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편지
옛날 아주 옛날 바닷가 어느 왕국에
내게도 첫사랑이 있었다.
첫사랑이란 대부분의 경우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첫사랑은 아쉽고 잊히지 않고 항상 아름답게 가슴속에 남아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첫사랑은 제대로 시작도 못 해보고 스러져버린 소꿉장난 같은 사랑이었다.
내 첫사랑의 소녀는 대학동창이었다. 까까머리 고등학생 신분을 막 벗어난 대학 신입생 앞에 나타난 같은 과 여학생들은 누구 하나 예뻐 보이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내 소녀는 그중 예뻤다. 우리 과(科)의 신입생은 모두 스무 명이었는데 그중 여덟 명이 여학생이었다. 그 여덟 명 중 내 소녀는 가장 예쁠 뿐 아니라 부잣집 외동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당시 법조계의 아주 높은 지위에 계셨다는 사실을 안 것은 그녀와 꽤나 친해진 뒤였다. 주변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때 집안 따위를 따지기에는 나의 젊음은 너무도 순수하였다. 그녀의 젊음도 나만 못지않게 순수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둘은 급속도로 친해졌고 대학 4년 동안 대학가를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우리 둘의 사귀임은 순진 그 자체였다. 아마도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냥 자연스럽게 손을 잡은 적은 있어도 포옹 한번 한 적이 없고 그 흔한 뽀뽀 한번 한 적도 없었다. 한 번은 만원 버스를 타고 가다가 버스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두 사람의 볼이 맞닿은 적이 있었는데 둘 다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얼굴만 빨개진 채 한참 쳐다보지도 못한 적이 있었다. 그것이 우리 두 사람의 가장 진한 육체적 접촉이었다. 그녀는 내게 아름다운 그러나 연약한 보석이었다. 나는 그 보석이 깨지거나 흠이 생기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는 생각만 갖고 있었다.
어느 날 학교 앞 다방에서 같이 차를 마시고 있다가 그녀가 문득 내게 물었다. ‘시 좋아하세요?’ 그녀가 시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얼른 무척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애너벨 리(Annabel Lee: E A Poe의 시)’라는 시를 특히 좋아한다고 했다. 사실은 애너벨 리는 내가 유일하게 영어로 외우고 있던 시였다. ‘어머, 저도 그 시 정말 좋아하는데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내가 정말로 그 시를 좋아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나는 할 수 있는 만큼의 분위기를 잡으면서 ‘옛날 아주 옛날 바닷가 어느 왕국에’로 시작되는 ‘애너벨 리’를 그녀에게 영어로 읊었다. ‘좋아요, 정말 좋아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눈동자는 크고 맑았다.
대학이라는 울타리는 우리 둘에게 애너벨 리의 바닷가 왕국보다 좋은 곳이었고 그렇게 우리는 대학 4년을 같이 보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한 번도 우리의 장래라거나 아니면 결혼문제를 상의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로 생각되었고 우린 그냥 만나서 즐거웠고 같이 있을 수 있어서 기뻤다. 그렇게 4년이 지나갔고 졸업을 맞았다.
졸업을 하면서 곧장 입영통지서를 받은 내가 입영 전날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훈련 잘 받고 나오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날이 그녀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나는 다음 날 군에 입대했고 장교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면회를 온 한 친구로부터 그녀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친구의 말에 의하면 졸업 후 그녀는 부친의 명에 의하여 거의 집에 갇혀 있는 상태였다고 했다. 그리고 부모끼리 이미 이야기가 되어있었던 어느 고관 댁 아들과 거의 강제적인 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 신랑은 외무부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결혼 전에 이미 해외로 발령이 나 있는 상태였기에 두 사람은 결혼 후 곧장 외국으로 나갔다고 했다. 아 그때의 참담한 심정이라니…… 나는 탈영하고 싶은 욕구를 겨우 억제하며 그 비극적인 소식을 잊기 위하여 아니 극복하기 위하여 절망적으로 훈련에 임하였다. 그 지옥 같은 훈련을 견디기 어려울 때마다 나는 ‘애너벨 리’의 한 구절을 중얼거리며 견뎌냈다. ‘그렇게 명문가 그녀의 친척들은 그녀를 내게서 빼앗아갔지. 바닷가 왕국 무덤 속에 가두기 위해.’ 땅바닥을 기면서 비인간적인 훈련을 받으면서 나는 그녀가 ‘무덤 속에, 강제결혼이라는 무덤 속’에 갇힌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훈련을 마치고 나는 장교로 군 복무를 하였고 제대를 하였고 사회에 나왔다. 그동안 수시로 그녀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아무도 그녀가 있는 곳을 정확히 몰랐다. 나는 그녀를 잊기로 했다. 우리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고 그냥 소꿉장난이었다고 체념하고 또 체념했다. 그리고 결혼을 했다. 아내는 첫사랑의 그녀 못지않게 예쁘다. 그리고 나는 아내를 너무도 사랑한다. 아내도 나를 사랑한다. 우리의 결혼생활은 예나 지금이나 너무도 행복하다. 