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발레단의 발레축제 작품인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보고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건 오늘부터 내 최애 레파토리다. 국발의 말괄량이가 재밌는건지, 말괄량이 자체가 재밌는건지 아직 확신은 없는데, 정말이지 맘에 드는 레파토리였다. 제대로 감상을 하고 싶어서 셰익스피어의 희곡 원작 '말괄량이 길들이기'도 읽고 관람하러 갔었다. 처음부터 '어떻게 말괄량이를 길들이는걸까?'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나 자체가 작품에서 말하는 '말괄량이'와 통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애인 같은 아주 가까운 사람을 두지 못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셰익스피어가 내게 어떤 답을 제안할지가 너무 궁금했다.
요 책을 읽고 공연을 보러다녀왔다!
사실 처음 원작을 읽었을 때는 너무 화가났었다. 왜냐하면, 희곡에서 페트루키오가 카타리나를 길들이는 방법은 '가스라이팅'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나도 곁에 사람을 두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가 가스라이팅 당하는 방법밖에 없단 얘기같아서 1차 분노. 그리고 그런 가스라이팅 상황에서도 반항한번 해볼 수 없는 카타리나의 상황에 대해 2차분노... 페트루키오는 카타리나가 말을 듣게 하기 위해 자기네 집에 처음 온 카타리나를 밥을 굶기거나 차가운데서 재우거나 하는데, 여기서 카타리나가 '됐어. 내가 알아서 먹을게' 혹은 '됐어, 나 나가서 잘테니까 알아서해!'라고 할 수 있는 선택지 자체가 없다는 사실에 화가났다. 남자가 그런 대접을 했으면 당장 '니가 날 이렇게 대접한다고? 그래, 서로 갈길가자'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자체가 불가능 한 상황. 책을 보면서는, 여자는 남자 없이 언제어디서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원작에서도 그렇고 발레에서도 그렇고, 카타리나가 왜 그렇게 괴팍한지에 대한 내용은 없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암튼 그 이유는 모른 채로 발레를 보게 되었는데, 너무너무 웃기고 재밌었다. 우선 내가 보았던 회차는 6월 15일 화요일 7시 30분, 카타리나가 슬기리나였다가 승원리나로 공연하루전날 급 변경되었다. 나는 승원리나가 원픽이라 너무 좋긴했는데, 갑자기 바뀌어서 의아하기는 했다ㅠ. 그리고 페트루키오는 기완리노였고, 루첸시오는 서명리노, 그레미오는 명규B리노, 호르텐시오는 성완리노였다. 원작에서는 루첸시오, 그레미오와 호르텐시오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었다. 마지막에 잠깐 나왔었던걸로 기억하는데, 발레에서 이 트리오가 정말 재미가 쏠쏠한 캐릭터들이었다.
오늘도 여지없이 포스터 따라잡기
이 트리오는 카타리나의 여동생인 비앙카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는데, 세사람이 비앙카를 꼬시는 모습부터 웃기다. (꼬시려다가 카타리나한테 매맞거나 밟히기도 한다. ㅋㅋ) 그레미오는 가창선생님, 호르텐시오는 음악선생님, 루첸시오는 카타리나의 발레선생님으로 위장해 비앙카의 마음을 얻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그런데 가창선생이라는 그레미오는 노래를 못한다. 악기가 삑삑 대는 소리에 그레미오가 립싱크를 하는데 이게 정말 웃기다. ㅋㅋㅋ 트리오가 비앙카를 꼬시는 방법에서 드러나는 차이가 재미있기도 하다. 그레미오는 자기가 잘 하지도 못하는 노래로 비앙카를 꼬시려한다. 잘 될리가 없다. 호르텐시오는 그레미오보다는 나아서 악기연주를 잘하지만, 비앙카가 함께 하려고 하면 악기를 만지지도 못하게 한다. 호르텐시오는 자기가 잘하는 것을 자랑만하는 남자다. 그도 잘될리가 없다. 루첸시오는 발레를 잘하기도 하지만 비앙카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여유도 배포도 있는 남자였다. 당연히 비앙카는 루첸시오를 선택할 수 밖에. ㅋㅋ
주역캐스팅. 15일의 슬기리나가 승원리나로 변경되었다.
