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er the Rainbow

너는 나의 프리즘... 나의 유일한 가시광선

by 이립

8월 22일 흐림


평범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개인병원이 다 그렇진 않겠지만, 서울 외곽 동네 정형외과에 아침부터 응급환자가 시급을 다투며 내원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여기 개원한 지가 5년이 다 되어 가지만 몇년 전 등교하던 학생이 지나가던 차를 피하려다 발목이 접질려서 다친 학생보다 운전자가 더 놀래서 제일 가까운 우리 병원을 찾아 왔던 게 그나마 응급이었을까? 대학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동기들이 들으면 꽃놀이라 하겠지만, 솔직히 어떤 때는 눈코뜰 새 없이 바빴던 전공의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적어도 그땐 몸이 고단했던 것 외에 다른 고민거린 없었으니까. 자유로운 시간이 많다는 건 그만큼 자유롭게 잡생각이 n차식 함수로 늘어난다는 거다. 어떤 때는 환자 없이 우두커니 원장실에 앉아 있는 시간이 고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처럼 단순했던 인간도 나이가 드니 느는 게 주름과 뱃살 그리고 걱정이다.


느긋하게 출근해서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키고 오늘의 예약일정을 확인하려고 하는데 순간 눈살이 찌푸려졌다. 미간 주름 때문에 요즘 왠만해서는 인상 쓰려고 하지 않는데 일주일 전 새로온 박간호사가 컴퓨터 모니터를 걸레로 닦았는지 물 얼룩이 보였다. 내가 예민한 건지 모르지만, 그 얼룩을 보는 순간 눅눅한 걸레냄새까지 후각신경을 건드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미간엔 저절로 주름이 깊게 패였음을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남자도 갱년기가 온다는데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얼마 전 배웠던 명상 호흡을 떠올리며 깊은 들숨날숨을 번갈아 쉬고 난 뒤, 아무래도 이건 박간호사에게 지적해야겠다, 아니면 또 이런 테러를 당하겠지 싶었다. 아침부터 걸레 테러라니... 요즘 눈이 침침해서 안 그래도 모니터에 얼굴을 갖다대다시피 보는 나에게 이건 마치 걸레로 얼굴을 강타한 느낌이었다.


"박간~."

원장실을 나가자마자 불렀는데 대답이 없다. 나의 솟구치던 아드레날린이 그녀에게 모종의 경고를 보냈던 것일까?

"박간~~~."

이번엔 조금 더 데시벨을 올려서 불렀다. 그래도 박간호사는 숨었는지, 아님 도망 갔는지 어떤 생체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순간, 1주일 만에 옷을 던지고 나갔나 싶어 탈의실과 탕비실을 겸하고 있는 작은 방으로 가서 노크를 했지만 거기에도 박간호사는 없었다. 3번 정도 노크를 하고 혹시나 몰라 문 앞에서 두세 번 부른 다음 손잡이를 조심스럽게 돌렸다. 2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다. 박간호사는 보이지 않고, 커피와 간식이 즐비한 선반 위 소형라디오에서 귀익은 목소리가 들려나왔다. 탤런트 김미숙 씨다. 드라마를 본 적이 언제던가? 그래도 그녀의 목소리는 기억한다. 어렸을 때 각인효과때문인지, 한때 내 이상형이기도 했다. 박간호사가 없는 걸 확인하고 바로 나가려고 했는데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라 반갑기도 하고, 김미숙 씨가 라디오를? 하면서 조금 더 머물렀을 뿐이다. 시간으로 치면 2-3초 정도?


그때 내 귀에 들어오는 이름 하나. 주홍이다. 김미숙 씨가 사연을 읽는데 앞에 무슨 사연인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고, 마지막에 "주홍 님이시죠? 정말 오랫만에 글 남겨 주셨네요. 저도 많이 반갑습니다."는 멘트에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주홍. 내가 아는 그녀인가? 아님 동명이인인가? 갑자기 혼란스러워져 박간호사가 어느새 등 뒤에 와 있는지도 몰랐다.

"원장님, 여기 무슨 일이세요?"

"아, 아냐, 아냐. 아무것도. 박간 일보세요."

허겁지겁 내 방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아까 치솟았던 아드레날린이 아직 내 심장을 펌프질하는지, 아니 조금 전보다 더 심해져 이제 급기야 심장박동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박간호사가 이내 커피를 한 잔 내려 방으로 들어왔다.

"원장님, 어디 안 좋으세요? 얼굴이 발가신데... 열 있으신 거 같은데... 냉방병이신가?"

"아니, 아니. 괜찮아요. 어제 좀 술을 마셨더니 숙취가 오래 가네요. 고마워요. 커피 잘 마실게요. 시간 맞춰 문 여세요."

"아 네에. 계속 불편하시면 꼭 말씀하세요. 오전에 예약 환자는 김할머니뿐이시니까요."