그런데도 참 첫사랑의 감정은 너무도 여리게 그리고 깊게 마음속에 새겨져 있나 보다. 어쩌면 흰 도화지에 잘못 떨어진 물감처럼 엷게 번져나가면서 결코 지워지지 않나 보다. 그녀를 잊었다고 이제는 완전히 잊었다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지만, 그녀는 때를 가리지 않고 내 마음속에 내 감정 속에 나타났다. 꿈속에서 나타난 그녀와 그 옛날처럼 돌아다니다 소스라쳐 놀라 깼을 때 옆에 있는 아내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을 가진 적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어느 날 아침엔 아내가 ‘당신은 자면서도 시를 외우세요? 그것도 영어로?’하고 물었을 땐 난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아마도 또 ‘애너벨 리’를 꿈속에 외웠던 모양이다. 꿈에서뿐만이 아니다. 한가로운 시간에 멍하니 앉아 있을 때 그녀는 어느덧 슬며시 내 몽상의 뒤안길에 나타나 까르르 그 맑은 웃음소리로 나를 놀라게 만드는 것이 다반사였다.
큰딸이 결혼을 해서 서울에 자리를 잡은 뒤엔 딸과 손주들도 만날 겸 매년 가을엔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렇게 매년 한 번씩 한국으로 가을 나들이를 하는 것이 벌써 십 년이 넘었다. 가면 꼭 대학동창들을 만나곤 했다. 이제 곧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가 됐지만 동창 모임은 그런대로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동창 모임에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고 동창들 사이에서도 그녀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였다. 학창 시절에 그녀와 친했었던 여자 동창들마저도 그녀의 소식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했다. 단지 확인되지 못한 소식에 의하면 그녀는 아직도 어딘가 외국에 살고 있고 어쩌다 한국에 들어와도 가족들만 만나보고 다시 급히 나갔다고 했다. 우리 모두에게 그녀는 잊혀져 가고 있었고 나마저도 이제 그녀를 한번 만나볼 기대를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재작년 가을이었다. 해마다 내가 한국에 가면 동창들을 불러 모아 모임을 주선하는 친구 Y는 그 해 모임 때에 나를 보며 ‘그래도 자네가 와야 이렇게 한 번씩 만나곤 해. 그렇지 않으면 잘 못 만나. 특히 여학생들은 이때에나 한번 만나지,’하며 웃었다. ‘아, 그래. 우리 나이에 아직도 여학생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니 참 재미있네,’라고 그의 말을 받으면서 나는 ‘그런데 아직도 윤아 씨 소식은 없나?’’하며 그냥 어쩌다 생각난 듯 물었다. 윤아는 내 소녀 이름이었다. ‘아, 윤아 씨. 글쎄 말이야. 누군가에 의하면 얼마 전에 한국에 들어왔다는 말도 있는데 아직 아무도 본 사람은 없는 것 같아,’하고 나와 그녀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친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 들어온 건 확실한가? 그런데 왜 아무도 본 사람이 없지. 그것 참 이상하군,’하며 나는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말했지만 그때 이미 나는 나도 모르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써야 했다. 동창모임에서 헤어진 후 나는 내가 알아볼 수 있는 모든 통로를 다 동원해 그녀의 근황을 알아내려 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이 뉴질랜드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리고 작년 가을이었다. 예년처럼 한국을 방문한 뒤 며칠이 지난 후 친구 Y에게 전화를 했더니 ‘아 드디어 오셨나? 그럼 또 모여야겠군. 그런데 윤아 씨 소식 들었나? 드디어 나타났네. 아마도 이번 모임에선 볼 수 있을 걸세,’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무엇에 한 대 맞은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나는 ‘아, 그래. 그거 잘됐군. 그럼 시간하고 장소 정해지면 알려주게,’하고 가능한 담담하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은 뒤 나는 거실 의자에 주저앉아 한참 동안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 거의 탈진을 한 것 같았다. 머릿속에선 지나간 오십 년 가까운 세월이 거꾸로 흐르고 있었다. 그동안 잊으려고 애를 썼던 여러 가지 추억들이 다시 생생하게 살아나서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윤아가 왔다니. 윤아를 만날 수 있다니, 어떻게 만나야지. 무슨 말을 해야 하지,’하고 가끔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런 상태는 그다음 날 친구 Y에게서 모임의 날짜와 장소가 정해졌다는 전화가 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내가 묻기도 전에 Y는 윤아도 나올 것이라는 말을 다시 확인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날 모임의 날까지 불과 닷새 동안이 왜 그렇게 길었는지 모른다. 하루하루를 가능한 바쁜 일들을 만들어가며 보냈지만 그 닷새 동안 나는 열병을 앓는 사람 같았다. 나는 어느덧 오십 년 전의 대학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나의 소녀와 더불어 대학가 곳곳을 휩쓸었다. 강의실에서 교정으로 학교 앞 다방에서 대학로로. 머릿속에서 계절이 바뀌고 있었고 바뀌는 계절 따라 추억이 뒤섞여서 마음을 사로잡았다. 세월과 더불어 나의 소녀도 나이가 들었겠지만 내 마음속의 소녀는 오십 년 전의 소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나이도 잊고 있었다.
