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하지 않은 환경에서 자란 것과 달리, 항상 없어 보이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부족한 것이 없지만, 표현할 수 없는 ‘부족함’과 ‘허전함’을 느꼈다. 대학에 들어가니 공부는 기본이요, 잘 놀고, 사교성까지 좋은, 말 그대로 잘난 애들이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모든 점이 평균 이상처럼 보였다. 무엇이 평균인지는 몰랐지만, 그들과 최대한 비슷하게 닮아가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 덕인지 보이는 부분은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춘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취업 시장에 뛰어들자마자 다시 한없이 작아졌다. 강남의 수많은 빌딩을 보며, ‘나 하나 밥 먹고 살 곳은 있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쉽사리 도전하기가 두려웠다. 그 당시 엄마가 귀에 인을 박히도록 한 말이 기억이 아직도 난다.
"대학까지 걱정 없이 나오게 해줬는데 왜 돈을 못 버니?"
엄마는 돈이 갖는 힘과 무서움을 가르쳐 주려고 했다. 맞는 말이라 할 말은 없었지만, 만약 돈을 벌지 못한다면 나는 어떤 존재일까? 어떻게 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말은 돈을 당장 벌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이어졌다.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빨리 돈을 벌고 싶었다. 그만큼 빨리 엄마의 말에서 벗어나 안정감을 느끼고 싶었다.
강남 빌딩 숲에서
드디어 나는 외국계 홍보대행사에서 6개월간 인턴을 시작했다. 고객의 원하는 톤앤매너와 시안에 맞춰 작업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고,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그 당시 내가 맡은 제품은 유아 제품이었는데, 고객사는 아기한테 말하는 듯한 톤앤매너(말투)를 사용해 블로그를 운영하기를 원했다. 참으로 고통스러웠던 업무였다. 6개월간의 짧다면 짧은 회사 경험은 앞으로 ‘뭐 해먹고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짙게 만들었다. 어떤 방향으로 가고 싶은지, 무엇을 바라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도 그저 ‘모른다’라는 답만 돌아왔다. 그래도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아서 영어통번역를 공부를 했고, 자격증을 땄다.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이 시작했던게 끝이 나자, 다시 막막함이 찾아왔다. 어찌나 답답했던지 어렸을 때 했던 빨간펜 학습지를 풀고 싶었다. 하루 정해진 학습지를 풀고, 남은 하루를 죄책감 없이 편히 보내고 싶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막막하게 보내고 있을 때쯤 엄마는 내게 다시 물었다.
"너 언제까지 쉴거니?"
다시 빨리 일하라는 신호였다. 엄마에게 생활비를 빌려 쓰고 있었기에 빨리 일자리 구하겠다고 재빨리 대답 했다. 그날 밤 나는 울면서 잠에 들었다. 너무 억울해서 눈물이 났다. 나는 ‘쉰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루하루가 일했던 만큼이나 피로했는데 그저 쉰 것으로 비춰졌다고 생각들자 이젠 이렇게 저렇게 살아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만 번다면 말이다.
그때 친척 언니가 우리 집에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중국 무역 회사를 소개해 주었다. 내가 중국어학과에 나왔으니, 배운 언어를 활용해보라 권했다. 그렇게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회사엔 줄담배를 물고 있는 사장이 있었고, 내게 파일함에 이름표를 붙이는 일을 시켰던 부장이 있었다. 누구도 특별히 내게 업무 지시를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 시간은 거북이 걸음보다 느렸다. 몸은 사무실에 있었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애써 일거리를 찾으려는 내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회사에 일이 없으니,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월급이 나오니 버텨야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긴 출퇴근에 지쳐서일까? 할 것도 없는데 할 것을 억지로 만들려고 해서일까? 심한 몸살이 시작되고 지독한 독감을 앓았다. 며칠을 잠만 자며, 이렇게 아플 수도 있는 것임을 생전 처음 경험했다. 그래도 월급이 나오니, 빨리 나아서 회사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3개월 정도 지나자 더 이상 월급이 나오지 않았다. 곧 준다는 말만 믿었다. 강제 저축한다는 기분으로 4개월이나 기다렸으나 결국 돈을 받지 못했다. 알고 보니 페이크로 만든 회사, 사장은 회삿돈을 가지고 해외로 도망갔다. 몸은 아픈데, 돈까지 받지 못했다.
엄마는 ‘사기당하고, 돈도 못 벌고 아픈 나’ 를 보며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라는 생각을 했다. 엄마는 나를 걱정했지만, 받지 못한 월급 때문에 또 엄마에게 생활비를 빌려야하는 상황이 비참했다. 기껏 키워놨더니 별 볼 일 없다고 부모님이 생각할까 봐 걱정됐다. 하지만 이렇게 느껴봤자, 아픈 내가 할 수 있는 건 누워서 생각하는 것밖에 없었다.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나의 마음은 누군갈 ‘탓’하는 것으로 향했다. 밥벌이를 못 하면 신경질 냈던 엄마 탓하기, 그 회사를 소개한 친척 언니 탓하기, 도망간 사장 탓하기 이 사이클이 계속 반복됐다. 괴로웠지만 탓하지 않으면 견디기가 힘들었다. 탓하는 것도 감정 노동이었다. 그것조차 이제 힘들어서 못 하겠다 느꼈을 때 나의 상태는 바닥을 찍었다. 멍해졌다.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들지 않았다. 거울 속 지치고, 슬픈 내 눈을 보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실컷 울면서 내게 미안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돈을 벌어 엄마의 잔소리에 벗어난다는 이유로 나를 내팽겨 쳤다. 나에게 솔직하지 못했음 내 눈이 말하고 있었다. 엄마에겐 원하는 일을 찾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말도 하지 못했다. 말할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내 마음 속 깊이는 나를 팽겨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힘든 일만 피해서 돈만 벌 수 있으면 되지 뭐’
이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읆조리고 있었다. 원하는 것을 말하고, 꿈을 만들면, 이뤄내지 못했을 때 실망할 내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다. 돈 벌라는 엄마의 등떠밂에 나는 나의 진짜 마음을 숨겼다. 사실은 인정하고 아니 발가 벗겨진 기분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상황은 변한 것이 없었지만 거울 속 내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미래에 내가 어떤 모습이 되길 원하든, 우선 현재 상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알 수 없었던 나의 시선이 지금이라는 순간에 멈춰 섰음을 느꼈다. 그리고 나의 눈빛은 내게 무엇을 원하든 지금 여기서 출발하자고 말하고 있었다.
원하는 것을 이뤄내지 못할까 봐 드는 두려움을 돈을 빨리 벌어야한다는 불안감으로 덮으려 했다.
하나의 불안을 보지 않기 위해 다른 불안을 내게 주었다. 이제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했다. 악순환의 고리 끊기는 거울 보기로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거울 속 나의 눈빛을 보았다. 현재에 발을 딛고, 나를 마주겠다는 초롱초롱한 눈빛이 보였다.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기분이다. 원하는 모습이 강렬할수록 지금을 잘 살아내겠다는 마음이 생겨났다.
더 이상 나는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 흐름에 맞춰 물 흘러가듯 사는 것과 다르게 이는 나의 인생을 방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내 인생이지만 남의 인생처럼 사는 것과 같다.
지금 나의 인생을 나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솔직하게 답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괜찮다. 우여곡절 끝에 내게 던젔던 그 질문이, 매일 아침 나의 눈빛을 보게 만든 것처럼 이 질문을 놓지 않고 스스로에게 던진다면 그대도 그대만이 느낄 수 있는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