박간호사가 방을 나가는 동안 뒤돌아 보며 연신 내 얼굴을 살피느라 나는 온힘을 다해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복식호흡, 명상호흡, 자가최면, 등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총동원해서 BPM을 정상치로 내리기 위해 애를 썼다. 자율신경계를 컨트롤할 수 있다고 여기다니... 내가 20년 넘게 의학을 공부한 의사가 맞나 싶다. 가쁜 호흡이 조금 진정이 되자 잠시 나가 있던 멘탈도 제자리를 찾아 돌아왔다. 주홍... 그 이름을 잊고 산 지가 벌써 20년이 되어 간다. 아니 그 뒤에 우리가 한 번 만났는데 그게 언제던지... 아 맞다. 내가 결혼 날짜를 잡았던 때니까 2008년이던가 2009년이던가? 그동안 어떻게 사는지, 결혼은 했는지 건너건너 전해지는 소식도 들을 수 없었으니까 내 기억 속에 그녀가 깡그리 잊혀진 게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일단 내가 아는 그녀가 맞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방송국에 전화를 해야 하나? 첫사랑이라고 뻥을 쳐야 하나? 요즘 라디오는 어떻게 사연을 보내지? 홈페이지가 있나? 운전을 하면서도 라디오를 듣지 않는 내게 라디오란 전시대 유물이나 다름없었다. 안되겠다. 박간을 불러야겠다.


"박간, 잠시 내 방으로 좀 와줄래요?"

스피커폰으로 박간호사를 불렀다. 내게 무슨 큰일이라도 났나 싶었는지 몇 미터도 안되는 거리를 박간호사는 자기 체중도 잊은 채 전속력으로 달려 왔다.

"왜요? 왜요? 많이 안 좋으세요?"

"그게 아니라 요즘은 라디오에 사연 같은 거 어떻게 보내죠?"

"예??"

"아니, 아까 박간 찾으러 탕비실에 갔더니 라디오를 켜놨길래 들으니 좋아서요. 나도 사연을 좀 보내볼까 하고..."

"원장님 라디오 안 들으시잖아요?"

"이제부터 들어보려구요. 내가 김미숙 씨 팬이었거든. 오랜만에 들으니 좋던데?"

"아, 그러세요. 클래식만 틀어주는데 좋아요. 제 친구들 이야기 들으니 이거 로비에 틀어놓는 병원도 많던데요."

"그래요? 그럼 우리 병원도 틀어요."

"정말요? 환자분들도 좋아하실 거예요. 여기 처음 왔을 때 좀 삭막하게 느껴지더라구요. 그래서 음악이 있으면 좀 따뜻할 텐데 그런 생각했어요. 그런데 원장님, 로비에 틀려고 하면 좀 좋은 라디오를 사는 게 어떨까요? 제가 가지고 있는 건 소리도 약하고... 음질도 안 좋고..."

"그건 박간이 그냥 대충 골라서 사도록 해요."

"정말요? 원장님. 제가 안 그래도 사고 싶었던 라디오가 하나 있긴 해요."

박간호사는 처음 내 질문따윈 까맣게 잊어버린 듯하다.

"아 그래서, 사연은 어떻게 보내냐구요?"

"원장님, 진짜 사연 보내시려구요? 김미숙 씨 팬이었다고요? 뭔가 스토커 같은데... 풉."

겨우 진정한 심장이 다시 벌렁댈 것 같은 기분이다.

"뭐, 음악이 좋다던지... 나도 이참에 클래식 입문해 보려고요."

"아 그렇다면야... 잠시만요, 컴퓨터 좀 쓸게요."

내가 자리를 피하자 컴퓨터 쪽으로 의자를 끌어당겨 앉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니 오늘 아침 내가 왜 박간호사를 찾으러 탕비실로 갔는지 그 이유가 버뜩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은 말할 타이밍이 아니다. 참자. 참아야 한다. 어금니를 꽉 물었다.

"여기 콩이라는 걸 심으셔야 해요."

"콩을 심으라고요? 그게 뭐예요?"

"앱인데... 이걸 깔면 원장님 컴퓨터에서 라디오 바로 들으실 수 있어요."

"그럼 사연은?" 급한 건 사연이다.

"여기 채팅 창을 여셔도 되고, 홈페이지에 가셔서 사연을 남기실 수도 있어요. 근데 진짜 보내시게요?"

"고마워요. 이제 내가 혼자서 해 볼게요. 나가서 일보세요."


박간호사가 나가자마자 모니터에 떠 있는 "콩"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상하다. 아깐 분명 걸레냄새가 났는데... 그새 날아갔나? 아님 진짜 내 지랄맞은 예민함 때문에 환취를 느낀건가? 김미숙 씨가 턱을 괴고 있는 우아한 모습과 함께 일단 음악도 나오고, 오른쪽 아래 말풍선 모양을 누르니 채팅창이 나온다. 지금 들리는 음악은 뭘까? 생전 처음 듣는 악기다. 아니 들어본 적 있다 해도 모르는 악기다. 클래식은 문외한인데다가 좀 귀에 익은 듯한 음악이라도 제목까지 생각나는 경우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이 다다. 채팅창 옆을 보니 선곡표가 있어 클릭했는데 지금 몇번 째 곡이 나오는지 도대체 알 수 없다. 역시 클래식은 어렵다. 국시보다 더 어렵다. 그런데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 속에 한 아이디가 마치 누가 그 부분만 계속해서 확대를 하는지 모니터에서 튀어나올 듯 점점 크게 보였다. "rainbow0707" 그녀다. 주홍. 마지막으로 만난 지 10년이 넘어 가는데 그녀가 지금 내 앞, 모니터에서 방긋 웃고 있다.




