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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AI

2-5. AI가 소프트웨어를 다시 쓰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네 가지 문

by 유비관우자앙비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집어삼켰다면, 이제 AI가 소프트웨어를 다시 쓰고 있다."

마크 안드레센의 명제를 2025년 버전으로 바꾸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프트웨어가 바꾼 세상, AI가 바꾸는 소프트웨어


1995년,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 95가 세상에 퍼졌습니다. 2007년, 애플의 아이폰이 등장했고, 2010년대에는 구글, 페이스북, 넷플릭스가 우리의 일상과 시간을 완전히 점령했습니다. 우리는 소프트웨어 안에서 일하고, 놀고, 사랑하고, 소비하게 된 첫 세대입니다. 문서 작성, 이메일, 회계, 통신, 영상 스트리밍, 결제, 심지어 인간 관계까지 모든 것이 코드 위에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20세기의 산업혁명이 인간의 노동을 바꿨다면, 21세기의 소프트웨어 혁명은 인간의 습관과 사고방식 자체를 바꿨습니다. 소프트웨어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현대 문명의 운영체제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 운영체제를 다시 쓰는 존재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AI입니다. 클릭과 코딩의 시대에서 대화와 위임의 시대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AI는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소프트웨어의 운영 체계를 바꾸는 기술입니다.



소프트웨어 제국의 탄생 — 코드가 만든 권력


소프트웨어는 민주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극도로 집중된 권력 구조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업무, 커뮤니케이션, 창작 도구는 소수의 기업이 만든 소프트웨어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문서를 쓰면 Microsoft Word, 검색을 하면 Google Search, 영상을 보면 YouTube, 협업을 하면 Slack, 디자인을 하면 Figma입니다. 우리는 모두 소프트웨어 제국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클라우드와 API가 자본의 관문이 되었고, 플랫폼이 곧 국경이 되었습니다. 2013년 트위터가 서드파티 앱들의 API 접근을 차단했을 때, 수백 개의 스타트업이 하루아침에 무너졌습니다. 2021년 애플이 IDFA 정책을 바꿨을 때, 메타의 광고 수익이 100억 달러 증발했습니다. 이것이 소프트웨어 권력의 본질입니다.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집어삼켰다면, 빅테크는 그 위에 세금을 걷고 있습니다.



AI의 반격 — 소프트웨어를 다시 쓰는 손


AI는 더 이상 소프트웨어 위의 기능이 아니라, 소프트웨어 자체를 재작성하고 있습니다. 2024년 어느 월요일 아침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메일함을 한 통씩 읽지 않아도 됩니다. AI가 먼저 전체를 훑어 핵심과 응답이 필요한 메일만 요약해 줍니다. 회의가 끝난 뒤, 따로 회의록을 작성하지 않아도 됩니다. 녹취, 요약, 액션 아이템이 자동으로 팀 채널에 공유됩니다. 복잡한 엑셀 함수를 찾지 않아도 "지난달 대비 매출 증가율과 원인만 보여줘"라고 말하면 표와 차트가 생성됩니다.


마이크로소프트 Copilot은 Word에서 문서 초안을 작성하고, Excel에서는 자연어 분석과 차트를 생성하며, Teams에서는 회의를 자동 요약하고 액션 아이템을 정리합니다. 이미 수십만 개 기업이 유료로 Copilot을 도입했고, 사용자들은 평균 주당 4시간의 업무 시간을 절약한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구글 Gemini는 Gmail, Docs, Sheets, Slides, Calendar를 관통하는 맥락형 비서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Notion AI는 회의 메모를 자동 정리하고, 관련 문서를 연결해 조직의 지식 그래프를 만듭니다.


과거에는 사용자가 클릭하면 소프트웨어가 실행됐습니다. 이제는 사용자가 의도를 전달하면 AI가 소프트웨어를 실행합니다. AI는 사용자를 프로그램 밖으로 해방시켰지만, 동시에 더 깊이 안으로 묶어놓았습니다. 도구로서의 소프트웨어에서 동료로서의 소프트웨어로의 패러다임 전환입니다.



새로운 제국의 귀환 — 혁신의 과실은 여전히 소프트웨어 회사에


하지만 이 혁신의 주인도 낯익습니다. OpenAI, Anthropic 같은 신흥 세력이 있지만, 이들도 마이크로소프트, AWS, Google Cloud에 얹혀 있습니다. AI는 기득권을 무너뜨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강화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OpenAI에 130억 달러를 투자하며 Azure 클라우드와 Copilot으로 제국을 재건했습니다. 구글은 Gemini를 통해 검색부터 생산성 도구까지 생태계 전체를 AI화했습니다. 아마존은 Bedrock을 통해 모든 AI 모델을 자사 클라우드 위에서 선택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AI는 혁신의 이름으로, 기득권의 방어선을 다시 그립니다. 빅테크는 이제 도구의 판매자에서 지능의 관리자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거인으로 보이는 OpenAI조차 Azure 클라우드 위에서 돌아가며, 마이크로소프트의 배후 지원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Anthropic은 아마존 클라우드에 40억 달러를 의존하고, 거의 모든 AI 스타트업은 NVIDIA의 칩 공급망에 묶여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소프트웨어 권력의 재편이 아니라 재구조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국의 현실 — 우리는 소프트웨어 문명의 소비자


한국은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나라가 아니라 적응하는 나라로 머물러 있습니다. 네이버와 카카오는 한국어 특화 모델과 기능 중심 개선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스타트업들은 대부분 GPT API를 래핑하거나 글로벌 기능을 수입하는 모델입니다. 정부는 국산 LLM 개발을 지원하지만 GPU, 전력, 데이터 모두 부족합니다.


