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노트] 사납게 몰아붙이면 설득은커녕 반감만
‘담배는 정말 나쁜 것이에요. 기호식품이니 그것도 먹는 것이라고요? 천만에요. 담배는 독약일 뿐입니다. 대마초보다 더 해로울 지도 몰라요. 절대 피우면 안돼요.’
이렇게 외치고 싶은 적이 있었다. 담배를 끊고 5년 정도 지난 뒤였다. 하고 싶은 말을 숨기지 못하는 가벼운 입인지라 저 말은 툭 하면 내 혀를 타고 세상에 던져졌다.
특히 술자리에서 많이 나왔다. 담배를 피워야 할 이유를 백가지 정도는 댈 수 있는 말발 센 골초라도 끼어 있으면 그야말로 격론이 벌어졌다. 뒤 끝도 좋지 않아 흥분해서 서로 얼굴이 빨개지기 일쑤였다. 시원하게 결론이 나지 않으니 말을 하면 할수록 기력만 떨어질 뿐, 머릿속에 남는 것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이렇게 격론을 벌인 뒤 집으로 돌아온 어느 날 난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담배 옹호론자 손톱 밑을 송곳으로 찌를 듯한 사나운 글이 나올 터였다.
하지만 내 손가락을 통해 나온 글은 사납지 않았다. 격하지도 않았다. 초고는 비판과 비난이 가득한 격문에 가까운 글이었지만 퇴고를 거쳐 완성된 글은 아주 부드러웠다. 글을 쓰면서 마음이 누그러졌고, 더불어 생각이 논리적으로 변한 덕분이었다.
금연을 권하는 글이지만 난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고 결코 주장하지 않았다. 흡연 애호가를 비판하지도 않았다. 왜 담배를 끊기로 결심했고 어떻게 끊었는지, 금연 이후의 삶이 어떤 모습인지를 그저 수기처럼 담담하게 풀어 놓았을 뿐이다.
이 부드러운 글이 격문보다 더 힘이 세다는 사실을 아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전적으로 내 글에 힘입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시나브로 금연이 우리 사회 대세가 되어갔다. 관공서를 시작으로 금연구역이 늘어나더니 식당 카페에 이어 당구장까지 금연구역이 됐다. 담배 갑에 암세포를 그려 넣을 정도의 강력한 금연 정책도 시행됐다. 이런 흐름을 만드는 데 내 글이 응원단 역할 정도는 했으리라 생각된다.
독자들 관심을 끌었다는 것도 글쓴이로서는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많이 읽혔고, 방송 작가 눈에도 띄어 텔레비전에 출연해 금연 비법을 소개하는 경이로운 일도 경험했다. 이 일이 강렬한 담배의 유혹을 물리칠 힘이 되어 주기도 했다. 전 국민이 보는 공영방송에서 금연에 성공했다 장담했으니, 어떻게 담배를 다시 입에 물 수 있었겠는가. 그 덕분에 난 20년 가까이 담배 피우지 않는 삶을 즐기고 있다.
만약 비난과 비판만 가득 찬 격문을 썼다면 어땠을까? 잠시 속은 후련했겠지만 많이 읽히지는 못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울림을 주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담배 옹호론자들 반발심만 키워 악성 댓글만 줄줄이 붙었을지도 모른다.
방송 출연 이후에도 난 금연에 관한 글을 몇 편 더 썼다. 모두 금연 경험을 소개한 잔잔한 글이었다. 독자 눈을 확 끌만한 새로움이나 충격적인 대목이 없는데도 독자들 관심은 뜨거웠다. 그 글을 읽고 금연을 결심 하거나 성공한 이가 있다면 정말 기쁠 텐데, 아쉽게도 확인할 길이 없다.
