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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리썬 윤정샘 Aug 09. 2020

나다움으로 이겨낸 시간

고통 속에서도 행복을 발견해내는 용기에 대하여

“제주 한 달 살기 숙소를 지금 예약하는 건 너무 성급한 걸까? 예약이 다 차 버리면 그때 가고 싶어도 못 가니…. 수술하고 모든 것이 다 잘될 거라는 믿음으로 예약해도 되려나?”

“예약금은 얼만데?”

“예약금은 따로 없고, 임대료랑 보증금 전액을 다 보내야 예약이 되네. 임대료 220만 원, 보증금 50만 원. 좀 세긴 하지? 그래도 아이 셋 데리고 지내기에 여기만 한 곳이 없으니..”

“음……. 환불 규정은?”

“5월 초까지만 취소하면 97퍼센트 환불이야.”

“음……. 조금 여유가 있긴 하네. 그래, 일단 예약하자.”      


신랑은 한참 동안 뜸을 들이다 오케이 사인을 내려주었다. 굉장히 감성적인 성향의 나는 마음이 동했다 하면 정서적 판단만으로 일을 저질러 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신랑은 모든 변수를 꼼꼼히 따져보고 신중하게 결정을 내리는 편이다. 사실 우리 주머니 사정을 넘어선 비싼 임대료도 문제였지만, 그 당시 상황은 여름 여행을 계획할 만큼 그리 평화롭지도 못했다. 안팎으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제주도 한 달 살이 숙소 예약이라니. 나의 제안이 조금 당황스러웠을 법도 했겠지만, 신랑은 담담하게 그것을 받아들여 주었다. 참 고마웠다.




예약 이야기가 오가기 하루 전날은 아이의 정기 검진 결과를 들으러 서울 병원에 가는 날이었다. 7살의 작은 몸으로 척주 종양 제거 수술을 받은 지 일곱 달이 지난 후였다. 신랑이 휴가를 내어 세 아이를 돌보고, 나 혼자서 기차를 타고 다녀오기로 했다. 아, 이게 얼마 만이야. 홀로 기차여행이라니! 아이 셋 엄마에게는 이런 날조차 설렘으로 가득 찬다. 그동안 나 정말 많이 애썼으니, 이날 하루쯤은 휴가처럼 즐기다 오자 싶었다.      


“나 1월 29일에 훈이 검사 결과 들으러 서울 가는데, 진료 시간이 2시라 시간이 좀 남아. 11시 반쯤 대학로에서 만나서 점심 같이 먹을래?”

“오 그래? 좋지. 좋지.”     


병원만 들렀다 오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이미 서울 사는 친구와의 약속도 잡아놓은 터였다. 검사 결과 들으러 가면서 친구와의 만남을 설계하고 여행처럼 길을 나서다니. 참으로 나답구나. 신랑 같았으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을 텐데 말이다. 오랜만에 친구와 만날 생각에 무척이나 설레고 즐거웠다. 혜화역에서 내려 대학로의 약속된 식당으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뺨을 스치는 차가운 공기마저도 반가웠다.      


맛있는 밥을 먹고 후식으로 달콤한 커피까지 한 잔 마신 후,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즐거웠던 시간과 공간을 뒤로한 채 홀로 병원으로 향했다. 그제야 조금씩 긴장이 되기 시작한다.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수술한 지 얼마나 됐다고, 뭐 별일이야 있겠어?’

애써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심장박동은 어느새 템포를 조금씩 올리고 있었다.      


드디어 내 차례다. 딱 2분만 견디자. “깨끗하네요. 3개월 후에 또 검사해 봅시다.”라는 교수님 말씀 듣고 홀가분하게 내려가면 되는 거야. 하고 주문을 걸며 진료실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재발이 됐어요. 상황이 좋지 않아요.”.

“네????? 크기는요? 이제 막 생기기 시작한 건가요?”

“아니요. 제거하기 전 크기와 비슷해요. 커진 속도가 너무 빨라요. 공격성이 큰 것 같으니 수술을 서둘러야 할 것 같아요. 2월에 바로 수술 날 잡을게요. 재수술이라 수술 시간도 회복 시간도 아마 더 길어질 거예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진료실을 어떻게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병원 건물을 휘청거리듯 빠져나와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참을 꺼이꺼이 울었다. 밤마다 잠을 제대로 못 자고 끙끙거리는 아이에게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좀 하라고! 말도 안 하고 끙끙거리기만 하면 너도 힘들고 엄마도 너무 힘들어!”하며 쏟아부은 지난밤의 내가 미치도록 미워서 가슴을 치고 또 쳤다. 처음 발병 소식을 알게 된 악몽 같았던 5월의 그 날처럼, 떨리는 손으로 겨우겨우 버튼을 눌러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흐느끼며 말했다. “우리 훈이 어떡해…….”      