드디어 모임의 날이 왔다. 나는 비록 여행 중이었지만 할 수 있는 만큼의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집을 나섰다. 장소는 광화문 호텔이었고 12시에 모여 점심 식사를 같이 하기로 되어있었다. 나는 지하철을 타고 시청역에서 내려걸었다. 10월 말 서울의 날씨는 청명했고 보도 곳곳엔 낙엽이 구르고 있었다. 한걸음 한걸음 걸으면서 나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드디어 호텔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19층에서 내려 식당으로 들어갔다.
‘여어, 어서 오시게,’하며 먼저 와있던 남자 동창 몇 명이 나를 맞았다. Y도 이미 와있었다. 언제 왔나 잘 지내지 하는 인사말을 그들과 주고받으며 나는 곁눈으로 주변을 살폈지만 아직 여자 동창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마음이 변해 안 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떨구며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을 때 Y가 입구 쪽을 보며 손을 번쩍 들었다. ‘어서들 오시오. 이쪽입니다,’하고 그가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 쪽을 향했다. 세 명의 여자 동창들이 들어오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 그녀가 있었다. 한눈에 들어오는 그녀는, 나의 소녀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반백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어도 세월은 나의 소녀를 감히 범접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예나 변함없는 그녀의 크고 맑은 눈이 흔들림 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것을. 나가서 그녀를 맞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발이 바닥에 붙어버린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친구들과 같이 걸어 들어왔다. 입구에서 우리들의 자리까지 그녀가 걸어오는 시간은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와 그녀는 허공에서 만난 서로의 눈길을 통해 반백 년 떨어져 있던 시간의 벽을 헐어버렸다.
윤아 씨 오랜만입니다, 언제 귀국하셨어요, 어떻게 그렇게 오래 소식이 없을 수 있었습니까, 이제 완전히 들어오신 건가요 하는 질문들이 동창들 모두에게서 오늘 처음 나타난 그녀에게 집중적으로 쏟아졌고 그녀는 그 모든 질문에 아주 담담하게 글쎄 그렇게 됐습니다, 세월이 참 빠르네요, 이젠 한국에 있을 겁니다 하고 아주 조용하고 차분한 어조로 대답을 하였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자, 자, 다들 앉읍시다. 식사하면서 서서히 이야기를 나눕시다,’ 하고 Y가 모두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앉다가 보니 그녀는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게 되었다. 종업원이 와서 주문을 받아갔고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비로소 동창들은 주변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오랜만이에요,’하고 비로소 나는 옆자리의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하마터면 나는 ‘오랜만이야, 윤아,’라고 말할 뻔했다. 며칠 전부터 마음이 온통 오십 년 전으로 돌아가 있던 나는 그때 바로 옆에 앉아있는 그녀를 의식하며 더욱더 추억 속의 시간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내 옆의 그녀가 이제는 나의 소녀가 아니고 누군가의 부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환기시켰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그녀는 ‘네,’하고 대답하며 엷은 미소를 보내왔다. 그런 뒤 말을 잇지 못하는 나에게 ‘뉴질랜드에 사신다고 들었어요. 거긴 참 아름다운 곳이지요,’하고 대화의 물꼬를 터주었다. ‘아니 어떻게 알았어요? 나는 윤아 씨가 어디 살다 오셨는지도 잘 모르는데요,’하고 내가 말하자 그녀는 ‘친구들에게 들었어요,’하고 대답하며 환하게 웃었다. 아 그 웃음, 그 맑고 환한 웃음은 다시금 나를 옛날 그 옛날로 데리고 들어갔다. 못 견디게 돌아가고 싶은 그 옛날로.
