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자크 타티 회고전-윌로와 친구들'을 다녀왔다.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축제일>(1947)과 감독의 영화 중 아마 가장 유명할 <플레이타임>(1967)을 관람했다. 영화는 두 편 다 기대 이상으로 재밌었다. 저녁에 상영하는 자크 타티 단편선까지 보고 오고 싶었는데 체력이 허락하지 않아 아쉽다. 이번달 말까지 회고전이 열린다고 하니 또 한 번 시간을 내봐야겠다.
자크 타티는 연출뿐 아니라 자신의 영화에서 주연도 도맡아 하고 있는데 키가 190cm가 넘다 보니 금세 티가 난다. 커다란 주인공이 과장된 몸동작으로 스크린을 휘젓고 다니는 걸 보면 자연스럽게 슬랩스틱 코미디가 떠오른다. 대사가 없어도 이해할 수 있을만한 웃기는 상황을 조성하고 이후 비슷한 상황을 반복하거나 약간의 변주를 통한 차이를 두어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확실히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 '헤롤드 로이드'와 같은 무성영화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는 듯한 모양새다.
하지만 오늘 본 자크 타티의 작품들은 무성영화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맛있는 요리의 풍미를 더해주는 향신료처럼 과장된 몸동작과 꾸며진 상황들 사이사이 대사와 사운드가 적재적소에 들어간다. <축제일>에서 쓰러지는 큰 기둥을 피해 자전거를 타고 가게 안으로 도망친 적 있는 우체부 '프랑수아(자크 타티)'가 지렛대로 사용되는 나무판자의 우지끈 소리를 듣고 또다시 자전거를 타고 가게 안으로 도망치는 장면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때 가게 주인은 처음 프랑수아가 들어왔을 때처럼 자신의 가게 안에 자전거 타고 오지 말라며 자전거를 가게 밖으로 던진다. 하지만 두 번째 던져지는 자전거는 프랑수아가 아닌 다른 손님의 것이었다. 이러한 반복 속의 차이가 새로운 웃음을 유발한다.
<축제일>의 프랑수아 캐릭터를 보고 있으면 앞서 언급한 1920년대 슬랩스틱 영화 속 캐릭터들이 저절로 떠오른다. 프랑수아는 주변 상황, 사람들에 휩쓸리며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해서 때로는 위험하고 때로는 문제적인 예측불가한 상황들을 계속 마주한다. 착하긴 한데 너무 우둔하고 주위사람들은 이런 프랑수아를 가학적이라고 여겨질 만큼 괴롭히거나 이용해 먹는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안쓰러우면서도 웃긴,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격언에 딱 맞는 감정이 든다. 프랑수아를 제외하면 프랑수아만큼 영화에서 어떤 상황에 휩쓸리거나 과장된 몸동작으로 웃음을 주는 캐릭터는 없다. 축제일 당일,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염소를 애완동물처럼 끌고 다니는 할머니 캐릭터는 익히 봐온 모습들에 근거해서 주변 인물들을 분석하고 행동을 예측하는 내레이터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영화의 메시지이면서 주인공에게 가장 중요한 교훈을 던져주는 것도 이 할머니다.
과장된 몸짓의 주인공과 정반대의 이미지를 가진 할머니가 만나 이야기 나누는 영화의 결말은 사뭇 다른 두 캐릭터가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상적이다. 프랑수아는 축제 때 미국 우체부들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된다. 이 다큐멘터리는 매우 허황되었고 미국인의 거짓된 위대함을 알리려는 선전물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프랑수아에겐 큰 동기부여가 된다. 이 다큐멘터리를 기점으로 전반부는 프랑수아의 아슬아슬한 일상(슬랩스틱), 후반부는 위대한 미국인우체부처럼 되고 싶은 프랑수아가 미국식으로 우편을 배달하려는 이야기다. 애초에 다큐멘터리가 허황됐는데 그걸 따라 하려는 프랑수아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더 우스꽝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고초를 겪고 힘들어하는 프랑수아에게 할머니가 말한다. '너무 빨리 가려고 하지 말고 자신만의 속도로 가라'며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말이다. 개인적 차원에서도 국가적 차원에서도 유효한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선전에 혹하지 말고 자동화시스템이 불러일으키는 변화의 급류에서 허우적대지 말고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면 된다는 내셔널시네마적인 해석도 가능할 것 같다.
