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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까자까 Mar 13. 2023

SES 유진을 닮은 그녀

디어 마이 프렌드




누군가 그랬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진정한 친구 세명만 있어도 성공한 삶이라고. 그런 의미에 나는 이미 성공한 삶인 것 같다. 나에는 네 명의 소중한 친구들이 있다. 

그중 고등학교 때 만난 특별한 친구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멜버른에서 7년을 살았지만 살아 내는 게 버거워 여행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던 가난한 유학시절이었다. 졸업 후에도 더 머물지 못하고 결국 한국으로 돌아왔다.


2년 후 한참 욜로족이 유행일 때 회사를 퇴사하고 멜버른으로 3주간 여행을 갔고, 친구가 살고 있는 에들레이드까지 가게 되었다. 가 타이거 항공사 경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친구를 10년 만에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우린 금세 고등학교 시절로 타임슬립했다. 그러다 친구에게 물었다.


"은미야, 니 혹시 기억하나? 니 고등학교 때 내한테 작은 쪽지랑 5천 원 준거? 내 그때 엄청 감동 받아가꼬 버스에서 억수로 울었던 거?"

"맞나? 내가? (꺄르르) 내 억수로 착했네? (히힛)"


친구는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내가 모든 걸 기억하고 있으니깐.








때는 바야흐로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거리는 첫 등교 날. 드디어 1학년 2반에 입성하였다. 나의 자리는 1 분단 맨 자리였다. 햇살이 싱그럽게 들어오는 창가 자리.  책상 위엔 작은 손거울을 필통에 끼워둔 채 낑낑대며 이마에 여드름을 열심히 짜고 있는 여자애 한 명이 보였다. 나는 의자를 빼서 자리에 앉았고, 그 애는 여드름을 짜다 말고  나를 보며 상큼한 톤으로 인사했다.


"안녕?"

여드름 가득한 그 아이 이름은 김은미. SES 유진을 꼭 닮은 그 친구의 첫인상이었다.


SES 유진, 그 시절 은미랑 꼭 닮았다. (은미 사진 인줄?ㅎ)


그 친구는 9번 나는 8번이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같은 반을 2번. 8번과 9번, 9번과 10번을 나란히 함께 했다. 눈코입이 오밀조밀 올리비아 핫세처럼 예쁜 은미는 어딜 가나 시선을 한몫에 받는 아이였다. 시험 기간 중에 독서실에 갈 때면 그렇게 다른 학교 남학생들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쪽지와 음료수를 건네주어 여간 피곤했다. 전달되어야 하는 최종 목적지는 전부 은미였다. 나를 통해 건네어주려는 남학생들의 뻔한 속셈이었다. 왠지 내가 무수리가 된 것 같아 은미를 질투 한 못난 시절도 있었다. 그래서 초콜릿 몇 개는 전달하지 않고 내가 모조리 씹어 먹었다.


은미는 언제나 선했다.  인기 많다고 으시 대지 않았고 겸손했으며 순수했다. 어떤 오빠 때문에 울고불고해서 내가 중간에  고생을 좀 했지만 그 시절 누구나 그럴 때였다. 지금은 코노라 부르지만 오락실 노래방에서 수많은 이별곡을 부르며 우리의 우정은 돈독해졌다.


'시인과 촌장'이라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포크&나이프'라는 레스토랑에서 오징어 덮밥을 사 먹었다. 지금은 인생 네 컷이라 부르는 스티커 사진을 찍어 핸드폰에 붙이고 다녔다. 은미네 집에서 자주 떡볶이를 만들어 먹었는데 파가 없으면 동네 텃밭에서 파를 훔쳐다가 떡볶이에 넣어 먹기도 했다. 우린 절도도 함께 한 사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힘든 시기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

아빠는 맨날 술이었고 집안 형편 어려워졌다. 통학 버스비를 내지 못해서 집안에 굴러다니는 동전을 모아 시외버스를 타고 다니던 때였다. 내가 가난하다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부끄러웠으니깐. 그래서 방과 후 카페를 가거나 친구들과 어울릴 일이 있을 때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계속 피했다.


아직 여름이 가시지 않은 9월 하교 후, 통영 버스 정류장. 수중에 10원 한 장이 없어 당장 내일 차비가 걱정이었다.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회색빛 얼굴로 한숨을 푹쉬고 있는데 누군가 버스 유리창을 콩콩 두들겼다. 내려다보니 은미였다.


"왜?"

"창문 열어 봐 봐"


은미는 작고 하얀 종이쪽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나 가고 나면 봐라~"


새하얗게 웃으며 그 애는 총총히 사라졌다. 버스는 출발했고 나는 쪽지를 펼쳤다. 그리고 그 애가 남긴 글을 읽고 덜컹거리는 버스에서 펑펑 울었다. 옆자리, 앞에 앉은 사람들이 나를 힐끔 거렸다. 쪽지에는 이런 내용과 함께 꼬깃한 5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이 들어 있었다.


"OO아. 요즘 너 너무 힘들어 보여. 얼마 안 되지만 이걸로 맛있는 거 사 먹고 힘내. 내일 학교에서 보자"


이 쪽지 한 줄은 평생 내 마음에 남았다.

내가 정말 힘들 때 나에게 힘을 나누어준 친구의 따뜻한 마음이 나는 잊혀지지 않았다. 친구는 본인의 선행을 잊었지만 나는 잊지 않았다. 너무도 따뜻해서, 눈물 나게 고마워서,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예뻐서 두고두고 기억되었다.


은미는 나에게 그런 친구였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봄날의 햇살 같은 친구였다. 드라마 속 우영우가 동료 변호사 수연에게 했던 말. 이 표현이 은미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제일 적절한 단어였다. 내가 제일 힘들 때 나에게 손을 내밀어준 친구.


지금 은미는 호주 에들레이드에서 귀여운 아들 셋과 넷째 아들 같은 남편과 알콩달콩 잘 살고 있다. 비행기 12시간 거리에 있는 친구이지만 내 마음속엔 언제나 고등학교 시절 그 봄날의 햇살 같은 친구로 간직되어 있다.


기억이란 건 참으로 신기하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때의 감정이, 그날의 대화가, 버스의 덜컹 거림까지도 모두 기억이 난다는 것이.


아이 하나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나를 키운 수많은 사람들 중 내 친구 은미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epilogue

디어 마이 프렌드, 은미야

그때 나의 삶은 무척이나 시렸는데 너를 만나 참 따뜻하고 포근했어. 정말 고마웠어.


그리고 네가 빌려가 입고 망가뜨린 내 핑크색 비즈 달린 가디건 기억하니? 너 아직도 배상 안 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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