그때부터 우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주문한 식사가 나와 우리들 앞에 놓였지만 우리는 식사보다 이야기에 열중했다. 그런 우리를 지켜보았는지 다른 동창들이 밥 좀 먹으면서 이야기하라고 채근했을 때 우린 잠깐 수저를 들다가 다시 이런저런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서로의 가정 이야기는 가능한 하지 않았지만 나이가 나이인 만큼 손주 이야기는 잠깐 했다. 내가 외손자가 금년에 중학교에 들어갔다고 하자 그녀는 손녀가 둘인데 모두 초등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윤아 씨 닮았으면 예쁘겠네요,’라고 말하자 그녀는 다시 환하게 웃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꼭 물어보고 싶었던 그러나 묻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질문을 하고 말았다. ‘행복하세요?’ 뜻밖의 나의 질문에 그녀의 표정이 잠깐 굳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잠시 후 담담히 말했다. ‘세월이 참 많이 흘렀어요. 세월 따라 이런 일 저런 일이 많았었지요. 그 세월은 모두 흘러갔지만 지금 제가 여기 있다는 게 그냥 감사해요,’라고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런 침묵을 깨기 위해서인지 그녀가 문득 나에게 ‘지금도 애너벨 리 외우세요?’하고 물었다. 그 한마디 질문에 나는 지나간 오십 년의 세월이 모두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아쉬움, 연민, 애틋함,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녀를 향해 품었던 나의 모든 감정도 함께 몰려왔다. ‘애너벨 리요,’하고 되물으면서 나는 나의 감정을 억눌렀다. 대답 대신 그녀가 예전과 다름없는 크고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그윽한 눈길 속에서 나는 다시 그 오랜 세월 동안 응축되었던 나의 모든 감정이 스르르 녹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세월도 사라졌고 서럽도록 안타깝던 감정도 모두 사라졌다. ‘그럼요. 잊을 수가 있나요? 지금도 외우지요. 외워볼까요?’하고 내가 정색을 하자 그녀가 ‘아니요, 나중에요,’하면서 두 손을 들어 나를 막는 시늉을 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어머 얘 밥 다 식겠다. 어쩌면 그렇게 밥을 안 먹니? 두 사람 다 마치 옛날 학창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라고 앞자리의 여자 동창 하나가 큰 소리로 우리를 향해 말했을 때 우린 비로소 모든 친구들이 우리를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 알았어요. 이제 먹지요. 오늘따라 왜 밥 생각이 별로 없는지,’하고 내가 계면쩍게 대신 대답하곤 수저를 들었다. 그녀도 따라서 수저를 들었다. 그렇지만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시간은 흘렀고 어느새 헤어질 때가 되었다. 언제 뉴질랜드로 돌아가느냐고 묻는 동창들에게 나는 11월 중순에 간다고 말했고 그럼 또 내년에 보자고 인사말을 주고받았다.
식당에서 나와 헤어지기 전 남자 동창들과 악수를 하며 내년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그녀도 다른 여자 동창 두 사람과 같이 내게로 와서 인사를 했다. 식탁의 내 옆자리에 앉아있었을 때엔 그 옛날의 내 소녀였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19층을 내려와 1층의 로비에 내려선 지금 그녀는 엄연한 남의 아내였다. 마치 19층을 내려오는 동안 다시 오십 년의 세월이 지나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하지만 ‘안녕히 가세요, 다음에 뵙지요.’하고 돌아서는 그녀를 나는 그냥 보낼 수 없었다. ‘잠깐만요, 윤아 씨,’하고 나는 그녀를 불렀고 그녀는 발을 멈추고 돌아섰다. 다른 여자 동창 둘은 못 들은 척 계속 걸어 나갔다.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는 그녀에게 나는 ‘이메일 주소 좀 알려주시겠어요? 가끔 뉴질랜드 소식 전해드리고 싶어서요,’하고 말했다. 아, 그 말이 내가 오십 년 만에 만났다 헤어지는 내 소녀에게 할 수 있는 부탁의 말의 전부였다. 남과 여, 남의 아내와 남의 남편,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인습과 사람들의 눈길, 이 모든 것들이 합하여 나와 그녀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나 오십 년 전의 우리의 사귀임이 그렇게 순진하였듯 다시 만난 그날의 우리의 감정도 예전처럼 순진하기만 하였다. 그냥 다시 만나서 반가웠고 기뻤다. 다른 그 이상의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그냥 그대로 헤어지기엔 무언가가 너무도 미진하였다. 그래서 내게 순간 떠오른 생각이 이메일로 가끔 편지를 쓸 수 있으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아주 부드러운 미소였다. 그리곤 조용히 핸드백을 열고 펜과 메모지를 꺼내 적더니 내게 주었다. ‘안녕히 가세요. 만나 봬서 반가웠어요,’하고 그녀는 공손히 인사하고 저만치서 기다리는 친구들을 향해 걸어 나갔다. 아주 조용한 발걸음이었다.