글을 써서 대중에게 던지는 행위는 세상에 대한 프러포즈다. 소통해보자는 제안인 것이다. 그저 들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쓰는 글도 있고 주장을 펼치기 위해 쓰는 글도 있고, 세상의 불합리와 싸우고 싶어 쓰는 글도 있는데, 모두 기본은 상호 이해와 신뢰를 기본으로 하는 소통이다. 그러니 되도록이면 부드러운 게 좋다.
특히 주장을 펼치거나 세상의 불합리와 싸우기 위한 글일수록 차분하고 부드러운 게 좋다. 독자를 설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납게 몰아붙이면 설득은커녕 반감만 키울 가능성이 크다. 글로 세상과 싸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납게 싸우지 않고 프러포즈 하듯 부드럽게 다가가는 것이다.
다음은 금연에 관해 지난 2006년에 쓴 글이다.
5년 전인 2001년 9월, 전 세계가 9.11 테러로 들썩일 때 우리 가족은 다른 문제로 술렁였다. 독한 구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더군다나 별로 성실하지도 않은 ‘의지박약’ 가장의 '금연 선언‘때문이었다.
아내는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듯한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4살 딸은 아빠의 선언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엄마의 표정과 말투를 흉내 냈다.
"정말 할 수 있을까! 이번에도 실패하는 거 아니야. 욕심 부리지 말고 서서히 줄여나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또 실패하면 창피하잖아."
"아빠 정말 할 수 있어? 이번에는 정말 할 거야?"
이런 김빠지는 반응에 난 항변을 할 수도, 변명을 할 수도 없었다. 한 두 차례 그런 게 아닌 탓이었다. 5번 이상 금연 선언을 했지만 번번이 실패만 하고 있었다.
처음 금연을 선언한 것은 결혼 직후다. 아내는 유난히 담배 연기를 싫어했다. 그 이유가 그저 담배를 피우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인 줄만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비염'이라는 질병 때문이었다. 비염은 호흡기 질환이라 담배연기와는 상극이다. 그 때부터 난 '금연'을 결심 했다.
딸이 태어난 뒤에는 금연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담배 냄새를 풀풀 풍기며 집에 들어서는 날 느껴지는 아내의 서늘한 눈초리가 부담스러운 것도 금연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아내의 표정이 곱지 않았던 이유는 '금연'에 성공한 이후에야 알 수 있었다. 담배를 피울 때는 담배 냄새가 구수한 것 같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았다. 악취였다. 특히 담배를 방금 피운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가 더 지독했다. 아내는 갓난아기 딸에게 그 지독한 냄새를 맡게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금연이라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밥 먹고 난 뒤 담배를 물지 않으면 왠지 속이 더부룩했다. 걱정거리가 생기면 나도 모르게 담배를 찾았다.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술자리. 술만 한잔 들어가면 담배의 유혹을 뿌리치기 정말 힘겨웠다.
주변 사람 대부분이 지독한 '애연가'라는 사실 또한 나를 힘들게 했다. 마지못해서, 끊기가 힘들어서 피우는 사람들이 아니라 담배를 끊을 생각이 아예 없는 이들이었다.
"얼마나 더 산다고 그 좋은 담배를 끊겠다는 건지."
"스트레스 왕창 받는 게 담배피우는 것 보다 건강에 더 해롭다고 하던데."
이런 식이었다. 담배를 절대로 끊지 말아야 할 이유를 백가지 정도는 줄줄 꿰는 사람들이 내 주변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다. 심지어 권하는 담배를 받지 않자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라고 협박(?)한 사람도 있다.
이런 말에 굴복해, 유혹을 이기지 못해...난 결심 3일을 못 넘기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실패를 거듭했지만, 그래도 담배 피우는 양이 조금씩 줄어든 소득은 있었다. '담배를 끊다가 실패하면 도리어 피우는 양이 증가한다'며 훼방을 놓은 이도 있지만, 최소한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담배 피우는 꿈을 꾸기도
그러나 이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2001년 9월에 난 금연에 성공했다. 그 때부터 2006년 9월까지 담배를 한가치도 피우지 않았으니, 자신 있게 '금연에 성공했다'고 밝힐 만하다.
