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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홍 Jul 12. 2020

물속에 사는 선인장처럼

무수한 실패담: 타인과 동등한 관계를 형성하기 

단 한 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

- S.E.S, 달리기



가끔 노래 '달리기'의 가사를 떠올리면 가슴이 시큰해지는 순간이 있다.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 이 부분이 특히 내 마음을 먹먹할 정도로 위로한다. 그런 순간은 보통 무척 지쳤을 때이다. 쉬고 싶다는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만큼 다 태워버려 남은 건 재 밖에 없을 때. 내 영혼이 공기 중에 재가 되어 흩날리고 있을 때 저 노래 가사가 어김없이 떠오른다.


보통 번아웃이 온다는 표현은 일과 관련된 경우가 많지만 나의 번아웃은 직장생활에서 오는 것보단 일상생활이 축적되어 찾아오는 것이 훨씬 빈도가 잦다. 퇴근길을 걷다가 갑자기 이대로 발걸음을 무의미하게 계속해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도달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싶다고 생각하거나 사실은 태어나지 않았던 존재처럼 공기 중에 흩어지고 싶다고 느끼거나.

그런 순간들이 번아웃이 온 것을 알리는 신호다. 최대한 몸을 옹송그리고 혼자 숨으라고 내 영혼이 외치는 것이다. 더 겪어내고 참아내다간 부러져서 아주 무서운 꼴을 보고야 말 거라는 경고인 것이다.


처음 그 증상을 느낀 것은 그네 위였다.

고요한 주말 한낮의 그 놀이터는 나무속에 숨어있어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것임에도 아이들이 잘 찾아오지 않았다. 여름임에도 서늘한 것은 사람이 내뿜는 기척이 없기 때문인가 싶었다. 나는 어김없이 그네에 올랐고 계속 힘을 주어 흔들림을 유지시키면서 눈을 감았다.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만 귓가에 울렸다. 

사람 소리는 한 점 들리지 않고 내 몸은 내내 공중에 떠있었다. 바닷속에 들어간 것과 같은 감각이었다. 물론 나는 얕은 바닷속에 등을 대고 가라앉아 햇빛이 물결을 따라 넘실거리는 바다의 표면을 보는 것도 좋아했다. 그 또한 물이 움직이는 거대한 소리만 머릿 뼈를 타고 전해질뿐 아무 소리 없이 고요한 상태였으니.

나는 그 순간 그네 위에서 생각했다.

'이대로 바람하고 섞여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그때 나는 열셋이었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에게 염증이 난 상태였다. 그것이 번아웃인 줄 그때의 나는 몰랐다. 사람들과 가능한 멀리 떨어져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데 어린 나는 몰랐다. 오히려 혹독하게 정신을 몰아붙였다. 

저들과 친구로 지내려면 계속 붙어있어야 해, 같이 어울려야 해, 모든 시간을 함께 해야만 해.


그렇게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노력했음에도 나는 그 당시 친구관계에서 아주 쓴 실패를 맛보았다.

나는 친구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공감을 해주어야 할지, 진지해야 할지, 장난을 치면서 넘겨야 할지 무엇하나 나의 반응을 결정할 수 없었다. 나는 인간관계에서 상대가 내게 부여하는 호감도를 읽곤 했다. 모든 대화는 게임 속 선택지 같았다. 덕분에 나는 자주 불안에 휩싸이며 가까스로 선택지를 골랐고 대부분 실패했다. 상대는 내게 실망했고 날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럴수록 나는 더 큰 불안에 빠져 친구관계를 엉망으로 만들 수 있는 선택지만 골라 대답했다.

결국 나는 어린 시기에 친구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에 완벽하게 실패했다. 나는 그 실패로 아주 긴 시간을 앓았다. 다음 친구와의 관계에선 이전의 실패를 보수하며 더 큰 실패를 맛보았고, 그 후 친구관계에선 이전의 실패들을 전부 모은 것보다 더 큰 실패를 했다.


인정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그들의 관심사에 관심이 없었다. 한창 또래들이 아이돌 가수에 빠지거나 연애를 시작하고,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에 대해 푹 빠져 떠들 때 나도 그런 것들을 어떻게든 함께 동참하고자 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입술로만 웃는 미소처럼 어색했을 것이다. 나는 맞지 않는 신발을 신은 것처럼 절뚝거리던 그 시기의 나를 조금 애처롭게 여긴다. 최선을 다해 노력했으나 끝내 따라잡지 못했던 그 간극 속에서 새까맣게 타버린 나의 영혼을 기억한다. 더 이상의 실패는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며 넘어져도 계속 일어나 인간관계를 맺어보려고 아등바등 기어가던 나의 모습도.


