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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은 Jul 27. 2020

그까짓 컵

기획에 필요한 태도

놀라운 구석이 하나도 없을 만큼

평범해 보이는 시가 있다.


2020년 컨셉진 8월호를 읽다가

이게 시의 전문이다. 처음 읽었을 때는

‘뭐 이렇게 대충 쓴 시가 있어' 하고 말았는데

양치를 할 때도, 버스 창 밖을 볼 때도

예고 없이 불쑥 떠올랐다.


왜 하필 컵일까

왜 어렵지도 않은 방법을 풀어썼을까

왜 윤희상 시인은 이 시를 지었을까


그러니까 내 입장에서는 아마 수십 세기 동안 큰 변화 없이 꾸준히 제 모양을 유지해왔을 '그까짓 컵'을 보는 평범한 방식이 아무런 살 없이 시가 되었다는 게 분했다.


분노의 감정 속에서 피어오르는 깨달음은 누군가에게는 분명 그까짓 컵이라도 요목조목을 훑는 일이 일어나게 되고 시인은 그가 길을 잃지 않도록 다섯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섬세한 눈길로 그까짓 컵에 정성을 쏟는 이는

이제 와서 생각해보건대 기획자여야 한다.


늘 있는 컵에 주목해보고 그도 모자라 옆에서, 앞에서, 비스듬히 보라니. 단지 '아는 컵'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되지 말자는 것이다.


내 입맛에 맞게 시를 의미화하고 나니

치열했던 2017년의 여름날 기억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질문 받고  면접 마무리하겠습니다”

"그.. 기획자에게 필요한 태도는 무엇인가요?"


나는 면접을 준비하며 쉬이 답하지 못했던 질문을 역으로 그에게 물었다. 어려운 질문만 골라 묻던 PD님 덕분에 첫 면접을 시원하게 말아먹었지만

그가 남긴 대답은 야속하게도,

아주 오랫동안 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저도 PD를 15년 했지만 늘 쉽지 않았어요. 기획에 단련이 될수록 열린 마음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쉽게 판단하거나 답을 내리지 않는 마음이요."


기획을 하는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필요한 건 

컵을 다섯 가지 방법으로 바라보는 태도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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