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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봉기 Aug 08. 2022

'접합'과 '의미의 닻 내리기' -다니엘 리히터

다니엘 리히터 '나의 미치광이 이웃전'을 보고

며칠 전 갑자기 안 어울리게(?) 영화평을 그것도 일본잡지에 기고하게 된 한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멜로와 미스터리의 장르 혹은 이야기의 결합을 그냥 결합 말고 좀 그럴듯하게 표현하는 말이 뭐냐?”


“그런걸 왜 나한테 묻냐...그래도 굳이 답하자면 ’접합‘ 혹은 ’접목‘ 어때? 그냥 한자로만 쓰지말고 articulation이라고 꼭 쓰고...”


  A라는 담론 혹은 쉽게 이야기와 B라는 담론이 특정 상황에서 결합해 C라는 새로운 담론을 만들되 A와 B의 의미도 남아있는 그래서 단순한 결합이나 A와 B가 합쳐서 C로 변했다는 변증법적인 결과와는 다른 상당히 역동적인 이야기의 결합이 접합이라 할 것이다. 며칠 전 친구의 질문에 잘 대답했나하는 고민을 풀지 못한 채 어제 일요일에 역시 머리 식힐 겸 스페이스K의 다니엘 리히터 개인전 <나의 미치광이 이웃>전을 보러갔다.


  역시 스페이스K의 전시답게 화려한 색채의 회화대작, 그리고 구상과 추상의 경계, 그리고 독일 신표현주의...그런데 또 의미적으론 나에겐 이 ‘접합’ 그리고 더 나아가 의미의 닻내리기라는 20여 년 전 학창시절 공부한 용어들 그리고 며칠 전 사업에 바꾼 친구가 느닷없이 한 질문에 대한 답이 마구 묻어나온 전시였다.


  이 전시는 다니엘 리히터의 2가지 경향 작품들로 2세션으로 나눠있었다. 하나는 이전 경향 작품들인 ‘역사적 서사화’ 즉 역사적 사실이나 책에서 따온 이미지를 다른 이야기와 결합시킨 그림들이었고 두 번째는 신체의 특징들을 추상화해서 거기서 새로운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회화적 추상성이 더 강한 작품들이다. 


  첫 번째 ‘역사적 서사화’도 그렇지만 요즘의 신체적 추상화도 마찬가지로 그의 그림들은 의미들의 결합이 두드러진다. 테러나 사회적 이슈, 문학작품의 한 대목 등을 소재로 하되 다른 역사적 배경, 동서양의 대립이나 소수자에 대한 편견 등을 같이 느끼게 하거나 아니면 그런 사회적 의미 대신 그림의 분위기로 전하는 개인적인 감정, 공포, 삶에 대한 시각 등을 결합 내지는 모두 느끼게 해준다. 그 결합된 이야기 중 어느 것을 중시할지, 아니면 그 둘이 결합된 새로운 이야기를 이해할지 그런 건 보는 이의 마음이다. 그런게 접합이다.


그런가 하면 그의 그림들은 특이하게도 다 긴 제목들이 있다. ‘영원’ 같은 단순한 것도 있지만 19세기 회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그림인 ‘그러나 너를 돕 건 내 본성에 어긋나, 라고 늑대가 말했다’ 같은 기묘하게 긴 것들도 있다. 보통은 이런 제목 붙이기는 의미를 한 지점에 고정시켜주는 앵커링의 역할을 한다. 뉴스의 앵커들이 뉴스아이템마다 첫머리에서 두세문장으로 뉴스아이템 내용을 미리 소개해 의미를 잡아주는 것처럼 제목은 그런 의미의 고정 역할을 한다. 그런데 다니엘 리히터의 제목들은 그닥 그런 역할을 못한다.   