너의 내면은 사막과 같아서 어떤 애정을 심어도 싹 틔우지 못할 거라고 했던 엄마의 말을 가끔 기억한다. 모래알이 잔뜩 모인 것 같은 나의 마음속에는 억지로 키운 선인장만 가득했다. 가시가 잔뜩 돋쳤지만 어떻게든 군락을 이루어보자고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이니까 내가 노력을 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한 선인장이었다.


물을 머금을수록 밑동이 썩어간다.

나의 실패는 곧 영혼의 부패였다. 

나는 선인장이었고 온통 모래산인 곳에서 작열하는 태양을 흠뻑 마주하며 홀로 서있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꾸 나는 인간이고 싶었다. 인간은 타인과 감정을 교류하고 피부를 맞닿으며 물기가 가득한 사회 속에서 생생하게 자라나야 옳은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물속으로 침잠했다. 

그리고 썩어 들어갔다.


나는 왜 이러한가.

나는 왜 실패하는가. 나는 왜 이다지도 타인의 애정과 관심에 메마른 감정을 갖는가. 나는 왜 사람들과 모여있을수록 더 괴로워지는가. 왜 다 타버릴 듯 숨이 가빠오는가.


세월이 많이 지나갔다. 시간은 가장 공평한 친구이다. 물속에 잠겨 겨우 의식만 붙잡은 채 둥둥 떠내려가던 선인장이던 내게도 마침내 뿌리를 내릴 땅이 보였다. 나는 차츰 익숙해졌다. 계속되는 실패에서 얻은 데이터는 무수하게 많았다. 이럴 땐 이런 말을, 저럴 땐 저런 말을. 

이 사람 무리들은 내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니 나에 대한 정보는 가장 안전한 것들로 선별해서 이 정도만 흘려도 충분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쪽으로 더 초점을 맞추자. 그렇게 참아가며 버티다 보면 인간관계 속에서 어릴 때 했던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을 수 있다.


되도록 안전하게만.


그러나 어른이 되어 성공을 이뤘다고 생각한 인간관계에서 봉착한 어려움이 또 스멀스멀 배어 나오고 있다. 부패한 내 마음속 어디선가 진물 같은 괴로움이 혈관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괴로움이 심해지면 끝도 없이 잠을 잤다. 허기조차 잊고 잠을 자서 현실과 나의 마음을 자꾸 차단시켜야 버틸 수 있었다. 

새로운 어려움은 내 목을 죄었다. 수월하고 안전하고 평탄한 인간관계 말고 가시밭길이더라도 나 자신을 가장 위하는 동등하고 평등한 관계를 맺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바로 그 '새로운 어려움'이다.



나는 보통 인간관계에서 나와 마주한 상대를 살피고 지금 상대에게 필요한 말이 무엇인지 파악한 후 입을 열거나 귀를 기울인다. 그것은 엄마가 말했듯 사막 같은 내가, 타인에게 관심이라곤 없는 내가 인간관계를 실패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기술이었다. 그럼에도 그러는 동안 나는 나를 잃었다.


결국 나는 동등한 관계를 몰랐다.

실패하지 않으려고 타인만 살피는 사이에 내 속에서 진물이 흐르도록 짓이겨져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괴로움과 고통은 오랜 나의 친우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내 속이 다 문드러지도록 알 수가 없었다.


동등해지려면 내가 한 실패를 반복해야 했다. 아니다, 새롭게 실패를 맛봐야 했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 인간관계에서 실패가 벌어지더라도, 용기 있게 나 자신을 위한 답변과 나를 변호하기 위한 말을 해야 했다. 타인이 아닌 나의 관심과 희망사항을 위한 행동을 해야 옳은 것이었는데 나는 오랜 기간 그 마음을 묵살하고 입을 막았다.


그 결과 나는 아주 오랫동안 실패해 온 셈이다.

성공이라 생각한 것이 얼마나 얄팍한 종잇장 위에 세운 모래성인지 깨달았다. 이미 파스스 바람결에 사라져 버린 모래성. 그렇게 나는 황망하게 또 갈 길을 잊고 있다.


용기를 내어 사막으로 향해야 한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 홀로 서서 짓무른 몸을 바싹 말려야만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고 그 결과 아주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그동안의 관계들이 모두 사라져도 내가 나를 가장 아껴야 동등한 관계를 다시 일구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이렇게 나의 실패담은 계속될 것이다.

물속에 몸을 박고 억지로 나무나 풀꽃인 척 굴던 나는 이제야 사막으로 갈 채비를 한다.

온전히 나 자신만을 위해서.



지속될 실패를 찬란하게 감수하는 용기를 가져보고자 결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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