8월 22일 태풍 지나고 활짝 갬


평범한 아침이었다. 아니... 불과 며칠 전까지 이런 아침이 전혀 아니었다. 4개월 정도 아침 시간 자체가 내게 없었으니까. 처음엔 봄을 심하게 탄다고 생각했다. 원래 봄만 되면 비실거리기 일쑤였으니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온몸에 근육이 다 빠져나간 듯 길을 가다가도 당이 떨어져 근처 도너츠 가게에 들러 평소 같으면 누가 줘도 손사레를 쳤을 만한 시럽 듬뿍 올려진 도너츠를 허겁지겁 먹고서야 겨우 기운을 차릴 정도였다. 조금 지나 여름이 되자 더위에 익숙해진 몸 컨디션은 그전만큼 힘이 없거나 하지 않은데, 그동안 무기력증에 적응이 되었는지, 아침에 도저히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 여름의 해는 얼마나 일찍 떠오르는지, 암막 커튼을 쳐도 동향인 침실에 커튼 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누워 있는 나를 비수처럼 찔러댔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나를 괴롭혔던 것은 이 세상 온갖 부정적인 표현을 끌어다 와도 모자잘 만큼 자기비하, 자괴감, 자기혐오였다.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는데 내 인생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하며 잘못 살아온 나를 단죄하고, 벌주고, 급기야 나를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후 나의 생활은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나 자신과 내기를 한 것처럼 폐인모드로 들어갔다. 여름마다 휴가 겸 나를 보러 오는 친구들에게도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말았다. 한번 크게 아파 본 사람이 몸이 안 좋다고 하면 그게 절대 핑계처럼 들리진 않는 장점(?)이 있다. 가끔 안부를 묻는 문자가 오면 단답형 대답으로 살아 있음만 알려줄 뿐, 전화도 한두 번 안 받았더니 그 다음엔 알아서 연락을 끊어 주었다. 사실 안 괜찮은데 남들의 괜한 걱정과 값싼 동정이 받기 싫어 억지로 괜찮다고 둘러대는 것도 솔직히 지쳤다.


한 달 전 즈음이었을까? 그때까지만 해도 정말이지 매일 어떻게 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덜 미안하게 죽을 수 있을까 그 궁리만 하고 있었다. 어떤 죽음이 가장 덜 슬프고, 가장 조용히 그리고 빨리 잊혀질까? 스스로 목숨을 끝내는 방법은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여러 가지가 있다. 한 십 년 사이 많은 유명인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앞다투어 나오는 자극성 기사에는 죽음에 이른 방법에 대해 참 친절하게도 설명해 주었다. 밤새 심장마비로 죽는다면 누가 언제 나를 발견할까? 4년 전 여기로 이사를 하고 난 뒤 나는 가족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멀리" 있는 존재가 되었다. 어떤 때는 마치 시차가 나는 외국으로 이민을 간 것처럼 대했다. 원래 관심 같은 걸 부담스러워 했던 나로서는 암 선고를 받은 후 멀리, 최대한 멀리 도망가고 싶었고, 그 효과는 시간이 갈수록 더 확실하게 나타났다. 그래서 내가 며칠 째 전화를 받지 않아도, 문자에 답하지 않아도 어디 피정이라도 갔나 여길 게 분명하다. 연락이 안 된다고 당장 여기까지 비행기를 타고 올 사람은 누가 있을까 시나리오를 짜 봤지만... 없다. 누구도 떠오르지 않는다.


우울증에 빠지고 엄마와 통화한 지가 언젠지 모르겠다. 지난 번 통화에서 나 때문에 불행하다고 하시는 엄마에게 폭발했다. 그래서 모질게 말했다. 우리 각자 행복은 각자가 챙기고 살자고. 나는 엄마가 불행하다고 해서 나까지 불행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 다신 나 때문에 밤에 잠이 안 와 약을 드신다는 소린 하지 말라고. 그동안 쌓였던 게 한꺼번에 튀어나와 말을 하는 나도 놀랐다. 아프기 전엔 결혼을 안 해서 죄인, 암 선고 이후엔 투병생활을 해서 죄인. 뭘 얼마나 자식 덕을 보려고 기대하신 건지 엄마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만족이 없으시다. 누구 집 사위는 용돈을 천만원이나 주고 가고, 누구 집 딸은 이번에 애가 과학고에 입학했다고 하고. 친구분들이 모여 그런 속보이는 자랑을 하고 다니시나 본데, 그 불똥은 왜 모두 내 차지란 말인가. 처음 암 선고를 받았다고 수술 날짜를 알렸을 때 미안하다시며 우셨던 건 도대체 뭐가 미안하셨던 거였을까?


그렇게 일상은 무너지고 있었다. 그 상태로 한달쯤 지나자 루틴처럼 해 오던 모든 활동이 멈추었다. 1주일에 한 번씩 근처 성당에 나가 영어성경읽기 수업을 하던 것부터 그만 두었다. 신부님은 건강부터 챙기라며 책임감 때문에 억지로 봉사를 할 필요는 없다고 오히려 나를 걱정하시니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그리고 올레지기, 요가 수업, 숲길 걷기... 봄부터 여름까지 시간이 어떻게 흘렀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온몸으로 밀어내는 동안 하루는 24시간에서 1시간 정도로 준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어느 날은 잠이 쏟아져서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때도 있었다. 절대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코마 상태"로 스무 평 아파트 감옥에 나를, 내 의식을 가두었다. 이건 벌이었을까? 한참 지나 그런 생각을 한 적 있다. 그때 나는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 단죄하고 있었다고... 미래에서 온 나는 터미네이터 2에 나온 T-1000처럼 무자비했다.