주변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담배를 끊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난 그저 '갑자기 담배가 싫어졌다'고 대답한다. 담배를 끊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면 너무 길기 때문이다.
"어떻게 담배의 유혹을 이겨냈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하는데, 이럴 때는 좀 장황하지만 설명을 한다. 담배를 끊으려고 마음먹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다.
난 담배의 유혹을 뜀박질로 극복했다. 식사 후 속이 더부룩할 때도 뛰었고 고민되는 일이 생겨도 뛰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땀으로 옷이 범벅이 될 때까지 뛰었다.
금단현상 때문에 예민해져서 주변 사람들을 신경질적으로 대하는 어려움도 겪었다. 그럴 때면 '한가치만 피워볼까'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한가치가 열가치가 되고 열가치가 한 갑이 되어 다시 금연에 실패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그럴 수 없었다. 또다시 금연에 실패한다면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도저히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담배 피우는 꿈을 꾸며 실패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다가 깰 때는 금단현상의 지독함에 몸서리를 쳤다. 현실이 아닌 꿈이었다고, 그러니 실패한 게 아니라는 안도감에 한숨과 함께 웃음에 새어 나오기도 했다. 군대를 제대한 후 몇 년간을 다시 군대에 가는 악몽(?)을 꾸다가 깨어나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 적이 있는데, 그 기분과 비슷했다.
담배를 끊은 지 5년이 흐른 지금은 '담배를 피운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 시절이 아득하다. 10년 넘게 담배를 피워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초가을의 선선한 바람과 함께 담배와의 인연은 5년 전 9월에 그렇게 끝이 났다.
다음은 금연에 관해 지난 2012년에 쓴 글.
이런 젠장! 어제 또 꿈을 꾸고 말았다. 헤어진 지 10년이 넘었는데... 또다시 꿈에 나타났다. 나를 짓눌렀다. 숨이 막혔다. '그럴 리 없는데,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 눈을 떴다.
꿈에서 깬 후 '어째서, 어째서 그놈을 만났을까'라고 또다시 후회했다. 그땐 너무 어렸다. 그놈이 정말 멋있어 보였다. 이게 내가 그놈을 거절하지 못한 '핑계'다.
고등학교 입학식 날, 그놈을 처음 만났다. 그때만 해도 이렇게 질기고 독한 인연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입학식 날 밤, '절친' 주영(가명)이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따라가 보니 기숙사 뒤편 담장이었다.
"담배 피우지?"
"아니."
"그래? 난 피우는 줄 알았는데!"
주영이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하얀 담배 연기가 어둠을 뚫고 하늘로 올랐다. 꼬물거리며 하늘로 올라가다가 흩어지는 담배 연기가 한없이 자유로워 보였다. 그 연기를 따라 하늘로 올라가면 숨이 탁 트일 것 같았다.
"한 대 피워볼래?"
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주영이가 좀 놀랍다는 표정으로 담배를 한 개비 꺼내서 내게 건넸다. 입술에 닿는 필터의 부드러운 느낌이 좋았다. 내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담배 연기가 꼬물거리며 하늘로 올라가다 흩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잠시, 아주 잠시 내가 기숙사에 갇혀 있다는 숨 막히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이것이 나와 그놈, '담배'와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다.
나는 아버지 권유로, 아니 그보다는 강요로 사립학교 기숙사에서 꿈 많은 고등학교 시절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주영이를 만났다. 주영이와 난 단 하루 만에 '절친'이 됐다.
'그놈' 때문에 우정에 금이 갈 뻔도 했지
말이 기숙사지 그 곳은 군대와 다름없는 곳이었다. 첫날, 그러니까 입학식 전 날 밤, 선배들은 '전통'이라며 신입생들을 운동장에 집합시키고는 다짜고짜 '한 따까리'를 쳤다. 눈 쌓인 운동장을 구르며 난 벌써부터 바깥세상을 그리워했다. 주영이는 참 듬직했다. 덩치도 컸고 덩치만큼이나 마음도 담대했다.
