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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시가은리 Feb 05. 2022

45만 원으로 만든 제 2의 고향

주말에만 삽니다 Episode 1

근 1년간 시국이 시국인지라 집, 회사만을 반복하며 점점 집순이가 되었다. 평일이 지나 주말이 되면 침대와 한 몸이 되어 넷플릭스와 함께 하는 삶이란, 치맥 뺨칠 만큼 달콤하다. 하지만 문득 여기에 취해있다간 내 인생 아무것도 남지 않겠다는 생각에 이번 주말은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75,600원 

제주도, 여수, 강릉... 부산? 어딜 갈까 떠올리다 부산에서 멈췄다. 지금 회사에 입사하기 전 쉴 겸 떠났던 곳도 부산이었기 때문이다. '쉬러 갔었는데 또 부산으로 쉬러 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상하게 끌렸다. 굳이 표면적인 이유를 찾자면 이랬다.


1. 나는 장롱 면허다 → 대중교통이 편한 곳
2. 조용한 바다를 보고 싶다  바다가 있는 곳  
3. 특이한 공간들이 좋다  이색 카페, 전시 등 볼거리 많은 곳   


심지어 비행기만 저렴하게 잘 찾으면 KTX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1시간 만에 편하게 갈 수 있다. 부산에서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모든 면에서 부합했던 최적의 여행지라 비행기표부터 끊었다. 왕복 75,600원에 결제한 비행기 티켓. 그게 여행의 시작이었다.



321,172원  

눈 뜨면 펼쳐지는 풍경

숙소는 바다 뷰의 오피스텔을 선택했다. 오피스텔에서 살아보고 싶었기 때문에 일부러 오늘의 집에 나올 법한 통창 있는 방을 찾았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살아보겠나. 그렇게 첫날은 하얀 이불을 덮고 귤을 까먹으며 5번도 넘게 본 <옷소매 붉은 끝동>을 정주행 했다. 창 밖의 해지는 바닷가를 구경하기도 하면서.



기타 비용

부산 오면 배달 어플 보는 재미도 있는데 올 때마다 서울에선 볼 수 없던 메뉴들이 업데이트된다. ‘김치말이 김밥’, ‘시래깃국’, ‘빼떼기 죽’, ‘구슬 떡볶이’, (서울은 찾아야 하지만) 분식집에 꼭 있는 ‘비빔만두’ 등. 서울에선 잘 먹지 않던 떡볶이도 부산에선 꼭 먹고 간다. 요즘엔 서울에도 통통한 가래떡 떡볶이가 종종 보이지만 부산에서 먹는 맛은 다르다. 기분 탓인지 이유는 모르겠다. 아무튼 아침부터 떡볶이를 간단히 먹고 근처에 '해리단길'이 있다길래 밖을 나섰다.


문이 세 개인 이 집의 가운데 문은 어디로 들어가는 문일까? - 안전 전시장의 물건은 파는 거겠지?


'~단길'은 전국적으로 퍼져갔나 보다. 해운대의 '해리단길'에 이어 전포동의 '전리단길'도 발견했는데 이미 꽤 유명한 카페 거리였다. 해리단길에선 특별히 그 상권만의 특이점을 발견하진 못했고 특이한 벽화들이나 골목 구경하는 정도였다면 전리단길로 넘어와선 가게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가보고 싶었던 카페 두 곳이 전포동에 있어 넘어오게 되었는데 외국 같은 비비드한 컬러로 시선을 끌거나 7080 빈티지 느낌의 네이밍과 간판으로 호기심을 끌었다. 1년 반 전에 왔을 때보다 더 외국 스타일로 변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가보고 싶었던 카페 두 곳 모두 해외여행 콘셉트였다. 듀코비와 22게이트인데 듀코비는 미국 하이틴 영화에 나올 법한 고등학교를 그대로 구현해 냈고 22게이트는 만석이라 밖에서만 봤지만 공항 콘셉트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 카페는 더 이상 앉아서 음료 마시는 공간이 아니다, 경험을 사는 곳이다'라는 말을 들은 적 있는데 그 말이 현실로 와닿았던 순간이었다.


맨 오른쪽 사진은 와인숍 포도이다. 전날 한 디자이너가 소개하는 부산 핫플이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알게 된 곳인데 근처에 있어 가봤다. 정말 눈 돌아갈 만큼 다양한 와인이 있었고 와인 앱에서 평점 높은 와인들도 꽤 있었는데 배송까지 가능해 바로 세 병 사서 택배로 보냈다. (여기서 알게 된 시라는 내가 먹은 와인 중 제일 깔끔했다)


소품 숍, 빈티지 숍도 구경하고 '우리가 하려고 했던 것들'이란 전시도 있길래 잠깐 둘러봤다. 만원이 꽂힌 만 원짜리 잡초 '만스테라'라는 작품이 인상적이었는데 돈을 파괴하여 만들었고 돈을 들여 만든 결과이기도 한 이 잡초는 쓰임 없고 의미 없는 작가의 행동과도 같다고 한다. 마치 나의 남는 것 없는 지나온 주말을 빗댄 것 같아 반성하면서 '앞으로의 내 주말은 조금이나마 유의미해졌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저녁엔 국물이 당겨 국밥 시켜먹고 산책할 겸 불빛 축제 구경을 했다. 이걸 왜 하는지 궁금했는데 한쪽 벽에 스토리가 적혀있었다. 과거 거북이들이 산란했던 구남로와 신라 진성여왕의 천연두를 치료해준 해운대 온천의 스토리가 접목된 빛 축제. 산책할 겸 쓱 둘러보는 정도로 괜찮았다.


출발할 때만 해도 목적지 없던 여행이었는데 어느새 차곡차곡 채워졌다.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온전히 하고 싶은 대로 이틀을 보냈다. 살수록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날이 적어지는 것 같은데 내 마음 하나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너에게 고향을 만들어주고 싶었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이 대사를 듣고 '그럼 서울이 고향인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라고 생각했다. 물론 나는 고향이 따로 있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내가 마음의 고향을 만들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언제든 쉬고 싶을 때 올 수 있는 편안한 곳. 내게 부산은 그런 곳이 된 모양이다.


- 2022년 1월 셋째 주 주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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