제주에는 육지와 달리 4월 중순에서 5월 초 사이 고사리 장마라는 게 있다. 고사리가 자랄 시기에 하루가 멀다하고 내리는 비와 안개로 여름이 되기도 전에 습도가 높아진다. 제주도로 이사하면서 바로 제습기부터 구입했지만 그걸로 역부족이었는지 하루종일 돌려도 청소를 손놓다시피 한 집에는 울긋불긋 곰팡이가 피기 시작했다. 천정에 핑크색 얼룩이 하나둘씩 보이더니 욕실에는 물때가 나이테를 그리는가 싶을 정도로 한줄 한줄 늘어갔다. 그러던가 말던가... 인간이 얼마나 지저분한 환경에서 살 수 있는가 생체실험을 했다고나 할까. 가끔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에 나오지 않는가. 쓰레기 더미에 사는 사람들. 그걸 볼 때는 어떻게 저렇게 하고 살 수 있지? 답이 없는 인생이네 혀를 찼지만 누구에게나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사정이라는 게 있다. 결론은 그렇게도 살아진다는 말이다.


혼밥시대, 1인 가구. 몇 년 새 세상이 완전 바뀌긴 했다. 전자렌지에 잠시만 데우기만 하면 되는 간편조리식품들이 얼마나 많이 출시되었는지 나는 이 분야에서 백종원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레토르트 음식만을 소개하는 그런 프로그램도 곧 나올 것 같지 않은가? 게다가 몇 년 사이 택배 서비스와 음식 배달 서비스의 시간 전쟁으로 휴대폰과 결제할 카드만 있다면 굶어죽지는 않는다. 그래 잠시 굶어 죽을 수 있을까도 생각해 보았다.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곡기를 끊기가 얼마나 힘든지... 하긴 더 폼나게 살려고 하는 다이어트도 힘든데 생을 포기하는 자살로는 그닥 알맞지 않는 방법이다. 가끔 오랫동안 수행으로 다져온 인도나 티벳의 스님들이 곡기를 끊고 스스로 열반에 든다는 뉴스를 본 적은 있다. 그렇지만 나는 살고 싶은 의지는 없지만 배고프면 밥부터 찾는 일개 나약한 인간이었음을 확인했다. 절대상황에서 의지는 본능을 넘지 못한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무한 연기된 영어성경읽기 수업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뭐 여전히 밖은 두문불출하고 집은 창세기 시대 이전으로 돌아간 듯 혼돈 그 자체였지만 하루에 30분 정도 늘 읽던 영어묵상을 정리하면서 무언가 기대가 있었던 건 아니다. 이걸 읽다보면 하느님이 나를 구원하시리라는 믿음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암선고 이후 나는 그렇게 나를 위로하고 무너지려는 나를 붙잡았다. 나에게 큰 축복을 내리시려고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거라고. 그러니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된다고. 그러나 그리고 3년반 동안 나는 더 나빠졌다. 수술 후 건강이 회복되었다고 해서 그걸 고마워하기엔 너무 여유가 없었다. 그동안 모아놓은 얼마 안되는 돈은 손가락만 빨고 있어도 손가락 사이로 모래 빠지듯 사라지고 통장 잔고는 계속 마이너스를 찍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못 되었다. 남들보다 좀 나은 게 영어 실력이라 동네 아이들에게 과외도 했다가, 어디 영어 통역이 필요하다고 하면 재능기부나 다름없는 행사에 나가기도 했다. 그마저도 우울증이 시작되면서 모두 손을 놓고 나니 플러스 없이 마이너스만 계속 되는 인생을 언제까지 살아야 하나 싶은 회의와 회한이 매일 기하급수로 늘더니 나를, 내가 있는 공간을 모두 잠식해 버렸다.


그런데 기적이라면 기적 같은 일이 내게 벌어진 것이다. 영어성경읽기로 다시 시작한 묵상을 한 지 딱 한달 째 되는 날 나는 갑자기 스쿼트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동안 참을 수 없던 배고픔을 조금씩 견디게 된 것이다. 욕실 문에 도어앵커를 걸고 튜빙밴드를 당기면서 스쿼트를 시작하니 오십 개쯤에서 송글송글 땀이 맺히기 시작하면서 뭔가 알 수 없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트레이너가 힘은 허벅지의 대근육에서 나온다더니 진짜 그 말이 사실인지, 50개부터 시작한 스쿼트는 1주일 정도 지나니 100개는 거뜬히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흐물흐물 지방만 가득 차 있는 것 같던 허벅지가 탄탄해진 것보다 당장 달라진 것은 아침 기상 시간이 점점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점이다. 그보다도 이제 더 이상 죽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 내일 뭘 할지 계획을 세운다는 것이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딱 한달 묵상을 한 것뿐이다. 내가 처절하게 매달리며 기도할 땐 등을 돌리고 계신 듯 느껴지던 주님이 아무런 기대도 없이 그저 주님의 말씀을 읽기만 하니 나를 드디어 봐 주신 것이다. 그러다 한 구절을 읽는 순간 눈물이 터져나왔다. 그것도 사람이 많은 스벅에서. 사람들이 흘깃흘깃 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참을 수 없었다.