2024년 국내 AI 기업들이 구매한 NVIDIA GPU는 약 1조 5천억 원 규모로 추정되며, 클라우드 서비스 사용료는 연간 8천억 원을 넘어섰습니다. 정부의 AI 투자금 상당수가 결국 미국 GPU와 클라우드 사용료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우리는 소프트웨어 문명 속에서 살지만, 그 문명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AI 인프라의 소비자일 뿐, 공급자가 아닙니다.


한국의 AI 딜레마 — 네 개의 門, 네 가지 리스크


한국은 이제 네 개의 문 앞에 서 있습니다. 각 문은 하나의 전략을 의미하며, 각 전략은 명확한 트레이드오프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문: 인프라 독립 (주권 전략)

공공, 국방, 금융 중심으로 소버린 AI를 추진하는 전략입니다. 유럽의 GDPR처럼 데이터 주권을 강화하고, 민감 영역에서 자체 AI 사용을 의무화하는 방식입니다. 장점은 자율성과 보안입니다. 단점은 규모의 경제를 확보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주권은 확보할 수 있어도, 경쟁력은 없습니다. KT클라우드와 NHN클라우드가 공공 클라우드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이고 있지만, 기술 격차는 여전히 AWS, Azure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두 번째 문: 글로벌 파트너 (협력 전략)

삼성과 OpenAI, SK와 Anthropic, 네이버와 AWS 같은 파트너십 구조를 구축하는 전략입니다. 장점은 빠른 도입과 즉각적인 기술 접근입니다. 단점은 영구적 종속입니다. AI를 쓰는 나라는 될 수 있지만, 만드는 나라는 아닙니다. 한국 기업들은 한국 시장의 게이트키퍼 역할을 하겠지만, 핵심 기술은 여전히 외부에 있습니다. 이는 소프트웨어 시대의 하청 구조가 AI 시대에도 반복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문: 버티컬 AI 집중 (전문화 전략)

의료(루닛, 뷰노), 제조(현대중공업, 포스코), 콘텐츠(K-엔터 AI) 등 극도로 전문화된 영역에 집중하는 전략입니다. 장점은 독점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실제 수익성입니다. 루닛은 전 세계 병원 영상 데이터를 기반으로 의료 AI 시장에서 인정받고 있고, 제조 AI는 공정 데이터와 수십 년간 축적된 노하우 덕분에 범용 LLM이 대체하기 어렵습니다. 단점은 시장이 협소하다는 점입니다. 깊게 파면 살아남지만, 작게 삽니다. 그리고 OpenAI나 Google이 해당 도메인으로 진출하는 순간 경쟁 구도가 다시 흔들립니다.


네 번째 문: 인프라 중간층 장악 (레이어 전략)

파운데이션 모델은 포기하고, 대신 모델과 비즈니스를 연결하는 중간 레이어를 확보하는 전략입니다. AI 미들웨어, 프롬프트 관리 시스템, 파인튜닝 플랫폼, 모델 검증 도구 같은 영역입니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LangChain, Weights & Biases, Hugging Face 같은 기업들이 이 레이어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장점은 AI를 만들지 않아도 AI가 돌아가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단점은 이 영역도 이미 경쟁이 치열하고, OpenAI나 Google이 수직 통합을 시작하면 중간 레이어는 무력화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결론 — 소프트웨어는 다시 쓰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펜을 쥐지 못했다


AI는 분명 소프트웨어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의 중심에 한국은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외부가 쓴 코드 안에서 살아가는 사용자 국가입니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사고의 구조입니다. 어떤 AI를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시스템 안에서 일할 것인가의 질문입니다.


한국의 AI 전략은 이제 네 방향의 문 앞에 서 있습니다. 어느 문을 열든, 비용은 명확합니다. 주권을 택하면 경쟁력을 포기해야 하고, 협력을 택하면 종속을 받아들여야 하며, 전문화를 택하면 시장의 한계를 감수해야 하고, 중간층을 택하면 수직 통합의 위험을 안아야 합니다. 하지만 가장 위험한 선택은 닫지 않고 서 있는 것입니다.


AI가 소프트웨어를 다시 쓰는 시대, 한국은 그 문장의 일부라도 우리 손으로 써야 합니다. 완벽한 답은 없습니다. 하지만 선택은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이 흐르며 점점 더 좁아지고 있습니다.



다음 편 예고


다음 6부에서는 이 네 가지 전략이 실제 산업 현장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의료, 금융, 제조, 콘텐츠, 국방 등 수직 산업별로 AI가 만들어내는 실제 변곡점과, 그 안에서 한국 기업들이 선택한 전략의 성공과 실패 사례를 함께 짚어보겠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아직 게임이 끝나지 않은 몇 개의 전장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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