흑백에서 컬러라는 눈에 띄는 변화가 있는 <플레이타임>은 <축제일>에 비하면 무성영화의 성격이 다소 완화됐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주인공 격인 윌로 씨라는 캐릭터는 프랑수아처럼 주변 사람이나 상황에 휩쓸리며 예상치 못한 순간들을 조우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무성영화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다만 프랑수아가 등장한 후부터는 프랑수아를 중점으로 서사가 진행된 <축제일>과 달리 <플레이타임>은 윌로 씨를 중점으로 서사가 진행되지 않는다. 물론 윌로 씨가 서사의 흐름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로서 인지적 이해에 큰 기능을 하고 있지만, 영화는 윌로 씨가 스크린에 나타나지 않아도 끊기지 않고 진행된다.
<플레이타임>은 캐릭터나 기승전결을 갖춘 서사를 따라가며 보는 작품이라기보단 공간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을 지켜보는 작품이다. 60년이 넘게 흐른 오늘날 보면 실소를 자아내지만, 당시엔 근미래적이라 느껴졌을 설정들이 인상적이다. 특히 박람회에서 보여주는 각종 물품들이 재밌었는데 그중 '쾅' 닫아도 전혀 소음이 나지 않는 문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공간설정도 인상적인데 사람들이 사무 업무를 보는 조그마한 박스틀들이 기하학적으로 정렬되어 있는 모습과 건물뿐 아니라 주거공간마저도 통유리로 만들어 안팎으로 볼 수 있게 만들어 놓은 모습은 이미지 그 자체로 강렬했다. 조그마한 박스틀에 가려져 바로 근처에 있으면서도 서로 통화하며 업무를 보는 장면은 covid 이후의 비대면, 그리고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더 강해진 세태를 떠올리게 했다. 부담스러운 통유리 주거공간은 오늘날 찾아보기 어렵지만, 개방적인 듯 보이나 오히려 폐쇄적(의도적인 부분만 보여준다는 점에서)인 건물의 특성을 생각하면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sns들이 떠오른다. 이미지가 그대로 일치하진 않아도 얼추 등가로 생각할 수 있는 이미지들이 떠오른다는 점에서 자크 타티의 근미래적인 설정들은 다가올 사회를 잘 예측한 면이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회사 건물과 박람회장을 지나 영화의 공간은 새로 개업한 '로얄 가든'이라는 레스토랑으로 이동한다. 로얄 가든은 오픈을 바로 앞두고도 페인트칠, 타일 보수 등을 비롯한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아 준비가 덜 된 채로 장사를 시작한다. 이런 기본 설정들은 잠재적인 불안(위험) 요소가 되어 시퀀스 내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으로 작동한다. 윌로 씨 캐릭터처럼 이런 상황 설정도 <플레이타임>에서 무성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이다. 더불어 로얄 가든 시퀀스는 다양한 상황들이 촘촘하게 짜여 있고 앞서 회사 건물, 박람회장의 인물과 설정들이 덧입혀 나타나는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우연한 순간순간들은 정교한 설정을 만나 스파크가 튀는 인상적이고 즐거운 장면들로 재탄생한다. 상황에 몰입해 정신없이 보다 보면 어느 순간 모든 상황이 종료를 앞두고 있음을 마주하게 된다.
<축제일>은 축제 당일 아침 이동식 회전목마를 설치하러 오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시작해 축제를 마치고 이동식 회전목마를 다시 철수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플레이타임>은 미국인 관광객들이 파리 공항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해 다시 공항을 통해 돌아가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수미상관 구조처럼 in/out이 동일한 영화는 마치 관객이 자크 타티가 만들어 놓은 놀이판에 들어와서 재밌게 즐기다가 현실로 빠져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중요한 건 이 놀이판이 얼마나 재밌느냐인데, 지금까지는 너무 만족도가 높아 다른 놀이판들에 참여해보고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