"Forgive God for not helping you." 내가 그동안 얼마나 주님을 원망하고 있었는지... 나는 그동안 기도하면서 저를 용서해 주십사 엎드렸지만 마음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하느님은 나를 돕지 않으셨고, 그에 대해 나는 하느님의 해명이 필요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침묵하시는 주님이 나를 무시하거나 나에 대해 무관심하다고 어떻게 그러실 수 있냐고 따져 물었던 것 같다. 그런 악다구니도 지칠 때즈음 나는 세상과 맞잡고 있는 손을 놓아 버렸다. 더이상 매달리기도 구차하고,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하느님은 그냥 갑질하는 신일 뿐이었다. 신앙을 가진 지 20년 만에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그동안 나는 이런 체험이 없었기 때문에 믿음은 종이조각처럼 얕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렸고 작은 불씨에도 금새 타버렸던 것이다. 그냥 어디 종교란에 가톨릭이라고 적을 정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어디에서든, 누구에게든 내 신앙을 "증거"할 수 있다. 개신교처럼 간증을 하라고 해도 나는 자신있게 나갈 수 있다. 나는 완전히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오늘 아침... 그동안 먼지가 뽀얗게 쌓인 라디오의 전원을 켰다. 99.9 주파수를 바꾼 적이 없는데 무슨 이유인지 노이즈가 들려서 다이얼을 조금씩 돌리며 음악을 찾았다. 무슨 기막힌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정해진 운명이었을까. 마침 흘러나온 곡이 "Over the rainbow"였다. 마치 그동안 내가 일어나기를 그래서 이 곡을 다시 듣기를 기다린 것 마냥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컴퓨터를 키고 채팅창을 열었다. 낯익은 아이디들이 보인다. 타이핑을 하려니 손이 약간 떨렸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할 말은 많지만 여기까지 치고 엔터키를 눌렀다. 그러자 여기 방장이나 다름없는 효정님을 비롯하여 여러분들이 앞다투어 인사를 전하는 바람에 커서를 올려서 한 분 한 분 남긴 인사들을 주욱 읽는데... "별일 없으셨죠? 하도 소식이 없으셔서 걱정했어요."라는 마리님 글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별일... 그래 생사의 기로에 있는 사람에게는 별일이 아니겠지만 사람은 자기 손톱 밑에 낀 가시가 제일 아프다고, 나는 사람들에게 차마 말도 못 꺼내는 "별일"을 겪었던 거다.



8월 22일 10시쯤이었을까?

rainbow0707 그 아이디를 확인하는 순간 가슴은 아침에 걸레 테러를 당했을 때는 아무것도 아니다 싶을 정도로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손바닥만한 채팅창에는 쉴 새 없이 대화들이 올라가고 대부분은 오랜만에 봐서 반갑다는 인사다. 그녀가 그동안 여기를 들르지 않은 게 확실하다. 클래식 전문 라디오라는데 다들 음악은 뒷전이고 그녀는 거기 있는 사람들과 오랜 친분이 있는 듯 한 사람 한 사람 출석을 부르듯 인사를 전한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어디 아팠냐고 구체적으로 묻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녀는 계속 웃는 이모티콘을 보낼 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답을 피하는 것 같다. 무슨 말을 적어 볼까 싶어 채팅창 아래를 클릭하니 로그인을 해야 한단다. 로그인을 하려면 회원가입을 해야 한다고 하고... 나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에 끼인 세대가 확실한 게 이런 절차와 양식에 좀처럼 익숙해지지도 속도가 빨라지지도 않는다. 그런 내가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빨리 로그인이라는 걸 해서 글을 남길 수 있을까 싶어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래 카카오톡 계정으로 로그인이 보여 일단 그걸로 시도해 보기로 했다. 전화번호는 입력했는데 비밀번호라니... 카카오톡에 비밀번호가 필요했나? 다시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급한 성질과 설렘이 묘한 시너지를 일으켜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비밀번호 찾기로 가서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나니 갑자기 와이프 프로필 사진을 찾으란다. 설마 이 방에 몰래카메라라도 설치해놓고 간 건가? 도둑은 제발이 저린 게 맞다. 제 발도 저리고 제 손도 떨리고. 갑자기 화가 났다. 내가 뭘 했다고! 내가 무슨 죄라도 지은 것처럼 아무도 없는 방에서 눈치를 보는지. 나이를 먹어도 간은 커지지 않는다. 오늘 아침 헤어스타일만큼 맘에 안 든다.