공연을 보기 전부터 나는 국발 발레리나들 중에서는 승원리나가 카타리나와 제일 잘어울릴거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보는 승원리나는 카리스마가 넘친다.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이 귀엽다고하면 이상하겠지만, 승원리나는 카리스마가 있어서 귀여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할 일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카리스마가 넘치지만 종종 엉뚱한 행동을 하곤 하는데, 승원리나의 무대를 보고 있노라면 왠지 그럴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데 카타리나도 그랬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건 아니고 좀 괴팍한 성향이라 여기저기 분노를 표출하고, 공격적인 태도로 사람들을 대했다. 카타리나는 왜 그렇게 괴팍했을까?
말괄량이 길들이기에 나오는 남자캐릭터들은 다들 하자가 있다. 잘하지도 못하는 재주로 여자를 꼬시려 들거나, 지 잘난 맛에 허세를 부리며 여자를 꼬시려 들거나. 그렇지 않은 남자는 매력도 떨어지고 딴 여자를 좋아한다. ㅋㅋ 페트루키오 또한 사실 첫 장면에서 술집에서 꽐라가 되어 작부들에게 가진 거 다 털리는 걸 보면 그렇게 성실하고 좋은 남자는 아니다. (게다가 뺀질뺀질하고 뻔뻔쟁이다.) 근데 그런 남자들이 자신을 꼬시려고 들며, 대충 얼굴 예쁘고 말잘들을 거 같으면 골라가는데에다가 신부의 지참금까지 챙기고 싶어하는데, 맘에 안들 수도 있을거 같다. 그 남자들이 비앙카에게 구애했던 건 비앙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서가 아니라, 단순히 비앙카는 예쁘기도 했지만, 카타리나와 다르게 말잘듣는 여자라서였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여자와 비앙카를 헷갈리지 않았을거라고 생각한다.) 거기다가 성격은 카타리나와 다른데 집안은 카타리나와 같은 집안이니 지참금도 크게 챙겨오겠지! 나는 카타리나를 보면서 내 모습을 봤던 것 같다. 그래서 더 재밌게 봤다.
호오... 메인포토월 디자인이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ㅠㅠ 포스터 포즈로 한번 더 찍어봄ㅋㅋ
페트루키오가 카타리나를 '길들인' 방법은, 사실 '여유'와 '인내'였다고 생각한다. 기완리노의 페트루키오는 뻔뻔하고 재수없었지만, 카타리나의 폭력(?)과 앙탈(?), 짜증(?)을 여유만만하게 웃어넘긴다. 트리오가 카타리나에게 뺨을 맞거나, 기타로 맞거나, 발을 밟히고 찡찡 우는 소리하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뻔뻔한 페트루키오 때문에 카타리나는 페며들(?)게 된다. ㅋㅋ 페며든 건 페며든거고,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아서 또 한번 난동을 피우지만, 페트루키오는 가뿐히 웃어넘기며 결혼 성공(!) 페트루키오의 태도는 마치, '아니 뭐... 너 나 좋아하는 거 다 알아~'식의 여유만만한 태도였다. 한두번 거절당하면 포기하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골백번을 거절당해도 '난 니가 날 좋아하는 거 아니까 뭐~ 언젠간 너도 솔직하게 표현할 날이 올거야~'라며 여유있게 기다려주는 남자, 매력이 없을 수 없다. (사실 나도 그런 사람에게 빠진 적이 있어서 뇌리를 스쳐지나가기도 했다. 걔는 페트루키오처럼 과격한 방법으로 날 길들이려하지는 않았지만!)
카타리나가 페트루키오의 매력을 발견하게 되면서 페트루키오 또한 카타리나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카타리나는 그가 자신을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극의 마지막 부분에서 페트루키오에게만 상냥하고 정숙한 여자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괴팍한 행동을 한다고 느꼈다. 이 때 또 스쳐지나가는 내 기억 속의 남자가 있었다. 그는 내게 '아니 처음엔 엄청 까칠하게 구는데 둘이 있을 때는 완전 다르잖아? 예뻐해주는거 엄청 좋아하면서 도대체 왜 그렇게 까칠한건데'라는 소릴 했었다. 맞는 말이지. 근데 아무나가 아무것도 모르고 날 예뻐해주는 걸 바라는게 아니라,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나의 모습을 온전히 좋아해주길 바라는거니까 당연히 잘 모르는 사람한테는 까칠하게 구는거지! #남의고기엔밥안줌
(국발에서 이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메세지는 '보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야'였다고 한다. 얌전해 보이는 비앙카도 결국 괴팍한 구석이 있고, 괴팍해보이는 카타리나는 자기 남편한테는 너무 잘하니까.)
