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uchette, 1967 - 로베르 브레송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영화는 묘하면서도 기분 좋은 신비로움이 있다. 브레송 감독은 설명적인 대사보다 이미지와 이미지들의 연결에서 오는 힘을 더 중시한다. 그러다 보니 영화가 전반적으로 다소 정적인 느낌이 든다. 내러티브 측면에서 보면 중요한 사건들을 다 보여주지 않고 클라이맥스는 오히려 생략하고 이야기의 시작과 끝만 보여주기도 한다. 인물의 감정은 영화 속에서 배제되고 비전문 배우인 주인공들의 표정 연기는 시종 무표정에 가깝다. 영화는 종종 인물의 손이나 발, 눈 등을 클로즈업으로 잡아주며 그들의 행위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보여준다. 방금 말한 모든 형식적 틀을 종합하면 브레송의 영화는 일반적인 내러티브 영화(할리우드 영화)와는 확연히 다른 영화다. 이런 영화들은 보통 편하게 보기 쉽지 않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내러티브보다 이미지의 미학이나 ‘영화 매체는 무엇인가’와 같은 더 큰 담론을 담아내고자 하는 영화는 아예 편하게 볼 수 없게 된다. 브레송의 영화는 마냥 편하게 볼 영화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예 편하게 볼 수 없는 단계로까진 나아가지 않았다. 서두에 말한 묘한 신비로움은 바로 브레송 영화가 위치한 상태에서 기인한다. 분명 형식의 틀을 갖추고 있고 관객이 계속 생각하면서 영화를 보게 만드는 불편함이 있는데 영화를 전체적으로 보면 내러티브를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따라가며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사유하다 보면 생략된 틈을 충분히 메울 수 있고 배제된 감정이 더 큰 깊이를 지닌 채로 드러나게 된다. 영화의 막이 내릴 땐 분명 영화에선 배제했지만, 어디서 나타났는지 몰아친 감정의 여운에 한동안 멍해진다.
<무쉐뜨>는 1967년에 제작된 브레송의 영화로, 브레송 영화 세계의 정수를 담고 있는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영화이다. 그래서 앞서 짧게 설명한 브레송 영화의 특징들이 영화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영화는 주인공 ‘무쉐뜨(나딘 노르티에르)’의 수난기를 그리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일한 안식처인 엄마는 병들었고 갓난아기는 무쉐뜨 아니면 돌보는 사람이 없으며 의붓아빠는 매일 무쉐뜨를 학대한다. 그리고 무쉐뜨는 학교에서 선생님한테도 또래 친구들에게도 멸시와 조롱을 받는다. 비가 오는 어느 날 마주치기 싫은 학우들을 피해 숲길로 돌아가던 무쉐뜨는 더 큰 비극을 연달아 경험하게 된다.
영화는 무쉐뜨 엄마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영화를 처음 보는 관객이라면 ‘내가 없으면 그들은 어떻게 될까?’ 걱정하며 눈물짓는 이 여인이 누군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다시 오프닝 시퀀스를 보면 그녀의 걱정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독백을 마친 엄마는 프레임 바깥으로 나가고 타이틀이 뜰 때까지 영화는 빈 곳을 계속 보여주고 있다. 이는 영화의 클라이맥스 부근에서 실제 부재하게 되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상징한다. 이어서 어떠한 설명도 없이 밀렵 감시인 ‘마티유’와 ‘아르센’을 번갈아 보여주며 덫을 사용해 새를 사냥하는 이미지들이 나열된다. 마찬가지로 영화를 다 보면 이들이 사냥에 덫을 사용하는 것과 관련한 문제 그리고 여자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에 서로 대립하는 캐릭터였다는 걸 알 수 있다. 