비밀번호를 설정하고 드디어 로그인을 했다. 무슨 말을 적어야 할지... 20년 전 채팅은 어떻게 했더라. 이 나이에 채팅이라니... 문자 메시지도 카톡도 꼭 필요한 경우 그것도 단답형으로 일관하는 인간이 나다. 한참을 키보드를 쳐다보고 있다가 "저 이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내일부터 출석 잘 할게요."란 글을 보고 안되겠다 싶어 얼른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 드립니다."를 치고 엔터키를 눌렀다. 잠시 채팅창에 정적이 흘렀다. 그러자 곧 그녀에게 또 인사를 전하는 글들이 빛의 속도로 쏟아지며 내 글을 안드로메다로 밀어냈다. 그녀는 봤을까? 뭐 봤더라도 나인줄 어떻게 알겠어. 그러는 사이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강우재님 반갑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내 이름을 안다는 말인가? 머리가 하얘졌다. 분명 내가 봤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너무 놀라고 당황하는 사이 나도 모르게 컴퓨터 전원을 꺼버렸다. 중3때 누나... 누나라고 부르고 있는 강우경이 내 방을 노크도 없이 들이닥쳤을 때 야동을 보고 있던 나는 그렇게 반응했다. 무릎반사처럼 무조건적으로 발이 앞으로 나가 책상 아래 있던 비디오의 전원을 꺼버리는 것으로.


그때 마침 박간이 김할머니를 모시고 들어왔다. 이 할머니에게 예약시간이라는 게 무의미하다. 그냥 당신이 오고 싶으실 때가 바로 정한 예약시간이다. 1주일 된 박간도 이제 포기 상태인지 오늘은 로비에서 실랑이도 벌이지 않은 것 같다. 아니 무슨 일이 벌어졌어도 좀 전의 나는 전쟁 경보가 울렸어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을 게다. 그럴 정신이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오늘도 평안하시죠?"

"쓰벌넘, 내가 안 아프면 니한테 오겠냐!"

"아이고... 오늘 아침은 또 뭐때문에 심기가 불편하실까?"

"니 치료는 제대로 하는 거 맞나? 무릎이 도져 잠 한숨 못 자고 왔다."

"어디 한번 볼게요."

김할머니는 오랫동안 류마티스염을 앓고 계셔서 조금만 기압이 떨어지는 흐린 날이면 어김없이 통증이 재발하신다. 얼마 전부터 줄기세포를 이용한 주사를 권해드렸는데 비보험 항목에다 단기간에 큰 효과가 나타나는 게 아니라 김할머니에게 나는 대동강에서 물을 파는 봉이 김선달만큼이나 다름없는 사기꾼이 되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돌아가신 영감님이 큰 재산을 물려주고 가셔서 자식들도 할머니한테 벌벌 긴다는데 이 할머니가 손자뻘인 나도 알아서 기게 만들고 싶으신지 늘 타박이다. 모르긴 몰라도 인근 병원에서 괴팍한 할머니 성격에 다들 혀를 내두르고, 지난 번 정형외과의사협회 강북지회 모임에서 만난 닥터 한은 나를 보자마자 "강닥, 김할머니 그 병원으로 갔다며?" 하고 이죽거리며 웃어댈 정도였다. 돈이 많으면 뭘 하는가. 인정도 대접도 못 받는데... 그러나 나는 그런 김할머니가 좀 안쓰러웠다.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도 나고. 그래서 김할머니의 욕짓거리가 어떤 때는 그 어떤 애정표현보다 정겹게 느껴진다. 아직 정정하시구나. 백수는 누리시겠구나. 아들 며느리 들으면 환장하겠지만 김할머니는 고질병인 류마티스염을 제외하고는 멀쩡하시다. 무릎까지 좋으셨다면 지금 연세에도 세계일주를 떠나셨을 게다. 십 년 전 영감님이랑 크루즈 여행을 못 가신 게 두고두고 한이라고 하셨으니 말이다.


"우리 할머니 어서 무릎이 나아야 크루즈 타시지."

"이넘아 내가 왜 니 할머니고!"

"그럼 뭐라 불러 드러야 하나? 김여사님이라고 부를까요?"

"니가 나를 갖고 노는구나. 고치라는 병은 안 고치고."

"이게 그렇게 쉽게 안 낫는다니까요. 주사는 매일 놓을 수 없으니까 오늘은 물리치료만 받으시고 다음 예약 때 주사 놔 드릴게요."

"니 돌팔이재? 내 받아줄 때 알아봤다."

"아이고. 김여사님. 고정하시고. 박간 김여사님 모시고 가서 물리치료 받으시게 해 드려요."


김할머니는 억지로 웃느라 입 주위 근육이 마비가 될 것 같은 내 면상을 째려 보시다가 박간이 끌어안다시피 당기자 어쩔 수 없이 내 방을 나가시면서도 궁시렁궁시렁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하신다. 그러시던가 말던가. 이제 첫 환자 봤는데 어깨에 담이 오는 것 같다. 기지개를 펴다 박간이 인터폰으로 "선생님, 김할머니 오더 확인해 주세요."라는 소리에 멈칫 했다. 컴퓨터에 전원을 다시 키면서 별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려 몰려왔다. 그녀는 내 이름을 봤을까? 봤으면 나라고 생각했을까? 나를 기억할까? 나를 기억이나 할까? 당장이라도 그녀가 IP 주소를 확인해서 우리 병원에 들이닥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나, 아니 그 전에 그녀는 IP 주소가 뭔지도 모를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안되겠다. 박간을 불러야겠다. 전두엽에서





















김.이.현.

