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7일, 스칼렛 탄생일. 최근에는 집에 오래 있고, 딱히 정기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없어서 조용한 생일을 맞게 될 줄 알았다. 작년에도 그러긴 했지만 누군가와 약속을 잡지도 않았다. 화려하게 생일을 보낸 적도 있었다. 미국에서 맞이했던 스물한 살 생일에는 내 이름이 박힌 케이크에, 꽃과 헬로키티 목걸이를 선물 받았다. 한 사람이 해준 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내 생일파티를 '기획'해주었다. '아, 나는 역시 인싸야!'하고 매우 콧대가 높아졌던 기억이 있다. 재작년 생일에는 친구의 신혼집에서 다른 친구들과 함께 생일파티를 했다. 집주인이었던 친구가 감바스를 해주었고,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준비해줬다. '와 이런 파티를 해 받을 수도 있구나'라고 신기했었다. 그런데 그런 화려한 기억들이 있으면 괜히 예정 없이 소소하게 생일을 보내면 초라할 것 같고 뭐 쫌 그런 마음이 생기더라. 회사 그만둔지도 안돼서, 더 쭈구리 같아 보이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참 바보 같지. 회사를 그만두자마자 다른 곳에서 일할만한 기회를 얻기는 했지만 고사했다. 지금까지는 늘 급한 마음으로 취업을 해왔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입사제의를 물린 후에 마음이 조금 힘들었다. 잘한 게 맞나 고민도 했다. 퇴사를 하고 2주 차쯤에는 잠을 잘 이룰 수 없었다. 7월까지 가지고 있는 일본어 문제집 한 권을 제대로 독파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취준도 오래도록 안되면 어떻게 하지, 결국에 입사하게 되는 데는 얼마 전 그만둔 회사 같은 조건인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생일이 다가오니, 나이는 먹어가는데 여전히 할 줄 아는 건 없는 어른 같았다. 그리고 이런 걱정이 철딱서니가 없는 짓이라는 걸 깨닫는 건 금방이었다.
#2
창작가무극 나빌레라의 2021년도 캐스팅
일본에 계신 친할머니는 매번 늙는 것이 서럽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아빠는 '자연에 순응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면 엄마만 힘들어요~'라고 하셨지만 그 얘길 들을 때마다 나도 할머니가 되는 것을 생각하면 서러웠다. 할머니는 육십이 넘어서 만학의 꿈을 가지고 고등학교를 다니셨고, 장구를 배우고 춤을 추셨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스트레칭과 운동을 하셨었다. 스무 살도 넘게 어린 엄마가 할머니의 체력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는데도, 늙는 것이 서럽다고 하셨다. 친구들이 서른 정도 되어서 '와 이제 계란 한판이야'라든가, '와~ 요새 애들 21학번이라고?! 진짜 우리 이제 늙었다'라고 하는 건 하나도 안 서럽다. 그건 건방져 보인다. 60이 되고 70이 되고 80이 되는 것, 그래서 정말 집 앞을 나가는 것조차도 조심해야 하는 나이가 되는 것, 그게 두려웠다.
19일에는 뮤지컬 '나빌레라'를 보러 간다. 웹툰 원작이고, 발레를 동경하는 70대 할아버지가 결국 발레로 무대에 오르게 된다는 내용이다. 브런치에도 웹툰, 뮤지컬, 그리고 아마 드라마까지 감상해보고 글을 올리면 좋겠다 싶어 뮤지컬 티켓을 구하고 나서 웹툰도 전부 읽었다. 그 웹툰을 읽고 나서 왜 내가 20대부터 할머니의 서러움에 공감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육신이 감옥인 상황을 경험해보았다.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상황이 어려워서 못했어'가 아니라, '버티는 것이 버거워서 하고 싶은 것 따위는 생각할 여력도 없었어'의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다. 무엇이라도 꿈을 꿔본 적이 있거나 삶이 얼마나 즐거운지를 깨닫고 난 이후에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머리가 크자마자, 사리분별력이 생기 자마 자부터 그 사리분별력은 감옥 같은 육신에 갇혀있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긴 시간이었다. 늙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육신이 감옥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죄를 짓지 않았는데 감옥에서 자유를 박탈당하니 당연히 서러울 수밖에.
다행히 나는 그 감옥 같은 육신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그러한 탈출 이후 깨달은 사실은, 자유를 누구나 누릴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앞서 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 환경에 있다는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다.
#3
생일축하 1일차, 백운호수 '올라'의 파나코타. (화룡점정!)