그녀와 만나고 난 뒤에도 난 한국에서 한 달 이상 머물다가 뉴질랜드로 돌아왔다. 인생 칠십이 넘은 가슴속에도 사춘기 소년 못지않은 애틋함과 설렘이 남아있다는 것을 나는 작년 가을 그녀를 만난 뒤 깨달았다. 머릿속에선 추억이 소용돌이치고 가슴속에선 열정이 되살아나 뉴질랜드로 돌아오기 전 나는 대학시절 그녀와 같이 돌아다녔던 모든 곳을 혼자서 다시 찾았다. 그중에서도 제일 시간을 많이 보냈던 곳은 옛날 문리대(文理大) 자리였다. 동숭동 대학로를 이리저리 걷다가 교정 안으로 들어갔다. 강의실도 연구실도 모두 사라졌지만 마로니에 나무는 그대로 서있었다. 한참이나 마로니에 밑의 벤치에 앉아 활기차게 쌍쌍이 돌아다니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옛 생각을 했다. 조금 있다 나와서 늦가을 싸늘한 바람을 가슴으로 받아내며 길 건너 맞은편에 아직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남아있는 ‘학림(學林) 다방에 들려 커피 한잔을 마셨다. 따뜻한 커피 잔을 들고 그 옛날 그녀에게 들려주었던 ‘애너벨 리’를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바닷가 어느 왕국에 애너벨 리라는 이름의 소녀가 살고 있었지요. 그 소녀는 나를 사랑하고 내게 사랑받는 것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살았답니다.’ 커피 잔이 싸늘하게 식었을 때 나는 다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옛날 수업이 끝나고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느라고 수백 번 걸었던 대학로를 혼자 걸어 종로 5가까지 갔다. 플라타너스 커다란 잎사귀들이 길바닥을 구르고 있었고 머리 위로는 서서히 어둠이 내려오고 있었다.
뉴질랜드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그녀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지난번 만나서 반가웠다는 이야기, 그리고 뉴질랜드에 잘 돌아왔다는 간단한 안부편지였다. 편지를 보내면서 나는 과연 이메일이 잘 들어갈까 그녀가 받아보고 답신을 할까 하는 약간의 조바심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이제는 남의 부인인데 대학동창이라는 자격만으로 편지를 보내도 되는 것일까 하는 일말의 도덕적 거리낌도 조금은 느꼈다. 그러나 편지를 보낸 지 몇 시간 뒤에 그녀로부터 간단한 답신이 왔다. 그녀도 나를 만나서 반가웠다며 평안한 나라 뉴질랜드에서 행복한 매일을 보내시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녀가 답신을 보냈다는 사실이 내게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나는 이제 계속해서 편지를 써도 되겠다는 확신을 얻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은 그녀에게 편지를 쓰자고 마음속으로 작정하였다.
청마(靑馬) 유치환은 정운(丁芸) 이영도에게 매일같이 편지를 썼다는데 정운은 남편이 없는 몸이었으니 매일 편지를 써도 괜찮았겠지만 윤아는 남편이 있는 몸이니 한 달에 한 번만 쓰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나 혼자 결정했다. 정운에게 쓴 청마의 편지가 곧 시가 되고 문학이 되었듯 나도 윤아에게 편지를 쓰면서 진솔한 삶을 이야기하면 우리의 편지도 훗날 무엇인가가 되어있지 않을까 하는 멋대로의 망상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매달 달이 바뀌면 첫날에 그녀에게 메일을 보냈다. 한 달 동안 내가 읽었던 책과 들었던 음악 그리고 뉴질랜드 소식을 섞어 하나의 글로 빚어 그녀에게 보냈다. 그녀는 매번 답신을 보냈다. 짧지만 정중하게 그리고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는 답신이었다. 그녀의 답신에 힘을 얻어 나는 더욱 정성을 다하여 매달 첫날에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쓰기 위하여 책을 더욱 읽었고 음악도 더 유의해서 들었고 그러다 보니 글을 쓰는 시간도 더 늘게 되었다. 매달 초하루가 기다려졌다.
