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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리썬 윤정샘 Nov 18. 2020

초등 1학년 아들의 일기 쓰기  

일기가 인생의 단짝 친구가 되기를 바라며

"엄마 나는 기억력이 정말 안 좋은 것 같아. 4일 전에 뭘 했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나."      


"그건 기록을 안 해서 그래. 엄마도 안 써놓은 건 거의 다 잊어버리거든. 그래서 일기도 쓰고 기록도 해놓고 그래. 정훈이도 일기를 쓰다 보면 9살이 되어서도 오늘 뭘 했는지 기억이 날 거야. 일기장만 펼쳐보면 되니 말이야. 한참 지나서 일기장을 다시 펼쳐 읽어보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몰라."     


"그래? 그럼 나도 매일 일기 쓸래! 그런데 그림일기는 너무 어려운데."      


"그림일기는 그림도 그려야 하고 띄어쓰기도 엄청 신경 써야 하니, 그건 엄마한테도 어려워. 그냥 글만 써도 되는 공책에 쓰면 더 쉽게 느껴질 거야."      


"그래? 그럼 나 그런 공책에 오늘부터 일기 쓸래. 나 미술학원 간 동안 일기 공책 좀 사줘 엄마."      




정훈이의 요청으로 일기장을 하나 장만했다. 그리고 정훈이는 줄글로 된 첫 일기를 썼다. 친구네 집에서 저녁도 먹고 실컷 놀다가 집에 오니 9시쯤 되었는데, 얼른 씻고 자기에도 부족할 시간에 굳이 일기를 쓰겠다고 한다. 오늘 하루 뭐가 제일 즐거웠는지 떠올려보고 엄마랑 대화 나누며 자연스럽게 써 내려가는 일기를 아이는 아주 즐거워했다. 다 쓰고 연필을 내려놓을 때의 아이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엄마, 난 그림일기 바보야. 그림도 뭘 그려야 할지 모르겠고 띄어쓰기도 너무 어려워. 다른 친구들은 다 잘해." 하며 자신감을 잃어가던 아이. 애꿎은 그림일기가 일기에 대한 흥미와 자신감을 몽땅 잃게 만들뻔했는데, 내면에서 우러나 스스로 써 내려간 일기를 통해 다시 일기의 즐거움을 찾게 된 것 같아 무척 다행스럽다.      




학교에서 쓰라고 해서 쓰는, 왜 쓰는지도 모르고 그저 검사 맡기 위해 쓰는 그런 일기는 과연 아이 삶에 어떤 도움을 줄까. 일기가 즐거워지게 만들까, 질리게 만들까.

반면 내가 그날 하루를 기억하고 싶고 기록해두고 싶은 자발적 욕구에서 출발하는 일기는 아이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돌아보면 일기는 내 삶에 아주 큰 버팀목이 되어준 것이었다. 내가 육아일기를 쓰지 않았더라면, 그날 뭘 했고 아이가 얼마나 컸고 이런 단순한 내용 말고 그날의 고민과 사색들을 일기로 써 내려가지 않았더라면, 나의 육아는 훨씬 더 고단했을 것이며 이만큼 성장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껏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날 하루의 내 행동과 감정들을 기록하고 싶어서 꾸준히 일기를 써왔고, 그것은 단조롭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실로 지대한 힘이 되어주었다. 때로는 오늘의 힘겨움을 지난날의 기록들이 위로해주기도 한다. 눈물이 뚝뚝 떨어질 만큼 슬픈 날도, 한없이 기쁘고 벅차오르는 날도, 내 일기장이 여기에 모두 풀어놓으라고 나지막이 속삭이며 나를 포근히 안아주는 것만 같다.      



아이에게도 일기라는 존재가 그렇게 다가갔으면 좋겠다. 마음속 모든 이야기를 쏟아낼 수 있고 모든 말을 다 받아주는 둘도 없는 친구. 복잡했던 마음이 더욱 후련해질 수 있고 반성도 하고 다짐도 하며 삶을 조금이나마 더 아름답게 그려나갈 수 있는 인생 단짝. 그런 존재가 되어주면 참 좋겠다.



오늘 저녁에도 아이와 나란히 앉아 각자의 일기를 써 내려가야지. 형식과 재능과 당위성 모두 다 떠나서, 그저 우리의 하루를 찬찬히 돌아보며 스스로를 쓰다듬어주는 그런 일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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