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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밍고 Mar 02. 2020

욕구가 뒷걸음질을 친다

갑자기 떠오른 매슬로우

세상에나. 전염병 때문에 한 달이 넘도록 외부 교류가 없다. 대학원 개강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일도 없는 나로서는 집에서 빈둥대는 게 소일거리다. 코로나 19로 사망자까지 나오는 이 시국에 나는 염치도 없이 '재미가 없어서 죽을 것 같다'. 이건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正말)'이다.



2020년 1월 말부터 3월에 접어든 오늘에 이르기까지 점점 생존과 안전에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온 국민이 마스크를 찾아 헤매고, 손소독제만 보이면 도둑질을 해 가고, 누군가 재채기라도 하면 매서운 눈빛으로 상대를 쳐다본다. 이런 시국인데도 큰 틀에서는 질서가 유지되고 경제활동이 이뤄지고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지금 여긴 문명사회가 맞다. 



최근 몇 주 내에 재택근무를 하는 회사가 많아졌다. 꼭 대면을 필요로 하는 직업이 아니라면 대부분 그렇게 하고 있는 듯하다. 아니면 출퇴근 시간대라도 조금 미뤄서 타인과의 접촉을 적게 하려고 한다. 접촉, 연결, 만남, 교류, 이런 것들로 대표되는 인간 대 인간의 교류 행위가 적어지면서 '코로나 블루'를 호소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아니 벌써 내가 그렇다. 만나지 않으니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기회도 드물고 자극을 얻을 기회도 적어졌다. 집에만 있게 되니 꾸미지 않아도 돼 옷을 살 필요도 없고, 뭘 나가서 사 먹을 필요도 없고, 집에서 쓰이는 생필품이 소비의 전부다. 사유를 하고 싶은 생각도 안 들고 단지 '지금 눈앞의 병을 어찌하면 피해 갈까', 그 생각에만 골몰하다. 여행 계획 같은 것도 감히 꿈꿔볼 일 아니고, 당장 일이 주일 뒤의 일도 예견하지를 못 한다. 한 달 후라면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것도 우린 모르는 일이다.



와중에 재택근무하는 사람들이 한다는 게 달고나 커피를 만들겠다고 커피를 휘젓는 일이다. 출퇴근 시간도 절약되고 잠은 충분히 잤겠다. 좀 적당히 나가 놀기도 해야 하는데 집에서 할 일이 없으니까 커피를 저어서 머랭이 된다는 사소한 게 전부 다 신기한 거다.




이런 상황에서 보니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론'이 생각났다. '생존의 욕구-안전의 욕구-사회적 욕구-존경 욕구-자아실현의 욕구'. 이렇게 총 5단계로 이뤄진 욕구를 하위 단계에서부터 상위단계로 차례로 만족시켜 가며 점점 더 높은 차원의 욕구를 품게 된다고 하는 심리학 이론이다. 그런데 이번에 매슬로우 이론의 약점이 제대로 드러났다. 매슬로우는 욕구가 퇴행하는 것은 설명하지 않았다. 낮은 차원의 욕구가 채워지면 윗단계를 욕망하게 된다고만 했지. 나는 지금 욕구가 엄청나게 뒷걸음질치고 있는데... 그냥 집에서 소처럼 여물만 뜯고 아무 생각도 안 하는데.



아마 매슬로우도 이런 비상시가 아니라 평시의 상황을 상정했기 때문에 퇴행을 말하지 않았겠지만, 의외로 욕구가 퇴행하는 경우는 이런 비상시 말고도 많다. 조금만 몸이 지치고 힘들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시기가 온다. 먹고사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게 느껴지고 고차원적 이야기는 다 개소리로 들릴 때가 있다. 그렇게 매슬로우는 틀렸지만, 또 동시에 맞기도 하다. 그의 말처럼 다시 아랫단계 욕구가 채워지면 윗단계를 꿈꾸게 될 거다. 



지금 전 시민적, 전 세계적 분위기를 타고 다 같이 침체되는 꼴이지만 결국에 인류는 백신을 개발해낼 거고 각고의 노력 끝에 병이 더 퍼지지 않도록 방역할 것이다. 그러면 일상은 다시 궤도에 오를 것이고 다시 여행 계획을 짜고, 나를 돋보일 소비재를 소비하게 될 것이고, 일상과 동떨어진 멋진 이야기를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집에서 너무 재미가 없어서 죽을 것 같다가 문득 내가 '현존하는 가장 슬기로운 생명체'임을 깨닫고 글을 써 봤다. 배 뜨시고 감염의 영향으로부터 조금 떨어져 있다 보니 내 욕구는 다시 정방향으로 가고 있나 보다. 다들 욕구가 역행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May the force be with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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