그렇게 메일로 편지를 보내기 어언 반년이 지났다. 한 달에 한번 보내는 편지지만 그 편지로 나의 삶의 전형까지 바뀌는 것 같아 어느 땐 나 스스로가 놀라곤 했다. 책을 읽어도 그녀의 취향에 맞춰 읽는 것 같았고 음악을 들어도 그 옛날 같이 들었던 음악 위주로 듣는 것 같았다. ‘요새는 거의 같은 종류의 음악만 들으시나 봐요,’라고 어느 날 내 서재에 올라왔던 아내가 무심결에 하는 말을 듣고 나는 가슴이 뜨끔하였다. 그리고 그날 나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나는 아내를 지극히 사랑한다. 아마 세상에 그 누구보다도 아내를 아끼고 사랑하는 남편이 나일 것이라고 자부할 만큼 나는 아내를 사랑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윤아에 대한 나의 감정에 대해서는 내 나름의 변명을 갖고 있었다. 윤아와의 일은 아내를 만나기 전이었고 그녀를 생각하고 애틋한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은 내 이성이 어찌할 수 없는 가슴의 문제이니 내가 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날 아내가 내게 무심코 던진 말은 나를 아프게 했다. 더더욱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바라보던 아내의 순진하기 짝이 없는 커다란 눈동자가 떠오를 때엔 나 스스로를 향하는 죄의식까지 느꼈다. 요새들 흔히 말하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 바로 나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 나의 마음이 그녀에게까지 전해졌던 것일까? 지난 5월에 일곱 번째의 편지를 보낸 뒤 그녀로부터 답신이 없었다. 보통은 이메일을 보낸 지 서너 시간 안에 답신이 오곤 했는데 그날은 하루 종일 답신이 오지 않았다. 조바심도 나고 이상한 마음도 생겨 한 시간에도 몇 번씩 메일을 확인했지만 답신은 없었다.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여전히 답신이 없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그녀가 내 메일을 무시했을 리는 없고 어디가 아프거나 아니면 어딘가 여행 중이라 메일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애써 마음을 위로했다. 그러면서 빨리 달이 바뀌어 다시 그녀에게 편지를 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5월의 마지막 주가 되자 며칠 동안 편지를 준비했다가 6월 1일이 되는 아침에 다시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초조하게 몇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여전히 답신이 없었다. 정말 어디가 많이 아픈 것일까? 아니면 무슨 심경에 변화가 있는 것일까?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며 이런저런 추측을 하며 나는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답신을 기다렸다. 그러나 여전히 답신이 오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 답신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1주일이 지나도 답신이 오지 않자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녀는 더 이상 나의 소녀가 아니었다. 나이가 들었어도 어엿한 남의 아내였다. 동창모임에서 만나 그 옛날 학창 시절로 돌아갔을 때엔 소년 소녀의 애틋한 마음으로 되돌아갈 수 있어도 그리고 그 순진한 마음의 연장선상에서 몇 번의 편지를 주고받을 수는 있어도 계속되는 편지는 마음의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나의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듯 그녀도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그때까지 답신이 안 온 것에 대한 조바심과 불안감이 거꾸로 그녀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으로 바뀌었다. 얼마나 마음 부담이 되었을까? 나의 철없는 편지를 박절하게 거절하기도 힘들었겠지만 그 고운 심성에 남편에게 죄스러운 마음으로 얼마나 부담이 되었을까 생각하니 내가 미워졌다. 나는 참 얼마나 이기적이고 철없는 인간인가 하는 죄책감으로 가슴이 아팠다. 그러자 아내에게 미안한 감정마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아 나와 나를 질책했다. 이제는 정리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되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편지를 쓰자. 그래서 내 소녀를 놓아주자. 오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리고 또 앞으로도 그 아름답던 시절의 순전한 감정을 내가 간직하고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극한 행복이다. 하지만 나의 이기적인 생각으로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두 여인-첫사랑 나의 소녀와 내 사랑하는 아내-에게 조금이라도 부담을 주거나 마음의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아주 마음이 평안해졌다. 그날부터는 하루에 몇 번씩 메일을 확인하는 버릇도 없어졌다. 아내의 얼굴도 더 자신 있게 대할 수 있었다. 평생 나만 믿고 바라보는 아내의 순진한 얼굴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미안하오 용서하오를 몇 번이나 외쳤는지 모른다. 그리고 달이 바뀌어 7월 1일이 되었을 때 나는 컴퓨터를 켜고 담담하게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 제목을 마지막 편지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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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신지요? 한국엔 태풍이 몰려들고 비가 많이 온다고 들었는데 별고 없으시기 바랍니다.
이곳 남국의 작은 나라엔 겨울이 한창입니다. 한국과는 달리 겨울에 비가 자주 오기에 지난 유월은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이 많은 한 달이었습니다. 벌써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갔다는 허허로움을 가슴에 안고 맞는 칠월의 첫날인 오늘도 하늘에서 빗방울이 간헐적으로 쏟아져 내립니다.
