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지 않은 기억이 오래가는 이유

중국집 우동

by 바그다드Cafe

지금 초등학교 운동회는 어떤 모습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초등학교를 다닌 90년대의 운동회는 꼭 부모님(주로 엄마)이 참석하는 행사였습니다. 볼거리, 즐길 거리가 지금처럼 풍성하지 않던 당시, 운동회는 소풍과 더불어 어린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큰 행사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운동회가 싫었습니다. 9살에 엄마가 집을 나간 뒤로는 운동회에 아버지가 오기도 했고, 어떤 때는 고모가 대신 참석했습니다.심지어 어떤 날은 아버지가 아침에 몇천 원을 쥐여 주며 미안한 얼굴로 참석하지 못함을 달래려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저는 중국집의 거의 모든 메뉴(짜장면, 짬뽕, 탕수육 등)를 좋아하지만, 딱 한 가지 싫어하는 메뉴가 있습니다. 바로 중국집 우동입니다. 다른 곳의 우동은 좋아하지만, 유독 중국집 우동만큼은 싫습니다.


제가 5학년 때쯤이었을 겁니다. 그날의 운동회에는 아버지도 고모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저와 3살 어린 동생은 부모님의 응원 없이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아버지가 동생과 저를 동네 중국집에 데려갔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운동회 때문인지 중국집의 인기 메뉴들은 재료가 소진되어 주문할 수 없었고, 남은 재료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요리가 우동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미안한 마음과 서글픔을 우동 세 그릇에 담아 우리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저는 그날 이후 중국집에서 우동을 단 한 번도 주문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중국집에서 우동이 인기 있는 메뉴는 아니지만, 저에게 중국집 우동은 서글프고 쓸쓸했던 그날의 상징으로 남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엄마의 부재, 부모님의 이혼과 관련된 아픈 기억들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저의 에너지를 갉아먹습니다.


그렇다면 왜 어렸을 때 불우했던 기억들이 지금까지도 저를 괴롭히는 걸까요?


심리학에서는 나쁜 기억이 오래 남는 현상을 ‘부정성 편향’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뇌는 본능적으로 위협이나 부정적인 경험을 더 생생하게 기억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진화했습니다. 또한, 감정적으로 강렬한 기억은 뇌의 편도체에 깊숙이 새겨져, 평생 지워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에게 그날의 우동과 운동회는 강렬한 감정적 고통과 연결된 기억이기에 오랜 세월을 지나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외에도 특정 음악이나 비 오는 날의 흙냄새처럼, 비슷한 감정적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사소한 기억의 파편들을 여전히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는 과거의 일이지만 지금의 일상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회사에서 중국집 회식을 하게 되면, 농담 삼아 저는 우동을 절대 시키지 말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웃으며 말하지만, 그 뒤에는 여전히 씁쓸한 기억이 숨어 있습니다.


또 다른 기억이 있습니다. 어느 비 오는 날, 학교에서 돌아와 텅 빈 집에 들어섰을 때 느꼈던 어둡고 싸늘한 공기와 젖은 현관 바닥의 감촉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순간의 외로움과 공허함은 비만 오면 다시금 떠올라 저를 힘들게 합니다. 그리고 가끔 TV에서 따뜻한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장면을 보면 부러움과 함께 씁쓸한 마음이 다시 올라옵니다. 그런 장면들은 저에게는 아름다운 동화 속 이야기일 뿐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이 듭니다.


최근 저는 심리학 서적에서 기억을 재구성하는 방법을 접했습니다. 과거의 기억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 기억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지는 지금의 나에게 달려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날 중국집의 우동은 아버지가 무관심했던 것이 아니라, 그 나름의 최선을 다해 자식들을 위로하려 했던 아버지의 마음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억의 재구성을 조금씩 시도하고 있습니다. 우동을 싫어하게 된 이유를 마음속에서 다시 들여다보고, 그날의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해보려고 합니다. 사실 아버지 역시 어린 저희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랐던 그 시절, 그 나름의 최선을 다했던 것이었겠죠. 그렇게 생각하니 과거의 기억들이 조금은 덜 아프게 느껴집니다.


나쁜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면, 기억이 가진 힘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의 기억을 오래도록 간직하는 이유는 약해서가 아니라, 그때의 자신을 위로하고, 조금 더 강한 나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 위함일지도 모릅니다.


저와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와 희망을 주고 싶습니다. 기억은 지우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이해하고 바라볼 때 비로소 상처에서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