말괄량이 길들이기 포스터
기억에 남는 장면들은 여러개였다.
1. 페트루키오가 술집작부들에게 홀라당 등골파먹히면서 옷 훌렁벗겨지는거
2. 그레미오의 필승 삑사리
3. 페트루키오가 결혼식 하객들을 밀어서 도미노처럼 쓰러뜨리고 마지막 한명은 카타리나가 던진 꽃한송이로 드러눕는 것
4. 카타리나가 호르텐시오의 기타를 호르텐시오 머리에 내리쳐서 그의 머리로 뚫어버리는 것.. (진짜 핵깜짝놀랐다ㅜㅜㅜ 어휴 그렇게 세게 때릴일이야...?!ㅋㅋㅋ)
5. 물을 긷는데, 페트루키오가 카타리나에게 '서있는 사람 왼팔에 물동이를 걸고 오른 팔을 펌프처럼 펌프질을 해'라고 시키니 카타리나가 순종하고자 그렇게 하는 모습(말괄량이 카타리나가 순종적인 아내로 변모했음을 드러내는 장면)
6. 트리오와 페트루키오가 '누구의 아내가 순종적인지 내기하자!'고 해서 서로 아내를 부르지만, 트리오의 아내는 오히려 와서 '누구를 오라가라야!'라며 화를 엄청내는데 카타리나만 페트루키오에게 상냥하게 다가오는 모습 (사실 트리오가 와이프들한테 혼나는게 웃김) 요조숙녀라던 비앙카도 결국 결혼하고 나니까 루첸시오한테 화냄ㅋㅋㅋㅋㅋㅋ 결혼하고 상냥해진거 카타리나밖에 없엌ㅋㅋㅋㅋㅋㅋㅋㅋ
캐스팅은 전회차 공연 중 오늘 공연이 가장 맘에 들었다. 카타리나 얘기는 앞에서 했으니 패스, 기완리노는 그냥 원래가 페트루키오 그 자체 같고....(연기를 한게 아니라 그냥 본인이 등판을 하신 느낌) 엉뚱하고 귀여운 매력의 성완리노의 호르텐시오도 재미있었다ㅎㅎ 트리오중에서는 성완리노의 연기가 가장 좋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기타로 머리 맞을 때는 너무 깜짝놀랐다구ㅠㅠㅠ 명규B리노를 눈여겨본건 오늘이 처음이었는데, 립싱크도 잘하구(ㅋㅋㅋ) 너무 재밌었닼ㅋㅋㅋㅋㅋㅋㅋ 그 립싱크 정말 잊을 수 없다 삑삑짹짹ㅋㅋㅋㅋㅋ 믿고보는 서명리노가 루첸시오! 말괄량이 길들이기 희곡을 다 읽었을 때 부터 서명리노가 주역에 안나오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페트루키오는 조금 과격하기도 하고, 카타리나를 압도하는 과격함을 가지고 있는데 서명리노의 이미지는 너무 상냥하고 다정하다ㅠㅠ 서명리노의 루첸시오는, 본인을 닮아 젠틀하고 우아했다. 술집 작부들도 강효형리나, 정은영리나로 개성이 넘쳤다. 그 둘은 특히 개성있고 강렬한 느낌이다.
전체캐스팅
덧붙여서 승원리나 또한 개성이 넘치는데, 카타리나 캐릭터 자체가, 다른 발레의 가련한 여주인공과 달리 개성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카타리나가 난동을 부리다보니 동작 자체가 세고 강하게 나오는 게 많았는데, 그 때 나는 호이랑의 주역이었던 승원리나가 떠올랐다... <3
나도 결혼할 만한 남자라거나 남편이라면 카타리나처럼 결혼하고나서 더 잘해줘야지! (이상한 결론ㅋㅋ)
원작보다 발레의 내용이 더 설득력있고, 기분 좋은 내용이었다 :D 오늘로서 내 최애 레파토리로 등극! 책을 읽고가니 훨씬 재밌게 봤다. 오네긴도 원작을 읽고가서 더 재밌게 봤던거 같은데, 역시 드라마 발레라면 반드시 내용을 숙지하고 가는게 필요한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