오늘 주일 오후 교회에 다녀와서 이번 주 음악회에서 들을 음악을 고르다가 문득 옛 친구 생각이 나서 다시 편지를 씁니다. 지나간 달들에 두어 차례 소식을 드렸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어 아무래도 편지 쓰기를 그만두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그냥 학창 시절의 옛 친구에게 소식 좀 전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었지만 받으시는 분에겐 부담이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 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입니다.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라며 고희(古稀)를 넘겼어도 아직도 소년처럼 철이 없는 옛 친구의 아주 순수한 마음의 발로였다고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유종의 미를 거두는 마음으로 오늘 마지막 편지를 씁니다.
지난 한 달 저희 집에서 열리는 작은 음악회에서는 브람스와 슈베르트를 들었습니다. 화요일 저녁이면 저희 집으로 찾아드는 동호인들과 같이 두 음악가의 생애를 이야기하고 음악을 들으며 겨울 저녁의 권태를 같이 녹여냈습니다. 오늘 골라든 브람스의 음악은 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입니다. 지금 턴테이블에서는 레코드판이 돌아가고 있고 막 2악장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십 대의 브람스가 이 곡을 작곡하며 마음속으로 연모하는 클라라에게 편지를 하여 ‘지금 당신의 아름다운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데, 그것은 아다지오가 될 것입니다,”라고 썼는데 그 아다지오 악장이 바로 이 2악장입니다.
명상적이며 어쩌면 종교적이기도 한 이 아다지오 악장을 들으며 저는 다정다감했지만 평생을 고독하게 살았던 브람스의 클라라에 대한 깊은 사랑을 생각합니다. 스승 슈만이 죽은 뒤 평생을 클라라를 지키며 살아가다 클라라가 죽자 그 이듬해 이제는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그녀를 좇아 세상을 떠나간 브람스의 삶을 저는 그의 음악만큼이나 좋아합니다. 14년이나 연상이고 아이를 일곱씩이나 낳은 여인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었던 브람스의 사랑은 단순한 이성(異性)의 사랑을 뛰어넘는 지고한 순수의 마음입니다. 그는 평생 클라라를 생각하며 작곡을 했고 또 그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를 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저는 참으로 순수한 영혼의 교감이 흐르는 아름다운 편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클라라에게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남편 슈만이 있었지만 남편의 생전에도 또 사후에도 그녀는 브람스의 순수한 마음을 받아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오늘날까지도 브람스와 클라라의 이야기는 동화처럼 아름답게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메아리칩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편지가 쓰고 싶었습니다. 아마도 브람스의 흉내를 내고 싶어 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지난해 동창모임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윤아 씨를 보았을 때 문득 내 편지를 받아줄 수도 있을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옛날 우리의 첫 만남으로부터 오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살다가 고국에 돌아가면 지나간 세월과 변해버린 처지는 생각지 못하고 다시 그 옛날 학창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가버리곤 하는 제 습벽 때문일 것입니다.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지난 몇 달 동안 즐거웠습니다. 누군가 편지를 쓸 대상이 생겼다는 것이 기뻤고 자주는 아니었지만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속으로 동숭동 대학로를 온통 휘젓고 돌아다니며 오십 년 전 소년의 마음을 회복할 수 있었으니 참으로 즐거웠습니다. 또 그러다 보니 글을 쓸 마음도 더 생겨 이런저런 글도 더 쓰고 이곳 교민사회에서의 활동도 더 적극적으로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런 계기를 만들어주신 윤아 씨에게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제 편지가 부담을 드렸다면 다시 한번 머리 숙여 사과드립니다.
작년 12월 예술의 전당에서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의 그림 전시회가 열려서 가서 보았습니다. 몽환적일 만큼 아름다운 수채화를 그려낸 이 여인은 시인이기도 할 만큼 재능이 많은 여인이었지만 그녀의 삶에도 슬픔과 질곡은 있었습니다. 그 유명한 ‘미라보 다리’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녀는 진통제(Le Calmant)라는 그녀의 시(詩) 마지막 구절에서 ‘죽은 여인보다 더욱 가여운 여인은 잊혀진 여인이다,’라고 읊습니다. 그날 전시회장을 나오며 제 가슴에 남은 것은 그녀의 수많은 아름다운 그림들이 아니라 그녀의 시 마지막 구절이었습니다.