새벽부터 내리는 비가 봄비치고는 제법 쏟아붓는 아침이어서 그랬을까, 생각보다 공원은 한적했다.

검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십자가 형태의 비석에 빗물이 마치 예수님의 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수많은 알파벳 사이로 보이는 한글 이름은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눈에 바로 띄었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이름에 묻은 빗물을 닦아 내려고 비석에 향해 팔을 뻗었다.

살짝 떨리는 엄지손가락 아래 얼음 송곳보다 차가운 통증이 신경을 타고 흐를 때 즈음 순간 나는 당황하고 있음을 알았다.

빗물이 아니라 강력 접착제라도 된 듯 비석에 붙은 손가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왼손으로 바치고 있던 우산을 팽개치고 온힘을 다해 오른 손목을 붙잡아 당겼다.

찰나였을까, 슬레이트를 치고 다음 신으로 급하게 넘어온 느낌이 들었다.

꿈속에서 레테의 강을 건너는 나를 발견하고 붙잡는다고 해도 이만큼 용을 쓰진 않았을텐데 금새 붉어진 손목을 보니 쓴웃음이 났다.

누군가 나의 모습을 보았으면 그 이름의 유가족이나 친구려니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20년 전 내가 버리고 도망쳤던 바로 내 이름이다.


나는 살인자다.

암수살인이나 완전범죄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다.

나는 살인혐의로 5년간 상고와 원심 파기를 거쳐 최종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렇지만 아내는 나 때문에 죽은 것이 맞다.

5년의 재판 동안 1년이 채 안 되는 나의 결혼생활은 대중들에게 낱낱이 공개되는 것은 물론 무참히 난도질 당했다.

그뿐이었을까.

이름도 가물가물한 동창생들이 학창시절 나의 별 쓰답지도 않은 행동들에 의미를 부여해 이야기하면 기자들은 앞다투어 온갖 자극적인 제목으로 조회수 전쟁을 하고 있었다.

그 "소설" 속 나는 인면수심의 사이코패스나 다름없었다.

수많은 정황은 범인이 나라고 가리키고 있었지만 결정적인 물증이 없었다.

처음 만난 변호사에게 나는 아내가 나 때문에 죽었다고 말했지만 그건 갑작스런 사고에 대한 남편의 죄책감으로 포장되었다.

한번도 내가 나서서 무죄라고 주장한 적 없지만 법은 나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나는 매일 교수형에 쳐해졌다.

연일 언론은 부실한 초동수사와 물증에 집착하는 우리 사법체계의 모순에 대해 성토했고 그 아래 달린 댓글 속 분노는 한참을 지난 후 확인했을 때에도 스크린을 녹일 듯 들끓고 있었다.

재판이 이어지는 5년 동안 잇따른 부모님의 죽음, 형제들과 지인들의 절연을 겪으며 무죄가 아니라 형을 받고 만기출소를 한 다음에도 나는 이곳에 살 수 없음을 직감했다.

자살이든 타살이든 당장 내일 내가 주검으로 발견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나의 무죄 방면을 위해 물심양면 애써 주신 작은형제회 소속 스테파노 신부님과 함께 한동안 여기저기 인터뷰를 했다.

기사의 내용은 대부분 무죄를 선고받아도 잃어버린 5년의 세월은 보상받을 수 없다는 식으로 거대한 국가 권력에 희생된 나약한 한 인간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물론 그 기사에조차 나의 무죄를 믿는 댓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하느님은 그 누구도 카인에게 복수할 수 없게 하심으로써 카인의 죄를 용서하셨다.

그러나 정말 카인은 용서받은 것이 맞을까?


뉴욕은 처음이다.

3개월 관광비자를 받는데도 미대사관에서 신원보증을 요구했다.

스테파노 신부님과 뉴욕에 있는 작은형제회 수도원장까지 나서서 이메일을 보내고 나서야 겨우 미국 입국이 허락되었다.

인터뷰 내내 의심의 눈초리를 숨기지 않았던 직원에게 나는 잠정적 살인자였다.

비자가 거부되었을 때 충분히 예상되는 구설수에 오르고 싶지 않았을 뿐, 혹시라도 내가 본토에 눌러앉아 불법 체류자가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어쨋든 나는 3개월이라도 이 나라를 벗어나고 싶었고, 스테파노 신부님이 나서서 뉴욕행을 권하셨다.

JFK 공항에는 미국에 연수 겸 사목활동을 하고 있는 미카엘 신부님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간의 스토리를 모두 전해들었을텐데 처음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면서 그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운전을 해서 맨하탄으로 향하면서 몇가지 질문에 나의 단답형 대답을 듣고서는 이내 피곤하시면 잠시 주무셔도 된다고 했다.

그 말이 끝나자 마자 나는 "네. 그럼." 하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스피커를 통해 어느 걸그룹의 노래가 나왔다.

볼륨을 급하게 줄이더니 얼마 안 가 흥얼거리며 신부님이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는데... 위내시경 검사 후 수면마취 상태에서 깨어날 때처럼 의식과 무의식 그 사이에서 여러 장면들이 파노라마로 스쳐지나갔다.



나는 게이다.

맞다. 당신이 알고 있는 의미의 게.이.