주눅이 들어 축 처진 내 어깨를 토닥이며 "야, 괜찮아... 기선 제압하느라 그러는 거야"라고 위로했다. 신기하기도 하지! 그 말을 듣자마자 내 몸 어디선가 힘이 솟구쳐 올랐고 덩달아 마음도 편안해졌다.
주영이와 난 그 후로 틈만 나면 기숙사 뒤 담장이나 학교 화장실에서 그놈을 만났다. 담배 연기를 허공에 뿜으며 두런두런 얘기하는 시간이 그렇게도 편할 수가 없었다.
담배와 함께 만났지만 담배 때문에 우정에 금이 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학생과에서 '흡연자 색출령'을 내렸다. 담배 피우다 걸리면 학생과에 끌려가서 그동안 함께 담배 피운 친구 이름을 10명이나 적고 나와야 했다. 순순히 불면 10대 정도 맞지만 의리 있는 척하느라 불지 않고 버티면 일단 100대 정도 맞은 다음 불어야 했다.
주영이와 나, 우리는 학생과에 끌려가서 두들겨 맞고 나왔다. 다행히 우린 한꺼번에 불려 갔다. 누군가 우리 둘을 한꺼번에 불어 버린 것이다. 함께 불려 가지 않고 따로따로 불려 갔다면 서로 오해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흡연자 색출작전'은 아이들이 담배를 못 피우게 하려고 벌인 일이지만, 효과는 거의 없고 반감만 컸다. 아이들은 일본 순사도 아닌 선생님이 어떻게 친구를 팔아먹으라고 강요할 수 있느냐며 원망했다.
'흡연자 색출작전'에 투입된 선생님들 대부분이 흡연자라는 사실도 아이들 반감을 샀다. 그중에는 아이들이 보건 말건 학교에서 담배를 꼬나 물고 다니는 선생님도 있었으니, 금연운동이 잘될 턱이 없었다. 잘 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선생님들이 벌인 무지막지한 금연운동은 이런저런 이유로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담배 피우는 아이들이 줄기는커녕 학년이 올라 갈수록 되려 늘었다는 사실이 '작전실패'를 증명했다. 졸업할 즈음에는 담배를 피우는 아이들이 안 피우는 아이들보다 훨씬 많았다.
아내의 '국지성 집중 핀잔'... 난 그놈을 지켰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10년 넘는 세월을 난 그놈과 함께했다. 함께 살았다고 해야 좀 더 정확한 표현이다.
우린 한시도 떨어져 있지 못했다. 군대 훈련병 시절에 하나님, 부처님보다 더 높은 대대장님이 '금연 특별명령'을 내린 적이 있다. 몰래 담배 피우다 걸리면 치도곤을 당할 게 분명한 살벌한 시기였다. 그때도 난 그놈을 만나기 위해 깊은 밤 목숨 걸고 으슥한 곳을 찾았다.
난 그놈을 신혼집에도 끌어들였다. 담배에 불을 붙이자 아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얼마나 사납게 노려보는지 방 안 공기까지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주눅이 들어 잠시 움찔했지만 못 본 체하고 계속 담배 연기를 뿜어 댔다. 그 눈빛에 밀리면 평생 집 밖에서 덜덜 떨며 담배를 피워야 할 것 같았다.
잠시 후, 소나기 같은 핀잔이 쏟아졌다. 아랫배에 힘을 꽉 주고 버텼다. 결국 손을 든 쪽은 아내다. 살벌한 아내 눈빛도 소나기 같은 핀잔도 그놈을 신혼 집 밖으로 몰아 내지 못했다.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3년 전. 아내가 담배 연기와 상극인 비염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였다. 무엇인가 큰 변화가 필요함을 느낀 것도 금연을 결심한 이유다. 이를테면 내 의지를 시험해 보기 위한,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 치르는 전초전 같은 일이 바로 '금연'이었다.
