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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홍 Jun 22. 2020

6월은 나의 달, 나의 프라이드

6월에 태어나 무작정 걸었는데 무지개를 밟고 있었네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6월은 성소수자 인권의 달이다.

오, 이 브랜드에서도 무지개 색깔 리미티드 제품이 나왔네? 그런 생각을 해보신 분들이 계시자면 더 빨리 눈치챌지도 모르겠지만 성소수자 인권을 존중하고 지지하는 의미의 무지개를 담은 제품들이 6월에는 여러 브랜드에서 나오고 있는 듯 보인다. 구글도 매년 6월에는 여러 방식으로 이 Pride Month를 축하하고 있다고 하니.


지금까지의 에세이에서 꾸준하게 써온 나의 아내는 여자이고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여자이다. 한국에서 우리 혼인의 법제화는 되어있지 않으니 공식적으로 부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첫 번째 에세이에 쓴 것처럼 결혼식도 올렸고 한 집에서 경제권을 공유하며 살며 비공식적 부부 정도는 된다고 자부하고 있다.

덕분에 세금 꼬박꼬박 내면서도 신혼부부 전세자금 대출 혜택도 못 받고 그냥 보통 사람 1+동거인 1로 전세자금 대출받고 집을 구해 살아오고 있다. 물론 그 혜택을 받았다고 한들 뭐 얼마나 대단한 신혼집을 구했으랴. 우리는 대단히 잘 사는 집안에서 태어나지도 못했고, 무엇보다 부모에게 공식적으로 신혼집 비용을 손 벌릴 수도 없다. 부모가 보기에도 우리는 부부가 아니니까.


부부란 무엇일까.

국가에서는 이성 간의 혼인을 통해 법적 인정을 득한 자들을 부부라고 말하니 나와 같은 사람은 이 국가 안에서는 공식적인 비혼 여성으로 분류되고 있을 것이다.


가끔 그런 악다구니를 보기도 한다. 여자끼리 부부라고? 아이를 출산해서 저출산에 이바지하지도 못하는 것들이 부부랍시고 인정해달라고 하다니 에잉 쯧쯧. 그런 말을 보면 우리는 여성이 두 명이기에 어떻게 보면 출생률에 이바지할 확률이 이성부부보단 더 높아질 거란 생각이 들지는 않는 것인가 싶어 의아하기도 하다. 

에잉, 남자가 없이 여자끼리 어떻게 애를 낳아서 키운담. 뭐 그렇게 말씀하실는지 모르겠으나 아이를 낳아 키우는 과정에서 남자가 기여하는 바가 그렇게 컸던가 의문이 있다. 육아는 여성의 몫이라고 대부분 밀어놓은 분들일수록 꼭 우리 같은 부부를 손가락질할 때 출산을 운운하는 것은 더욱 의문을 증폭시키는 지점이다.


부부의 정의를 출산이나 인류를 재생산하는 쪽으로만 본다면 그것은 무척 곤란한 일이 될 것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평생 이 관계를 유지하자는 책임을 가지고 약속을 통해 삶을 합쳐서 걸어 나가는 것일 뿐인데 여기에 무수한 조건을 달기 시작한다면 그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수많은 이성부부까지 전부 도마 위에 올려 부부의 조건에 맞는지 검증을 해야만 하는가. 물론 그럴 수 없다. 누구에게도 그럴 권리는 없으니까.


내가 쓰는 것은 에세이기 때문에 사실은 어떤 식으로든 설득의 글이 되는 것을 막고 싶었다. 나는 여러 번 글 속에서 그런 유혹을 뿌리쳤다. 그냥 저녁 무렵 가볍게 커피 한 잔과 호로록 읽어버릴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너무 많은 생각과 너무 많은 의문, 논쟁이 떠오르는 글은 이 에세이에서는 배제하고 싶었다. 

내 삶이 이미 너무 많은 논쟁 속에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를 수밖에 없는 모양이라 더욱 그랬다. 내 글이 조금 덜 피로해지길 바라며 나는 교묘하게 담담하고 가볍고 얕은 글을 쓰려고 자꾸 노력하고 문장을 고쳤다.


그러나 6월이 끝나가는 이 지점에서 나는 조금 단단해지고자 글을 쓴다.


나는 6월에 태어났다. 아주 더운 날이었다고 했다. 에어컨도 없는 곳에서 열 달 내내 입덧으로 과일 몇 조각이나 엄마 입에 겨우 들어가게 만든 못된 딸이던 나는 세상에 일찍 나와주지도 않고 긴 산통으로 엄마를 혼절하게 만들었으리라. 더운 공기 속에서 땀범벅이 되어가던 어린 엄마의 뱃속에서 나는 겨우 체념한 듯 세상에 나왔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자마자 눈을 뜨고 아버지와 아버지 주변을 살폈다고 말했다.

