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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원 Jan 07. 2020

영화적 모먼트

 고향으로 돌아온 지 어언 일 년이 다 되었다.  그래도 한 번도 내가 다녔던 학교라거나 유년기에 살았던 동네를 찾지 않았었는데 어제는 급히 책이 필요해서 퇴근 길에 중학생 때 자주 가던 서점을 들렀다. 그 장소 그대로, 평수를 줄이거나 넓히지도 않고 그 책방은 거기 그대로 있었다. 다만 아무래도 학생들이 많이 가는 서점이라 출입문을 열면 문제집 섹션이 가장 먼저 보이는데  모의고사라던가 기출문제와 같은 단어들이 너무 생경해서,  내가 와본 적 없는 서점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책을 고르고 계산대에 선 순간, 아? 오랜만이세요! 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책방의 주인도 그대로였다. 검은 머리던 아주머니 머리가 하얗게만 변했을 뿐, 얼굴은 너무도 같아 신기함에 절로 입이 트였다. "정말 그대로세요"라고 하니, "뭐가 그대로야, 벌써 60이 다되었는데" 라고 손사래를 쳤다. "어머 아주머니, 저도 벌써 30이 다 됐어요. 중학교 때 여기 왔었는데. 하하" 그러자 내가 기억이 난다는 아주머니. 아주머니의 옛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처럼 아주머니 눈에도 중학생 때의 내가 겹쳐보이겠지. 그 순간이 내겐 영화적 모먼트였다. 내 옆에 보일 중학생 시절의 나로 나도 함께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영상으로 만든다면 더 쉬울텐데, 착착 화면이 넘어가며 어릴 적의 나로 겹쳐지는 그런 기법을 쓰고 싶었다. 그 때의 나. 그 때도 똑같이 책을 좋아하고 고민이 많았겠으나 꿈은 더 많았을 나. 그래도 그 때의 나를 그대로 기억해주는 누군가 덕분에 이제야 정말로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사실 성년이 되어 돌아온 고향은 그다지 반갑지가 않았다. 왜 가는거야? 라는 서울 친구들의 물음에 답을 쉽게 할 수 없었다. 혼자 사는 게 지쳐서, 외로워서라고 씁쓸하게 웃었지만 고향에 와 가족들 곁에 있어도 외로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가끔 드는 루저가 된 느낌도 추가됐다. 네가 결국 하다하다 안 돼서 돌아온 거구나 하는 눈빛들이 싫었다. 그래도 난 괜찮아, 이 곳 생활도 좋아라고 위안하며 고향의 지리를 새로 익혔다. 학창 시절의 나와바리는 정말 학교, 집, 할머니 집, 시내 이게 다니까. 성인이 되어 접하는 고향의 지리는 이 곳이 이렇게 넓었나 싶을 정도로 새롭고 어려웠다. 차츰 적응은 했지만 이 곳에서도 서울에서도 온전히 마음 편한 적이 없는 이방인 같은 신세로 지내는구나 하는 자조를 할 즈음 만난 글방서점 아주머니. 내가 이 곳에 받아들여지는, 그리고 이 곳을 내가 받아들이는 그런 순간. 어제 밤은 내게 정말 영화적 모먼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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