IMF라는 파도를 넘으면서 몸과 마음이 지치다 못해 피폐해져 있었고, 밑천이라고는 아직은 젊은 몸뚱이뿐인데 그나마도 극심한 스트레스 탓인지 시도 때도 없이 아팠다.
인생이 꼬였다는 비애감에 심성마저 배배 꼬여 사소한 일에 벌컥 벌컥 화를 내기 일쑤였고 그게 원인이 되어 주변 사람들과 다투는 일도 잦았다. 어느 날,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고 반성하면서 변화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놈과 헤어진 후 얻은 건... '자신감'
결심하고 2년여 만에 담배를 끊었다. 특별한 비법은 없었다. 아내와 딸에게 한 약속, 그리고 나와 한 약속을 깨고 싶지 않아 발버둥 쳤을 뿐이다. 자신감이라는 게 참 신기한 힘을 발휘했다. 이겼다는 자신감, 담배와의 혈투에서 승리했다는 자신감이 많은 변화를 안겨줬다. 물론 기분 좋은 변화다.
금연 이후 변화가 있느냐고? 너그러워졌다는 게 가장 큰 변화다. 누군가 건드리기만 하면 찌를 것처럼 날카로웠던 성격이 둥글둥글해졌다. 그러다 보니 웬만한 일로는 싸우지 않게 되고, 그런 세월이 쌓이다 보니 주변 사람과의 관계도 부드러워졌다.
금연에 성공한 이후, 삼십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직업도 바꿨다. '할 수밖에 없는 일'을 과감하게 접고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선택했다. 이것 역시 금연에 성공했다는 자신감이 준 선물이었다.
간간이 금연에 성공한 사람들을 만난다. 참 반갑다. 동질감이 느껴져서 금세 친해진다. 자연스럽게 화제도 '금연 무용담'으로 이어진다. 한참 이야기를 듣다보면 한 가지 나와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된다. 대부분 담배의 지독한 해악을 뼛속 깊이 느낀 후 금연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나는 좀 다르다. 사실, 난 담배를 피우는 동안에는 담배가 얼마나 '나쁜 친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리 좋은 친구는 아니구나 하는 정도였다. 오히려 담배를 끊은 지 10년이 넘은 요즘 들어 담배가 정말 지독한 친구였구나 하며 소스라친다.
그 지독하다는 군대 생활 기억도, 열병처럼 몸 구석구석을 쑤시게 했던 첫사랑의 아픈 기억도 나를 10년 이상 괴롭히지 못했다. 기껏해야 3년이었다. 그런데, 담배란 놈은 정말 독하다. 절교한 지 10년이 지났는데도 가끔씩 꿈에 나타나 나를 괴롭힌다.
삶은 만남으로 이뤄진 강이다.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만나느냐에 따라 숱한 것이 변한다. 강물이 폭포를 만나면 곤두박질치고, 저수지를 만나면 한 곳에 눌러 앉듯이.
그래서 '만남'이란 것이 인생에서 참 중요하다. 좋은 친구를 만나면 웃을 일만 생기고, 나쁜 친구를 만나면 찡그릴 일만 생긴다. 고등학교 입학식 날 만난 담배라는 친구는 정말 '나쁜 친구'였다. 그놈을 좋은 친구라 믿고 산 것은 내 일생일대의 실수였다.
담배 피우는 꿈을 꾸다 소스라치게 놀란 날 아침에 담배와의 인연을 떠올리며 상념에 잠긴다. 그때 그 어린 시절 담배 연기와 함께 내가 하늘로 올려 보낸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그땐 자유라고 믿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다.
그때 담배 연기와 함께 하늘로 올라간 것은 비겁함이었다. 난 현실과 당당히 맞서지 못하고 비겁하게도 담배 연기 뒤로 숨으려 했던 것이다. 그 사실을 25년여가 지난 지금에서야 깨닫다니... 이런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