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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리썬 윤정샘 Aug 04. 2021

'화를 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을까?

보다 건강한 감정 표현에 대하여

올여름에는 휴가 계획이 따로 없다. 이렇게 코로나가 심각한 상황에 굳이…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요즘 경제 공부를 하고 있다 보니 성수기 비싼 숙박비가 무척 아깝게 느껴지기도 하며, 또 겨울 제주 여행을 위해 아껴두고 싶기도 하고, 뭐 그런 상황.



어제는 남편이 당일치기로 연가를 써서 오전에는 아이들 치과 진료를 하고, 오후에는 가창 계곡 카페로 출동했다. 지난주에 계곡 카페에 가서 물고기 잡고 개구리 잡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 왔더니 아이들이 또 가자며 성화다. 갈아입을 옷도 챙기고 물고기 잡을 뜰채랑 플라스틱 컵도 챙겨 신나게 달려갔다.


막내가 차에서 잠들어 나는 차에서 막내를 지키고, 남편이 첫째와 둘째를 데리고 먼저 계곡 쪽으로 갔다. 그런데 멀리서 보고 있으니 뭔가 분위기가 좀 안 좋다. 남편이 둘째에게 뭐라고 막 혼내듯 쏟아붓더니 첫째랑 쌩~ 계곡 아래로 가버리고 둘째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혼자 풀이 죽은 채 서 있는 거다. 내가 둘째 쪽으로 다가가자 아이는 그제야 눈물을 뻥 터뜨리며 울기 시작했다. 안아주고 타이르며 달래 보아도 잘 달래지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아빠가 무슨 이유로 어떻게 혼내셨다 말해주었을 텐데, 무엇 때문이냐고 아무리 물어도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안 한다. 그냥 집에 가고 싶다고만 했다. 계곡에 간다며, 물고기 잡겠다며, 뜰채 들고 셋 중에 제일 신이 났던 아이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한참 후 첫째가 차 있는 쪽으로 오기에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둘째가 계곡 쪽으로 돌을 던졌는데 그 돌에 누군가가 맞을 뻔해서 아빠가 크게 화를 내셨다고 했다. 둘째가 훌쩍이며 "그래도 맞지는 않았어." 한다. 사람 없는 호숫가에서 돌 던지며 놀기를 좋아했던 아이였고, 계곡물을 보자 너무 신이 난 나머지 무심코 물 쪽으로 돌을 던졌을 테고, 하필 그곳에 사람들이 군데군데 있었을 테다. 아이도 놀라고 아빠도 놀랐을 그 상황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아빠가 얼마나 심하게 화를 냈을지도 짐작이 간다. 물론 아이 잘못도 크지만, 둘째가 아빠 있는 쪽으로는 아예 안 갈려고 하고 계곡에도 안 가고 싶다 하고 "내일은 아빠 회사 가? 아빠 회사 가면 우리끼리 계곡에 오자." 하며 아빠를 경계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게 느껴져서 마음이 좀 아팠다. 첫째와 잠에서 깬 막내를 먼저 계곡으로 보내고 둘째에게 "우리 빙수 먹으러 갈까?"하고 속삭였다.

      


그제야 마음이 조금 풀리는 눈치다. 둘이 앉아서 사진도 찍고 빙수도 맛있게 먹었다. 사장님께서 국산 팥을 애써 삶은 것이니 꼭 남기지 말고 다 먹으라 말씀하셔서, "네 너무 맛있어요." 하고 웃으며 빙수를 싹싹 비웠다. 그렇게 둘째랑 둘이 시간을 보내다 보니, 문득 내 어릴 적 생각이 났다. 주로 나를 혼내는 사람은 엄마였고, 엄마에게 혼나서 울고 있는 나를 달래주는 역할은 아빠가 맡아주셨지. 가끔은 그 역할이 바뀔 때도 있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부모님 중 한 분이 나를 혼내시면 다른 한 분은 나를 달래주셨다는 것이다. 어떤 잘못을 저지른 상황에서 두 분 다 나를 호되게 혼내셨다면 나는 얼마나 벼랑 끝에 몰린 기분이 들었을까. 잘못에 대한 뉘우침보다는 속상함과 분노와 억울함이 더 크게 둥지를 틀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는 우리 아이들이 아빠한테 혼나서 풀이 죽어있을 때면 나라도 포근하게 달래주는 역할을 해 주고 싶은 거다. 반대로 내가 이성을 잃고 아이에게 화를 퍼붓는 날이 생기면 아빠가 그 역할을 대신해 주고 말이다. 어찌 됐든 빙수 작전으로 아이의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음이 느껴졌고, 나는 그때 살포시 최대한 다정한 말투로 이야기를 꺼냈다.      


"지환아, 아까 아빠가 사람들 있는 곳에서 화내서 많이 놀라고 속상했지? 그런데 아빠도 엄청 놀라서 그러셨을 거야. 지환이가 미워서 소리를 지른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다칠뻔한 상황에 너무 놀라고 그 사람한테 미안하고 걱정이 되어서 그러셨던 것 같아. 알지? 돌 던지는 거 엄청 엄청 위험한 거야. 너는 무심코 던졌는데 누군가 머리라도 맞아봐. 그럼 피도 나고 구급차도 불러야 해. 이번에는 정말로 다행이었어. 다음부터는 어디에서든 사람 있는 곳에서는 절대로 돌 던지고 그러면 안 돼. 알았지?"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했다. 그래도 여전히 아빠 있는 쪽으로는 가고 싶지 않다고 해서 계곡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야외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기로 했다. 조금 후 첫째랑 막내가 아빠와 계곡에서 나와 빙수를 먹으러 카페로 들어갔고 그제야 둘째가 계곡에 가보자며 말을 꺼냈다.