설명이 부족하고 이미지의 나열로 진행되는 이 초반 장면들이 사실은 내러티브의 이해를 돕는 빌드업의 기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러티브와 관련이 없는 이미지들이 아니므로 형식적인 영화에 거부감이 있는 관객도 초반의 정적인 부분만 넘어가면 아주 재밌게 브레송의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브레송의 영화가 보통 그렇듯 <무쉐뜨>에서도 관객이 감정에 이입하는 것을 방해하려는 시도들이 이어진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무쉐뜨가 범퍼카를 타다가 처음 본 남자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부분이다. 범퍼카가 부딪치며 팡팡 울리는 파열음과 함께 마치 무성 영화 시대에 자주 틀어줬을 법한 신나는 배경음악이 깔린다. 범퍼카를 탄 후 무쉐뜨는 타는 동안 자신과 자주 부딪치고 눈도 맞추고 했던 또래 남자애를 따라간다. 그리고 말을 걸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아빠가 튀어나와 무쉐뜨의 뺨을 대차게 내리친다.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는 무쉐뜨를 툭툭 밀어대며 원래 앉았던 자리로 돌아온다. 뺨을 치는 순간에도 눈물을 흘리며 자리로 돌아오는 순간에도 배경음악은 범퍼카를 탈 때와 마찬가지로 활기차다. 사실 무쉐뜨가 뺨을 맞았을 때부터 충격을 받긴 했다. 하지만 그 충격의 강도가 엄청 크진 않았는데 이 충격의 완화를 계속 깔리는 신나는 음악이 담당했다. 만약 이 장면에서 음악이 없거나 분위기 잡는 음악으로 바뀌고 아빠의 살벌한 대사가 추가되며 무쉐뜨의 표정에 온갖 감정이 드러나며 눈물 흘리는 것을 클로즈업으로 잡아줬다면 큰 충격과 함께 바로 상황에 감정이입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본 장면은 어땠는가. 뺨을 맞는 거 자체는 충격적이나 흘러나오는 음악은 너무 신나고 무쉐뜨는 계속 무표정한 반응이다. 나중에 눈물을 흘리긴 하나 흐느끼는 것도 아니고 무표정한 상태에서 흐르는 눈물은 마치 인공눈물인 양 느껴져 감정의 절절함이 크지 않다. 뭔가 시트콤 속 한 장면처럼 가볍게 흘러 지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브레송은 관객의 감정이입을 지속해서 방해하려고 시도한다.
영화에서는 신체를 클로즈업하는 장면 또한 많이 나온다. 초반에 사냥할 때 마티유와 아르센의 눈, 술을 납품할 때 잡히는 무쉐뜨 아빠와 오빠의 손, 무쉐뜨가 원두를 그라인더로 갈 때 고정하는 발, 커피를 따르는 손, 오두막에서 촛불을 켜는 아르센의 손 등 다 나열하기 힘들 정도다. 보통 클로즈업은 무언가를 드러내고 강조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쓰이는데 브레송의 클로즈업은 그런 기능보다는 연극적으로 해석되는 시공간적인 맥락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클로즈업되는 대상의 힘을 경험(체험)하게 만드는 데 사용된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클로즈업 장면은 아르센에게 강제로 범해진 후 집으로 돌아와 칭얼거리는 갓난아기에게 우유를 먹일 때 쓰인 클로즈업이다. 이때 무쉐뜨는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으며, 이 눈물은 우유병을 잡은 손 위로 그대로 떨어진다. 그리고 마치 손이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손 위에서 눈물이 중첩된다. 또한, 우유를 먹이기 직전 아기가 손을 넣었다 빼서 무쉐뜨의 가슴팍이 살짝 드러난 상태인데 이 모습은 마치 아기를 돌보는 모성애 넘치는 엄마를 연상케 한다. 집에 오기 전 무쉐뜨가 당한 끔찍한 일을 알고 있는 관객은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손이 눈물을 흘리게 내버려 두면서 아기를 챙기는 무쉐뜨의 모습이 숭고하게까지 느껴진다.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를 보며 생략과 배제로 숨긴 감정이 사건이 진행됨에 따라 관객의 유추로 드러날 때 더 배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표정과 절제된 감정을 해석하면서 관객이 얻게 되는 감정의 깊이는 더 깊었고 여운마저 짙었다. 아직 보지 못한 브레송의 영화들이 수두룩하다는 게 현재로선 가장 큰 기쁨이다. 한동안은 브레송의 작품들을 보며 그의 영화 세계에 흠뻑 빠져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