국을 나와보니 세계의 모습을 다시금 조망하게 된다. 그리스는 EU 가입국이니 온갖 유럽인들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한국인이 거의 방문하지 않는 어느 시골 마을에도 화교(華僑) 음식점이 있는 건 인상 깊었다. 세상은 빠르게 작아지고 혼합되고 있었다.   

서른 살 결혼할 때까지의 삶과 이후의 삶은 다를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달라질 세계 역시 내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 같다. 근대 조선인들의 글을 읽어보면 그들의 세계가 얼마나 열려있었는지 가끔 놀라게 된다. 필요한 글이 있다면 블라디보스토크로 기차를 타고 구해왔고, 바다를 건너 다른 이들과 친교를 쌓았다. 어쩌면 그런 세상이 다시 올지도 모른다. 그런 세상에 나는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지 반성해본다.


3. 사도 바울의 교회

고대 코린토스 유적에서 서양인들이 유독 많이 몰리는 장소가 있었다. 로마식 연단(Bema)이었다. 옛 로마 포럼이 있던 자리라 허허벌판에, 고대 코린토스 유적지의 대표인 아폴로 신전과도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자세히 가서 설명문을 읽어보니 사람들이 복닥복닥한 이유를 알겠다. 사도 바울이 포교를 하고 재판을 받았던 자리라고 한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가 시작되던 초창기의 인물이고, 지금도 신약성경 대부분이 그가 다른 교회 동료들에게 보낸 편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출신으로 따라서 모국어도 유대인들의 아람어가 아닌 그리스어였다. 그렇기에 회심을 한 이후, 전교 여행을 시작했을 때 방문한 지역들이 모두 그리스 커뮤니티였다. 기독교는 사도 바울과 그리스를 통해서 유대 일부가 아니라 세계의 종교가 될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바울이 재판받은 자리, 감명받는 이들이 다 서양인인 것은 아니었다. 어느 교회에서 오셨는지 단체로 성지순례를 온 한국인 관광객 팀이 있었다. 우리를 보더니 아는 체하신다.   

“아유, 신혼여행이에요? 이거 보려고 여기까지 왔어요?”   

묘하게 대견한 눈빛이시다. 이분들이 보기에는 신혼여행을 성지순례로 온 부부처럼 보일 것이다. 괜한 오해지만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분들은 한국에 돌아가면 신심이 깊었던 어느 신혼부부 얘기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굳이 해명할 필요는 없었다.   

일정의 마지막 코린토스 신시가지로 향했다. 현재 코린토스 도시의 상징은 천마(天馬) 페가수스다. 다시금 느끼지만, 그리스인들은 고대 문화와 자신들을 연관시키는 것을 즐긴다. 하지만 우리 부부가 이 도시를 방문한 이유는 고대 그리스 신화 때문이 아니었다. 코린토스 정교회 주교좌성당에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방문해보니 최근에 새로 멋지게 지은 성당이었다. 안까지 구경해보니 정교회 특유의 성화(聖畫) 이콘(εἰκών)이 눈을 돌아가게 했다. 천장부터 벽면까지 예수와 그 제자, 복음사가들, 그리고 지역의 성인들까지 묘사해두었다. 우리가 흔히 익숙한 서방 가톨릭교회는 조각을 통해서 신앙을 표현한다면, 동방정교회는 그림을 통해서 신앙을 표현한다.   

하지만 이러한 종교화들도 이 성당에 방문한 이유는 아니었다. 성당 대문 앞에 돌로 된 명부 하나 때문이었다. 제목은 다음과 같다. “코린토스 주교직의 사도 계승” 그 아래 코린토스 성당 주교들의 모든 이름과 기간이 쓰여있었다. 지금은 89대째 디오니시오스라는 분께서 2006년부터 보위하고 있다고 한다. 시선을 가장 왼쪽 위로 올려 1대를 찾는다.

코린토스 주교직의 사도 계승 @촬영
1 아포스톨로스 파블로스 (απόστολος Παύλος : 사도 바울)   

코린토스는 그 지리적 중요성에 의해서 수많은 국가가 점령했었다. 로마, 비잔틴, 라틴 제국, 모레아 제후국, 오스만 튀르크, 현대 그리스까지, 하지만 그 여러 나라가 명멸(明滅)하는 사이 사도 바울의 교회는 지금까지 이어져 89대에 이르렀다. 어쩌면 역사를 뛰어넘어 진정 오래 가는 것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교회 구경을 끝마치고 다시 운전을 시작했다. 자동차 여행이 낭만적이지만 쉽지만은 않은 건 내가 결국 직접 운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럴 때면 차라리 구경을 마치면 관광버스에서 쉴 수 있는 패키지여행이 생각나기도 했다. 운전은 거칠었다. 고속도로를 벗어나자 길이 땅보다는 하늘에 더 가까워졌다. 높은 산등성이 위로 사람들의 옛길을 그대로 찻길로 낸 모양이었다.    

문제는 가을이라 해가 빨리 진다는 사실이다. 그리스 도로 사정은 열악하다. 민자 고속도로는 관리도 잘 되어 있지만, 지방도로 빠지면 당황스러울 정도다. 가로등조차 찾기 힘들다. 어쩌면 그리스 경제 위기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이날 산길을 3시간 동안 200km 가까이 주파했다. 마지막 저 멀리서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 고생을 통해서만 도착할 수 있었던 곳은 고대 그리스의 성지, 델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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