둘이 계곡으로 가서 한참을 놀았다. 얼마나 놀고 싶었을까. 아이의 얼굴 위로 옅은 미소가 잔잔히 퍼졌다. 아이는 계곡을 참방참방 오가며 흐르는 물 사이로 무거운 마음을 조금씩 흘려보낸 듯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빠 보이는 곳에는 아예 가지 않으려던 아이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아빠에게 말도 걸고 여느 때와 다름없는 밝은 아이로 돌아와 있었다. 역시 아이는 아이구나. 뒤끝 있는 나와는 차원이 다르네. 나만 괜히 묘한 분위기 속에 긴장하고 있었구나 싶다.


     

저녁을 먹으며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다 남편이 “오늘은 괜한 지출을 했네. 빙수를 두 개나 먹을 필요는 없었는데.” 하기에 “그래도 그 상황에서는 빙수라도 먹는 편이 나았지. 지환이가 오빠한테는 아예 안 갈려고 하고 한참을 말도 안 하고 얼마나 풀이 죽어있었다고.” 했다. 그랬더니 남편이 갑자기 도끼눈을 하며 그때 그 상황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아느냐고. 그 사람이 창 있는 모자를 안 쓰고 있었으면 어쩔 뻔했냐고. 혹시나 눈이라도 맞았으면 그 사람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충분히 화낼 만한 상황이었고 그래야만 했다고 마구 흥분하며 말을 했다.      


음 그래 맞네. 나는 그 정도 상황인 줄은 몰랐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 상황이었다면 분명히 나도 버럭 화를 냈을 것이다.     


 “그래 그 상황 충분히 이해해. 다만 나는 지환이 입장에서도 공감을 해주고 싶었을 뿐이야. 누군가를 맞추려고 일부러 그랬던 것은 결코 아니니까. 그리고 지환이 잘못에 대해서는 빙수 먹으면서도 충분히 이야기했어.”     


그랬더니 남편이 그렇게 이야기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그 상황을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아주 따끔하고 세게 말을 하는 것이 맞다고 했다.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화를 내는 것’의 정당화에 대해서. 그의 잘잘못을 따질 생각은 없다. 나도 분명히 같은 반응을 했을 것이며, 다른 어떤 방법을 떠올릴 재간조차 없었을 것임이 명백하기에. 다만 우리가 아이들에게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정당화하곤 하는 그 ‘화’라는 것, 다른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키 큰 아빠가 작은 아이를 내려다보며 높은 음성과 위협적인 눈빛으로 화를 내는 것, 그것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그 방법 말고는 정말 없는 것일까. 그 상황에서 느낀 감정은 정말로 ‘화’가 맞는 걸까?      


‘네가 사람 있는 곳에서 돌을 던져서 너무 놀랐어.’

‘저 사람이 맞아서 다칠까 봐 너무 걱정되었어.’

‘사람들이 너를 제대로 돌보지 않은 나를 탓할까 봐 너무 두렵고 수치스러웠어.’   

  

그런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범벅되어 ‘화’라는 감정 하나로 퉁 쳐서 튀어나온 것일 터. 버럭 화를 내는 그 방법 말고, 조용한 곳으로 아이를 데리고 가서 단호하지만 위협적이지는 않게, 네가 지금 어떤 잘못을 했고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질 뻔했으며, 내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그렇게 엄격하고도 단단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알려줄 수는 없는 걸까. 심하게 화를 내서 서로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고 아이가 두려움에 기반하여 행동을 수정하게 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근본적으로 효과가 있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그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막상 그 상황이 되면 버럭 화부터 내게 되는 것은, 우리가 ‘화’ 아닌 다른 방법의 훈육을 성장 과정에서 경험해 본 적이 거의 없고, 나조차도 나의 감정을 제대로 알아채지 못하기 때문이다. 감정 표현에 대한 충분한 경험과 학습이 부족하므로 ‘너에게 화난 것이 아니야. 너의 잘못을 알려주고 싶고, 실은 너무 놀라고 걱정스럽고 두려운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 마치 다른 사람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고 생소하고 불편한 것이다.  


    

남편의 모습을 통해 지난날의 내 모습을 보다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게 된다. 괴물 같은 표정으로 작디작은 아이에게 화를 퍼붓던 지우고픈 날들. 훈육은 하되 그 모든 것을 ‘화를 내는 것’으로 퉁치지는 말았어야 했는데. 불같이 화내는 사람 앞에서 존재가 쪼그라드는 느낌을 받아본 사람은 알 것이다. 화내는 사람의 입김이 곧 화염으로 변해 내 몸을 태워버리는 것만 같은 느낌, 그 무시무시한 화염을 아이들이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아찔해진다.      



계곡에서의 하루가 이렇게 나의 반성과 성찰로 이어질 줄이야. 건강하게 나의 감정을 표현하며 ‘위협의 눈빛’이 아닌 ‘따스한 단호함’으로 아이들을 대하는 ‘진짜 어른’이 되고 싶다. 둘째에게도 어제 하루가 끔찍했던 사건이 아닌, 좋은 추억과 동시에 소중한 교훈의 시간이 되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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