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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인 Mar 02. 2024

잃어버린 초점

겹겹의 어딘가에 맺힌 초점을 찾아서

언젠가는 TV에서 책을 읽자며 좋은 책을 추천해주던 시기가 있었다.

내게는 가장 많이 쓰는 문장부호가 물음표이던 시절이다보니 '느낌표'라는 TV프로그램은 자습서 답지같았다.

그러다보니, 추천 도서를 읽겠다고 매주 서점에 가서 몇 권인가 집어오곤 했었다.

그 중에서도 책이 헤질 때 까지 읽고 또 살 만큼 좋아하는 책이 있는데, 바로 과학콘서트(정재승, 동아시아)다.

세상의 모든 질문에 이유를 붙여 설명해보는 것이 얼마나 즐겁던지!

그 책을 시작으로 과학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던 듯 하다.

아니면 그 이전이던가,

혹은 그 이후에.


어쩌면 초등학교 입학 무렵에 읽었던 지구의 비밀(김정란, 삼성출판사)이라는 만화를 본 시점부터 과학자가 되고 싶었을 수도 있겠다.

아니, 선행학습을 하지 않아 과학 실험의 결과를 혼자 틀리게 말했던 창피함에 시작한 과학공부가 즐거워서 였던 듯도 하다.

생각해보니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로켓이야기(채연석, 승산)를 읽고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에 매혹돼서 였을 수도 있다.

아무렴 어떤가.


과학콘서트에서는 프랙탈(fractal)에 대하여 소개한다. 프랙탈이란 부분이 전체를 닮는 기하학적 형태를 뜻하는데, 눈 결정이나 나뭇가지도 일종의 프랙탈이라고 볼 수 있겠다.

언제 과학자가 되겠다고 결심이 섰는지는 조금 모호해졌지만, 프랙탈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과학콘서트를 읽고 나서이다.

세상의 수많은 자연물이 프랙탈을 이룬다는 글을 읽고서는 온갖 곳에서 프랙탈을 찾아보고 혼자 즐거워하곤 했다.

나뭇가지는 그 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프랙탈인데, 흔히 볼 수 있는데다 잔가지가 많아질수록 반복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겨울의 나목을 찍게 되었다.


21년 겨울, 애인과 한라산 중턱쯤 올랐을 때도 눈덮인 설산의 나목이 눈에 들어왔다.

학교에서 교양시간에 배운대로 주제와 부주제, 색의 대비 등등을 생각하며 사진으로 남겼다.

푸른 침엽수 위에 눈덮인 하얀 나목의 프랙탈은 어떤 자연의 경이로움을 기록해두는 사진으로 손색이 없었다.

일단 내가 즐겁게 본 것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날은 조금 평소와 다르게 찍어보고 싶었는지, 굳이 같은 사진을 한 장 더 찍었다.

필름 값이 많이 올라 잘 하지 않던 일이지만 고민은 들지 않았다.

이번에는 확대해서.


나뭇가지는 겹겹이 쌓였고, 어디엔가 맞췄을 초점은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내 사진의 초점을 잃어버렸다.

초점이 어디있는지 불분명한 시각적 백색소음의 사진이 찍힌 것이다.

그러나, 명백한 나뭇가지였고, 프랙탈이었다.


종종 노화를 느낀다.

새치라고 우기기 힘들 정도로 흰 머리의 수가 늘어서,

밤을 새워 이야기를 하면 다다음 날 까지 밝은 낮에 어두운 마음으로 있어야 해서,

건강검진을 받으면 여러 숫자들이 무서워져서,

조금씩 몸이 바뀌는 시간을 느낀다.


어디서 시작인지 모르겠는 기억들이 시험기간 청소를 미루며 어질렀던 방처럼 점점 뒤죽박죽이 된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뒤섞인 기억은 선명한 이미지로 떠오르곤한다.

하얀 겨울산의 나목이 만든 프랙탈을 찍은 사진과 같이, 내가 되고 싶었던 사람의 모습만은 뚜렷이 남아있다.

'무제' (21년 겨울 한라산 중턱)


'흰 선' (21년 겨울 한라산 중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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