눈의 흰자가 너무 새하얘서 거의 새파랗다고 느낄 정도였고 내 눈과 마주치자마자 아버지는 울어버렸노라고 그랬었다. 아무 생각도 나질 않고 그냥 눈물만 펑펑 쏟아지더라고 말했다. 아버지다운 말이었다.

6월의 아주 더운 날, 해가 아직은 지지 않지만 이미 오후 시간이던 그 날.


올해 6월 내가 태어난 날은 나와 아내가 아름다운 야외 결혼식을 한 지 천일이 되던 날이었다.

채도가 높은 부케를 각각 들고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파란 야외의 꽃길을 걸었던 그 날로부터 천일이 지났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태어난 날이라는 것보다 그 사실에 더 기뻤다. 

부부로 무사히 천일을 살아왔구나, 그것을 실감하자 어쩐지 조금 눈물도 날 것 같았다. 울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정말로 기쁘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6월은 Pride Month였다.

올해 6월은 프라이드와 내가 태어난 날과 부부가 된 지 천일이 되는 날이 모두 겹친 경사스러운 달이었구나. 그런 생각이 퍼뜩 들었다. 주변에서 축하받을 수 있는 것은 생일 정도가 전부겠지만. 

경사는 경사로서 축하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 글은 자축의 글이다.

누가 축하하지 않아도 우리가 우리 서로를 축하하고 그동안 서로를 행복하게 했음에 고마워하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서로 존중하고 이 세상 무엇보다 사랑할 것을 약속하며 더 단단해지자 마음먹는 다짐의 글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감격해서 울게 만든 딸은 어린 시절부터 무척 예민했다.

어린 나는 티브이 소리에 화를 내거나 차 안에서 라디오 소리에 귀를 막고 꺼버리라고 소리를 지르는 예민한 아이였다. 특히 라디오에서 사람들끼리 계속 시끄럽게 떠드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고 한다. 그런 소리를 오래 들으면 반드시 멀미를 하거나 토하고야 말았다고. 

학교에서 잘 지낼까 걱정했지만 또래 친구들과 지내는 것엔 문제가 없는 걸 보고 나의 부모는 그럭저럭 안심을 했던 것 같다. 정작 문제는 어린 내가 결혼은 안 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부모가 간과한 것이지만 나는 그때부터 누군가와 함께 살 일이 없을 거라고 마음먹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내가 상상한 어른이 된 나는 웨딩드레스를 입지도 않았고 턱시도를 입은 남편도 없었다. 왕자님도 없었고 궁궐 같은 신혼집도 없었다. 아장아장 걷는 날 닮은 아이도 없었고 함께 결혼반지를 나눠 끼고 손을 꼭 잡고 바닷가를 걷거나 주말 아침에 함께 침대에서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일어나 커피를 나눠마시는 남편 같은 것은 정말 더더욱 없었다.


내가 상상한 미래의 내 집은 적막과 고요함으로 가득했다. 나는 혼자였고 커다란 침대에서 혼자 깨서 커피를 내려 책을 읽으며 혼자 마셨다. 가끔 심심하면 화분에 물을 주고 소파에 길게 누워 창문에 드리워진 커튼이 바람에 팔랑이는 걸 보다가 다시 책을 읽는다. 티브이도 없고 라디오도 없다. 나는 그냥 그렇게 한 뼘 한 뼘 늙어가서 건조해지다가 모래가 바람에 날리듯 풍화되어 사라질 것 같았다. 그런 미래를 생각하면 가슴이 뛰었다. 가족을 떠나 고요한 나만의 집을 만들 생각에.


그만큼 고요함을 평생토록 그려왔던 내가 배우자를 맞이하고 침대를 나눠주고 주말에 옆에 누가 있어도 그렇게 못 참을 정도는 아니라는 사실에 놀란다. 가끔 고독함이 그리워도 혼자 책을 읽을 시간을 존중해주는 배우자랑 산니까 이 삶이 그렇게까지 괴로운 일은 아니라는 사실에 놀란다.


그래서 이번 6월에는 특별히 그 사실에 자축한다.

평생을 혼자가 되고 싶어 발버둥 치던 내가 세상이 인정하질 않는 아내를 만나 천일을 함께 한 침대를 쓰고도 대부분은 행복하고 기쁜 기억을 남겼다는 그 사실에. 

세상이야 무어라고 말하든 우리가 부부가 되어가고 있다는 그 사실을 다시금 자축한다. 



이러니 인생 한 치 앞길을 모른다고들 그러나 보다.

내가 남편도 아니고 아내와 살 줄이야 어디 알았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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