이제 고희(古稀)를 넘겨 살아온 우리들의 추억 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넘나 듭니다. 가만히 앉아 명상에 잠길 때 저는 제 추억을 넘나드는 많은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생각해봅니다. 그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과는 보다 가까운 관계를 가지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과는 그렇지 못했기도 하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귀하게 느껴질 수가 없습니다. 이제 남은 생애에 그 많은 사람들을 다 만날 수는 없겠지만 저는 마음속으로나마 그 모든 분들에게 고마웠다는 마음의 편지를 보냅니다. 물론 그중에서도 몇몇 특별한 분들에게는 더 각별한 마음의 편지를 보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이겠지요.
마리 로랑생의 시에서처럼 저는 누구도 저에게 ‘잊혀진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고 또한 저도 누구에게 ‘잊혀진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런 저의 바람이 어릴 적 순수한 옛 친구에게 봄바람의 꽃잎처럼 가을바람의 갈잎처럼 편지가 되어 몇 통 편지함에 날아들었다고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사랑하는 남편 그리고 가족 분들과 행복한 나날 보내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윤아 씨의 남은 삶이 그 옛날 제가 알았던 소녀의 큰 눈망울 속에 아롱지던 꿈처럼 아름답기를 바랍니다. 저도 이곳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행복한 하루하루를 살아가겠습니다. 그러다가 때로는 또 애너벨 리의 한 구절을 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닷가 그 왕국에선
그녀도 어렸고 나도 어렸지만
나와 나의 애너벨 리는 사랑 이상의 사랑을 하였지
천상의 날개 달린 천사도 부러워할 그런 사랑을’
그럼 부디 안녕히
옛 소년 드림
2018.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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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편지를 써서 그녀에게 메일로 보내고 나자 나는 이제 더 편지를 쓸 수 없다는 서운한 마음에 가슴이 뭉클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해야 할 일을 했다는 개운한 마음으로 애써 감정을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편지를 보낸 지 한 시간도 안돼서 그녀에게 답신이 왔다. 내 소녀 나의 그녀는 결코 나의 마지막 편지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아 그 답신을 받은 나의 기쁨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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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편지를 받을 때마다 편지 속에 흐르는 풍부한 문학적 감성과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사시는 맑고 여유롭고 평화로운 삶이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오늘 편지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편지 보내주세요 라고 말씀드릴 수 없는 저의 심정을 이미 이해해주시고 계신 것 같아 다시 감사드립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저도 즐거웠습니다. 소녀시절의 꿈과 사랑의 마음이 새로 살아나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지난번 편지를 받고는 혼자 동숭동 대학로에 나가서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한참을 배회하다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학림(學林) 다방에 들려 차도 한잔 했답니다. 그렇지만 다방에서 나와 대학로를 걷다가 저를 스치고 지나가는 젊은이들을 보며 저는 문득 정신을 차렸습니다. 아름다운 과거는 그냥 아름다운 대로 남겨두는 편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옛날 우리들의 지순했던 사귀임은 수채화 같은 아름다움인데 세월이 무척 지난 지금 잘못 덧칠했다가는 색이 바래거나 번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두려웠습니다. 그냥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결코 지금의 제가 한 남자의 아내이기 때문이라는 부담감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이곳 한국은 늘 그래 왔듯이 모두들 정신없이 살아가는 것 같아요. 아마도 이런 게 싫어서 한국을 떠나게 되지 않으셨나 생각해 봅니다. 나이가 들었어도 아직 바쁘게 할 일이 있고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것을 보람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맡은 바 책임을 다하며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서서히 인생의 마지막 장을 정리해 가면서요. 그리고 저도 생각나면 때때로 애너벨 리의 시를 읊을 겁니다. 제가 읊을 애너벨 리는 아마도 조금은 다르겠지만요.
바닷가 그 왕국에선
소년도 어렸고 나도 어렸지만
나와 나의 소년은 사랑 이상의 사랑을 하였지
천상의 날개 달린 천사도 부러워할 그런 사랑을.
남은 삶 내내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한 나날 되시기 바랍니다~
옛 소녀드림
2018.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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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편지가! 나는 그녀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동이 왔고 읽을 때마다 행복감이 넘쳐흘렀다. 나는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아름다운 과거는 그냥 아름다운 대로 남겨두는 편이 좋을 것이라는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우리들의 사귀임이 수채화 같은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한 그녀의 맑고 순진한 마음에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지난 7월의 첫날, 나는 꿈꾸듯 하루를 보냈다. 꿈에선가 아니면 현실에선가 나는 나의 마지막 편지와 그녀의 마지막 편지가 같이 손잡고 하늘 높이 날아가 바닷가 어느 왕국에 내려앉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것은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였다.
안녕 내 소녀여, 그리고 또 안녕 나의 소년 시절이여.
2018년 7월 석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