웹툰 나빌레라의 후반부에서, 남자 주인공인 채록이에게 주치의(이자 채록이가 속한 발레단 친구의 아버지)가, '사실 의사 된 도리로서는 너에게 무용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옳지만, 친구 아버지로서, 발레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는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하라고 말하고 싶다. 어디가 다치고 부러지더라도 내가 고쳐줄 테니 너는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렴'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캡쳐가 되지 않아 첨부는 할 수 없었다.) 2화부터 많이 울었는데, 저 부분을 보면서는 나를 치료해주셨던 의사 선생님이 생각나서 마음이 복잡했다.
하루는 '더 열심히 공부하고 싶었어요. 안 아팠으면 더 많이 공부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랬으면 더 좋은 대학에 갔을 텐데, 가고 싶었던 대학에 입학을 성공했을지도 모를까요?'라고 물었다. 의사 선생님은 내 손을 잡으면서, '이제는 안 아플 수 있어요. 하고 싶은 게 그렇게 많았구나. 공부도 그렇게 더 많이 하고 싶었구나. 그 마음이 참 예쁘네. 내가 도와줄게요. 마음껏 일도 하고, 춤도 추고, 발레도 맘 껏 할 수 있게 해 줄게. 이제는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어요!'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정말 많이 울었다. 그때 나는 울면서도 왜 울었는지는 명확히 이해하지 못했는데, 4년이 지난 지금은 왜 인지 알겠다. 늘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체력과 능력이 있다는 사실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최선을 다하는 삶은 심심하거나 지루할 틈이 없다. '심심해, 놀아줘' 따위의 말이 매력적이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루하다는 건, 지금 당장 걱정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해야 할 일이 많은 데 심심한 거라면, 해야 할 일을 미루고 도망가는 중인 거다. 나에게 최선을 시도해볼 법한 체력이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자유였다. 육신의 감옥을 빠져나오고, 내가 한 것들은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었다. 꾸준히 운동하기, 꾸준히 일하기, 사람들과 놀러 다니기, 쇼핑가기, 원데이 클래스... 어릴 적부터 평생을 통증 속에서 살게 되면 어쩌나 걱정했던 내게는, 삶이 늘 보너스 라운드였다.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최선을 다했어도 마음만큼 되는 것이 있고, 예상보다 한참 못 미치는 것들도 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적어도 후회를 할 일이 없었다. '만약에 그때 내가 안 아팠으면 더 좋은 대학에 갔을까?' 같은 '만약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사람들은 모른다. 마음만큼 되었든 되지 않았든, 그 최선을 향한 노력은 어떤 형태로든 남는다. 운동신경이 좋지는 않았지만 집요하게 몇 년씩이나 했던 웨이트 트레이닝은 지금 발레도 되고 폴댄스도 되고 살사도 되어있다. 그리고 그 발레는 공연 관람이 되고, 내 브런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럼 결국 나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기 때문에 브런치에 글도 쓸 수 있는 거 아닐까? 아니, 사실은 훨씬 그 이전부터, 내가 최선을 다해왔던 흔적들이 돌고 돌아 내 브런치가, 나의 지금이 된 걸지도 모른다.
#5
생일축하 1일차, 백운호수 '올라'의 문어튀김 파스타
내게는 삶이 선물이다. 육신이 감옥이던 그때에는 엄마를 바라보며 '엄마 왜 하필 나야? 나는 왜 태어나서 지금처럼 아픈 거지?'라고 물었던 적이 있다. 만일 그 상황이 다시 돌아온다면 나는 똑같은 질문을 또 던질지 모른다. 그때가 되면 삶은 선물이 아니라 삶은 지옥이라고 할 수도 있다. 모두에게 삶이 선물처럼 느껴지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때에 따라서도 다를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나는 삶을 선물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의무가 있을 만큼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젊음, 성실함, 자신감, 열정, 솔직함, 건강, 내가 처한 환경까지 나는 선물 받은 것이 너무 많다. 내가 '사는 거 참 지겹고 짜증 나'라고 하면 그건 정말이지 도둑놈일 거다.
#6
생일축하 3일차, 샤로수길 '고요'의 곰돌이 케이크
사람들은 솔직한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솔직하게 다 까발려도 흠이 없는 사람을 좋아하는 거다. 솔직할 수 있는 것도 엄청난 특권이다. 사람들은 솔직한 사람은 가진 것이 많아 솔직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진 것'은 재력이나 명예 같은 것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성적인 가치까지 전부 포함한다. 솔직한 사람이 좋다고 해서 '솔직히 말해서 나는 마트에서 초콜릿을 보면 다 훔치고 싶어. 사실 난 도벽이 있거든'라는 말을 솔직하게 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 상대의 포장을 다 벗겼는데도 그 본질이 반짝거리는 사람을 좋아하는 거지.