아우팅 당한 적도, 그렇다고 커밍아웃을 할 생각도 없는 게이다.

물론 가족들과 친구들은 그동안 나의 성향을 통해 내가 "게이"일 거라 짐작은 하는 것 같은데 아무도 나에게 대놓고 물어 본 적 없다.

그게 나에 대한 배려인지, 사실을 직시하고 싶지 않은 그들의 용기 부족인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런 내가 1년 전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그들의 놀람(하나같이 모두 똑같은 반응이었다)은 그간 "오해"에 대한 미안함이었을까, 아님 걱정과 우려를 내려놓을 수 있는 안도였을까...


대학 졸업 후 딱히 취업할 생각이 없었던 나는 맞벌이하시는 부모님과 나와는 달리 졸업도 하기 전에 대기업에 척하니 붙어 한동안 부모님의 자랑이었던 누나를 대신해 살림을 도맡게 되었다.

처음에는 적어도 밥만 축내는 "식충이" 백수는 되지 말자 싶어 청소와 빨래부터 시작했는데 간간히 엄마를 도와드렸던 때와 달리 가사일에 꽤 적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드럼 세탁기를 멍하니 바라보며 물아일체를 느낀다고나 할까... 요즘 젊은애들은 불멍, 물멍 이런 말을 쓰던데 굳이 이름 붙이자면 세멍인가.

그러다가 세탁기가 놓여 있는 앞 베란다에 작은 테이블을 갖다놓고 본격적으로 세멍을 하다가 라디오와 커피 한 잔과 함께 사시사철 변하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백수생활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 시절은 요즘처럼 취업난이 심했을 시절도 아니어서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는 앞 동 아줌마가 눈이 마주치자 후다닥 몸을 숨기시기도 했다.

20대 후반 나에게 오전 열 시는 그런 시간이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직장생활을 아직 하고 계셨고 그래서 경제적인 압박도 없기도 하였지만 어느 순간 나의 "게이" 성향은 역린 같은 것이 되어서 우리 가족은 물론 친척들까지 나를 중앙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달항아리같이 대하셨다.

당연히 취업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도 없었고, 명절에 만나 나에게 앞으로 뭘 하며 살 거냐고 묻는 삼촌이나 고모도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마냥 속이 편하시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평생 나를 끼고 살 수도 없고, 누나 입장에서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의 케어가 자기 담당이 될까봐 걱정되었을 게 당연하다.


한 1년 쯤 지났을까.

집안 일은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어졌고 일상은 매일 도돌이표를 찍는 반복의 연속이었다.

이제 우리집에서 "주부"로서 내 모습은 어색함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자연스러운 그림이 되었다.

실컷 책을 보고 생전 처음 맛보는 요리를 선보여도 맛있다는 영혼 없는 칭찬도 하지 않는다.

"주말에는 너도 쉬어야지" 하면서 엄마와 누나가 번갈아가며 당번을 서더니 그것마저도 어느샌가 유야무야 사라졌다.

그런데 그게 뭐 섭섭하거나 화가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누구처럼 매달 통장에 찍히는 월급에 저당잡힌 한 달짜리 인생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졸업 후 가끔 삼인방 친구들과의 술자리에 불려나가면 잘 마시다가 끝에는 결국 내가 술안주로 올려졌다.

"씨발 넌 좋겠다... 이런 꼴 안 보고 살아서..."

"니 팔자가 상팔자다."

"우리 중 니가 제일 성공했네."

"부모님 잘 만나서... 부럽다 새끼"

그냥 취해서 하는 말이려니 대꾸하고 싶지도 않았다.

덜 취한 녀석 하나가 다음날 전화해서 대신 사과한다고 했을 때도 아무렇지 않다고 했다.

나도 취했으면 다른 본심이 나왔을지 모르지만, 사실 난 괜찮았다.

쓸데없이 자존감만 높았던 덕분이었까.

그게 자존감이라고 생각도 안 했지만 그때 나는 진짜 괜찮았다.


여느 오후나 다름 없는 어느 날, 아파트 상가 슈퍼에 장을 보러 집을 나섰다.

근처 초등학교 앞 하교하는 꼬맹이와 그들을 픽업하러 온 어머니들 무리가 멀리서 보였다.

츄리닝에 쓰레빠, 그날따라 삐죽 솟아오른 대파 탓에 누가 봐도 장바구니가 분명한 걸 들고 저들 사이를 지나가야 한다.

학원을 가기 싫다고 떼쓰는 아이에게 한 어머니 하는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가슴에 꽂혔다.

"너 공부 안 하면 저 형아처럼 돼."

분명 거기 있던 애들 다 들으라고 하는 말도 아니었고, 내가 들을까봐 눈치도 보고 하는 말이었는데 소머즈처럼 주변 소음은 모두 사라지고 그 말만 들렸다.

갑자기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차마 들지 못하고 땅을 보며 걸어가는데 아이가 내 몸에 닿을 세라 잡아당기는 어머니의 다급한 손길이 보였다.

불가촉천민... 역사 시간에 배웠던 조선의 백정 그리고 현재까지 인도에 남아 있다고 하는 달리트가 2010년 서울 강남 한복판에 나타난 것이다.

한 번도, 단 한 번도 이렇게 사는 내가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날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온몸을 감싸는 수치에 당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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