서울역으로 가는 지하철에서도, 대구로 내려오는 KTX 안에서도,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서도 눈물은 하염없이 흘렀다. 얼굴을 반쯤 가려준 면 마스크가 눈물과 콧물로 흠뻑 젖었다. 축축해진 마스크가 몹시도 거슬렸지만, 그것이라도 있었기에 나는 조금 더 마음 놓고 울 수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와 가로등과 사람들이 눈물 앞에서 어른어른 흔들렸다.      


집 앞에서 한참 동안 집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서성이다 ‘울지 말자. 울지 말자.’ 몇 번을 되뇌고서야 간신히 현관문을 열었다. 아이들이 밝은 모습으로 쫓아 나온다. 아빠랑 문구점에서 이런저런 장난감을 샀다며 자랑을 늘어놓는다. “그래. 참 좋았겠다. 신나는 하루였겠네.” 하는 나의 말끝이 파르르 떨렸다.      


머리가 아파 타이레놀을 한 알 털어 넣고 이불을 깔고 누웠다. 거실에서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노는 소리가 들린다. ‘참으로 예쁘구나. 내 슬픔에 너희들이 웃음이 묻혀버리면 안 되겠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다시 일어나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을 읽으며 기억하고픈 구절을 노트에 옮겨 적었다. 그리고 그날의 일기를 차분하게 써 내려갔다. 한 장쯤 적었을까, 그제야 눈물을 거두어들일 용기가 생긴다. 우는 건 딱 오늘까지야. 내일부터는 더 즐겁게 하루를 가꾸어 가는 거야. 며칠 뒤에 있을 수술 따위 걱정하지 말고 과거의 후회 따위 버리고 그저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즐기는 거야. 그리고 더 많이 웃는 거야. 그거면 충분해.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다음 날은 마침 둘째의 생일이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아이들과 함께 쿠키를 굽고 케이크를 꾸몄다. 풍선을 불고 신나는 음악을 틀었다. 손뼉 치고 노래 부르며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참 많이 웃었고, 함께 웃으며 찍은 사진이 또다시 우리를 웃게 했다. 생일파티가 끝날 무렵엔 제주도 한 달 살기 숙소도 예약했다. 6월의 싱그러운 제주도에서 함박웃음으로 뛰어놀 아이들의 모습을 선명하게 상상하고 싶었기에. 그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걸 온 마음으로 믿고 싶었기에. 불안과 걱정과 자책이 내 마음속에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을 만큼 행복과 즐거움으로 가득 채우고자 노력했고 그것은 제법 효과가 있었다.      


어떠한 고통이 찾아와도 곳곳에 존재하는 행복을 발견해내고야 마는 것. 그것은 진정한 나다움의 발현이다.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가는 긴장되는 순간에도 여행처럼 친구를 만나고, 아이가 수술을 받는 동안에도 초조함으로 수술실 앞을 서성이기보다 맛있는 밥을 사 먹고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그 시간을 희망으로 채우고, 파티를 하고 또 여행 계획을 세우며 나는 수많은 두려움을 걷어내고 조금 더 웃을 수 있었다. 엄마가 평소 엄마다운 모습으로 생을 즐기며 웃는 모습을 보이자, 아이도 자기가 얼마나 아픈지를 잊고 더 활짝 웃었다. 7시간이 넘는 큰 수술을 잘 이겨냈고 회복도 잘해주었으며 제주도 한 달 살기 여행도 무사히 잘 다녀왔다.      



여전히 때때로 불안함이 엄습하고 두려움으로 심장이 쪼여오기도 한다. 그럴 때면 주저앉아 생각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기보다 책을 펼쳐 읽고 글을 쓴다. 정갈하게 정리한 식탁 위에 책과 커피를 올려두고 사진을 찍는다. 프레임 밖 세상의 어지러움과 혼란을 잠시 잊고, 내가 찍은 프레임 안에서의 행복을 만끽하며 오롯이 그 시간을 누린다. 가장 나다워지는 시간 속에서 나는 무수한 고통을 이겨내며 또한 무럭무럭 성장하는 중이다. 그런 내가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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