케냐와 탄자니아에서 벌어진 미국대사관 테러사건을 마치 적외선 카메라처럼 표현한 그림은 제목이 ‘생각이 많은 자는 더 이상 무엇을 해야할지 모른다’이다. 이래서는 도저히 의미가 고정되지 못한다. 도대체 왜 이런 제목을 달았나 싶은데 전시회장에서 상영한 작가의 영상을 보니 좀 이해가 갔다. 원래부터 작가는 그런 의도로 제목을 단 것이 아니었다. 작가왈 “나는 자녀들을 떠나보내는 심정으로 작품에 제목을 달았다, 제목을 달고 그 작품을 보내고 잊어버리는 것이다. 이제 나와는 별개다, 해석은 보는 이들에게 달린 것이다...”


  심지어 리히터는 자신의 회화론에 대해 이렇게도 지론을 펼친다. ‘처음에 무엇을 표현할지 미리 알고 그리면서도 내가 무엇을 표현하는지 알면서 그리는 그림은 지루하다. 나는 지루한 것을 싫어하고 그래서 결국 무엇이 나올지 모른다...’ 물론 직역은 아니지만 대충 이런 요지의 설명이었다.


  사실 좀 충격적이다. 특히나 나같이 쓰기 전 ‘야마’ 즉 주제를 잡고 취재과정에서도 그 주체에 맞는 사실을 수집하고 해석해서 하나의 변할 수 없는 결론으로 달려가는 글쓰기만 20년 넘게 해온 기자인 나로서는 정말 충격적인 지론이었다. 하지만 그는 닫힌 텍스트인 기사가 아니라 열려있는 아니 열려있어야할 작품을 쓰는 예술가 아닌가? 예술텍스트란 여러 해석이 가능해야 무수한 수용자를 감화시킬 수 있고 지금 뿐 아니라 미래의 시대에도 다른 해석으로 살아남을 수 있으니...


  아무튼  다니엘 리히터는 자신의 작품을 보고 관람자가 무엇을 느끼기를 바라냐는 질문에 대해선 ‘집에 가서 내 그림을 바탕으로 더 나은 것을 느끼거나 그리는 단지 재료가 되기를 바란다...그러면서 작품을 보며 코를 파도 좋고 양쪽 코를 다 파면서 봐도 좋고....’하는 코믹한 얘기까지 했다.(뭐 맥락이 좀 다를 진 몰라도 코파는 얘기는 분명했다.)


  아무튼 친구의 뚱딴지 같던 질문에서 시작해 다니엘 리히터의 지론으로 넘어갔다. 나도 리히터의 지론에 좀 그래도 한 몫 낄 수 있는 점은 있다. 적어도 나도 SNS에 올리는 글은 처음부터 주제가 정해지고 쓰는 동안에도 내가 무슨 결론으로 갈지 정해놓고 쓰진 않는다. 특히나 전시에 관한 글은 정말 10분에서 30분 사이의 짧은 시간에 쓰는데 결론이 어떤 것으로 빠질지 나도 모르고 쓰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렇게 어떻게 끝날지 모르는 글이 끝나고 나서 보면 내가 20년간 쓴 기사들보단 확실히 ‘재밌다’.


  아무튼 쓰기도 전에 결론이 뻔하지 않냐고 보지도 않고 미리 아는 척 하는 사람 많은 대표적 분야인 ‘외교안보’ 뉴스를 다루다보니 이런 열린텍스트에 대한 갈망은 나도 크다. 물론 한가지 외교안보뉴스의 결론을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기자나 편집자의 상당수는 맥락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떨어지는 경우가 많긴하다.


  그래도 어쨌건 닫힌 텍스트보다는 20여 년 전 석사논문 쓸 때 마구 쓴 용어인 ‘접합’ 등을 써서 박사논문을 쓰고 싶은 욕망은 언제나 생긴다. 


  나도 사실 ‘문화적 담론들의 접합을 통한 운세 아바타의 앵커링과 의미 YUJI에 관한 연구’ 정도의 논문을 표절률 40% 이하로 쓰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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