솔직함에는 용기가 필요하고, 용기는 믿을 구석이 있어야 나온다. 그게 재력이든 자존감이든, 백이든 뭐든 말이다. '믿을 구석'이란 곧 '힘'이다. 그럼 명확해진다. 사람들이 솔직한 사람들에게 끌리는 이유는, 솔직한 사람은 힘을 가졌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엄마는 내가 뚜렷한 주관 표현을 할 때마다 '그래 너 잘났다~'라고 하시고는 했다. 그때마다 '진짜 있는 그대로 말한 건데 그게 왜 잘난 거야?'라고 물었는데, 이제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를 포장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있는 그대로' 자체가 이미 블링블링하거나, 흉하다고 하더라도 책임질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 행동이니까.
#7
생일축하 3일차, 샤로수길 '방콕야시장'의 뿌팟 퐁 커리
나의 부모님은 내가 있는 그대로 블링블링할 수 있게 낳아주셨다. 외형을 말하는 게 아니라(아 물론 외형에도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내면까지도. 그리고 그 블링블링함을 솔직하게 표현하더라도 핀잔주지 않으셨다. 늘 내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게 해 주셨다.
예전에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며, 한 선생님께서 '많이 힘들었을 텐데도 삐딱하지 않게 지금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부모님께 좋은 성품을 물려받아서 그래요. 그 성품을 가지고 본인 또한 잘해보고 싶어 끊임없이 노력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던 거예요'라고 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역학을 공부하던 지인 언니는 사주를 공부하다 보면 정말 팔자라는 게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데, 그게 너무 무섭다고 했다. 아무리 아등바등해봐야 그 팔자대로 삶이 흘러가는 것 같아서 공포감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런데 어떤 팔자도, 어떤 사주도, 심성을 이기진 못해. 정말이야.'
내 삶이 선물인 이유는 간단하다. 어떤 팔자든 어떤 사주든, 잘 겪어나갈 수 있는 심성을 부모님께 선물로 받았기 때문이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심성이 꼬이지 않도록 사후처리까지 평생 해주고 계신다. 예민하고 신경이 곧잘 곤두서는 내가, 그 예민함을 감수성으로 성장시키고, 곤두서는 신경을 세심함으로 승화할 수 있게 많은 도움을 주는 부모님이 계신다.
#8
생일축하 3일차, 샤로수길 '방콕야시장'의 새우 팟타이
큰돈을 벌거나, 누구나 부러워하는 남편을 얻지는 못할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낳는대도 그 아이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대기업에 입사하거나 대단한 사업을 하는 부자가 되도록 기르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예 아이를 낳지 못할지도 모르지.
겁나냐고 물어보면 자신 있게 아니라고 답할 수 있다.
돈이 있든 없든 나는 나다. 결혼을 하든 안 하든 나는 나고, 아이가 있든 없든 나는 나다. 그 아이가 잘되면 좋겠지만 결국 그건 그 아이의 일이고 나는 나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사람인지는 물론 나도 아직 완전히 파악하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믿을 수 있다. 슬프고 괴로운 일이 있대도 곧 지나갈 것이라며 자신을 위로하며 내가 원하는 때에 잠깐 멈출 수도 있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음을 안다. 브레이크도 엑셀도 고장 나지 않았는데, 차체도 좋고 엔진도 좋은 차를 갖고 있다. 드라이브가 힘들고 괴로운 길이 아니라 분명 잘 굴러가는 차를 갖고 기분이 좋을 거다. 사실 조금 나쁜 차를 가지고 있대도 중간중간 정비해가면서 즐겁게 달릴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불안해하고 걱정만 하기에는 너무 좋은 차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9
가족과 함께한 스칼랫네 생일파티
그래서 내 삶은 선물이다.
아직은 육신이 감옥일만큼 늙지 않아서,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더 확신하게 된다. 지금 현재 나는 하고 싶은 것을 찾을 수 있고, 찾은 것을 할 수 있고, 잘 되지 않으면 개선할 수 있으니, 너무나 선물 받은 삶이라는 걸.
#10
설령 육신이 감옥이 되는 날이 온대도, '그에 맞는 방법을 찾지 않을까'라는 오만하고 패기만만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