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동안 고마웠어
우리는 양가의 지원 없이 남편과 내가 가진 돈으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결혼준비를 하는 동안 우리가 회사생활을 적게 한 것도 아니고 서른이 넘어하는 결혼인데도 나와 그의 수중에 이렇게 돈이 없다는 게 어이가 없으면서도 이런 걸로 싸운다는 사실에 슬프기도 했다. 우리의 돈으로 신혼집을 구한다면 어디든 있긴 있겠지만, 주변 친구들과 친척들의 결혼을 보고 나니 한숨만 늘었다. 결혼할 때는 평소보다 비교하는 심리가 예민하게 작동하기에 시댁에서 집을 마련해 줬다더라 결혼하면서 뭘 받았다더라.. 그런 소식이 필요 이상으로 잘 들린다.
그런 우리에게 감사하게도 남편의 사택이 제공되었다. 무주택자에 한 해 부산, 김해에 사택을 제공해 주었는데 우리처럼 경제력이 약한 신혼부부에게는 정말 고마운 혜택이었다. 무기한으로 살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 5년이라는 제한적인 기간이었지만 5년 동안 맞벌이하면서 정신 바짝 차리고 모을 수 있으니 그게 어디냐 싶었다.
사택에서 살 수 있다는 안도감도 잠시, 신청을 하자마자 시원하게 집을 배정받는 건 아니었다. 사택수는 정해져 있고 그곳에 살고 싶은 직원은 많으니 누군가 이사를 나가야 우리가 그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결혼식 날짜는 다가오는데 집은 나오지 않고 이러다 그냥 신혼여행을 떠나면 우리는 당장 어디에 살 수 있는 건지- 초조하게 기다리던 그때, 결혼식이 3주쯤 남은 시점에 감사하게도 우리의 집을 배정받았다. 야호!
24평 복도식 아파트.
사택이니 올수리 되거나 깨끗하게 관리가 된 곳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내 돈 안 들이고 살 곳이 생겼고 둘이 살기에 이 정도면 충분했으니까.
우리의 첫 집, 사택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싸우는 일조차 없이 둘이 도란 거라며 지낸 신혼, 주말만 되면 놀러 가느라 바빴던 맞벌이 시기, 생각처럼 쉽게 아이가 찾아오지 않아 울며 보낸 시간, 드디어 딸을 만나 그 아이가 뒤집고 기어 다니고 걸어 다니는 순간까지. 남편과 나의 시작부터 첫째가 걷기 시작한 4년 동안 우리를 품어준 첫 집. 불편한 것도 물론 많았지만 그럼에도 그 집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더욱 우울하게 시작했을 테니까, 고마운 집이었다.
사택에서 살 수 있는 기간은 5년. 우리는 슬 이사를 갈 준비를 해야 했다. 진짜 우리의 첫 집을 찾아서-
집은 전부 몇 역씩 줘야 마련할 수 있던데 과연 우리가 가진 돈에 외벌이를 하는 우리가 이자를 낼 수 있는 금액의 대출을 더해서.. 그 돈으로 우리 셋이 머물 수 있는 집을 정말로 찾아야 하는 시기가 왔다.
이 동네 저 동네 핸드폰 속 지도에서 살펴보고, 직접 찾아가 보며 우리가 살 곳을 찾았다. 남편 회사에서 너무 멀지 않으면서 우리가 가진 돈에 적당한 그런 곳.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동네지만 주변에 공원도 많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 우리는 자리를 잡았다. 좋은 아파트들만 듣고 보다 보니 금액은 높아서 우리의 상황에 좌절했었다. 그런데 눈을 조금만 돌려보니 우리가 충분히 누리며 살 수 있는 곳이 많았다. 아이가 충분히 뛰어놀 수 있는 공원이 동네에 널려있는 아파트로 우리의 집을 옮겼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이가 몇 년 동안 뛰어다닐 수 있는 곳,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이곳으로 이사 올 때 첫째는 2살이었다. 그 아이는 이제 9살이 되고 그때는 셋이었던 우리가 이제 넷이 되었다. 그때는 없었던 둘째는 벌써 7살이 된다. 30대였던 우리는 40대가 되었고.. 우리의 7년이 묻힌 우리의 첫 집을 열흘 후면 떠난다.
집은 다 주인이 있다더니 1년 넘게 내놓은 집을 보러 오는 사람도 거의 없더니 어느 날 우리 집을 보러 온 부부가 보고 간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우리 집을 사겠다고 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남편과 나의 눈이 똥그래졌다. 가계약금을 받는 순간, 기분이 묘했다.
이사를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는 순간 이 집을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었고 집을 보러 오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자 여기서 몇 년 더 살아야겠다며 집을 깨끗하게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떤 날은 여길 떠나면 어디로 이사 갈지 열심히 찾아봤고, 이 아파트만큼 좋은 곳은 없다며 애정도 표하는 날도 있었다. 집을 내놓은 기간 동안 마음이 이랬다 저랬다 좋다 실다 했는데 막상 새로운 집주인이 나타나고 나니 섭섭함부터 밀려왔다.
첫 우리 집에서의 7년. 우리 네 가족의 시작을 만들었고 우리만의 이야기를 쌓아가는 시간이었다. 떠나려니 이곳에서의 기억이 자꾸만 짙어져 자꾸만 쓸고 닦고 정리하고.. 가족들에게 그리고 이 공간에 성의를 다하지 못한 것만 떠오른다.
지난 주말 집을 청소하며 곳곳에 숨겨진 짐들을 하나둘 꺼내 50리터 종량제 봉투에 정리를 했다. 몇 년 동안 그 자리에 있는 물건부터 언제부터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는 것, 20대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이제는 입을 수 없는 옷까지. "이거 버릴까?" " 응" 남편과 버릴까, 응, 두 문장으로 대화하며 많은 것들을 내다 버렸다. 버리는 물건처럼 아쉬운 마음은 털어내고 나도 이제는 새 공간에 대한 기대감만 가지고 가려한다. 이사가 며칠 남았는지 매일매일 물어보며 손꼽아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이 집에 참 고맙다. 우리를 살게 해 주었고 1층이라 아이들에게도 집 안에서 뛰어놀 수 있는 환경을 주었다. 봄이면 바로 앞에 보이는 꽃 동백과 매화 그리고 여름이면 푸르른 나뭇잎이 사람을 기분 좋게 했다. 사람들은 꺼리는 1층의 혜택을 우리는 모두 받았다.
우리 집, 이젠 안녕.
7년 동안 참 고마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