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과 과학을 좋아했던 미대생
미술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패션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서였다. 초등학생땐 바비인형의 옷을 직접 만들며 내 옷의 패턴을 보고 인형 사이즈로 만들곤 했는데, 무언가 새롭게 만든다는 건 언제나 즐거웠다. 의상 디자인에 관심이 있어 엄마는 중학생인 나를 데리고 동대문 원단시장과 국민대 패션디자인과 졸업 패션쇼를 데리고 다니며 보여주셨다. 그리고 이대 앞 웨딩드레스샵에서 디자이너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디자이너가 되려면 디자인과를 나와야 한다는 말에 그때부터 미대 진학을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는 건 만들기에 비해 재미없었다. 하지만 대학을 가기 위해 필요하다고 하니, 성실히 그림을 그렸다.
기억의 순간 #1
고 1이 끝나갈 무렵, 고2 교과서를 미리 받던 그때 그 시간은 아직도 생경하다. 7차 교육과정으로 바뀌고 심화 교과목이 선택과목이 되면서 이과로 가는 친구들은 물리 2, 화학 2 등의 교과서를 받아갔는데 솔직히 그게 무척 부러웠다. 난 중3 때부터 미대입시를 위해 그림을 그렸고, 내신성적을 위해 당연히 문과반으로 갈 운명이라 고2부터는 과학 시수가 줄어들었다. 나름 고1 시험 중에 전교에서 나 혼자 과학 100점 맞았던 유일한 기록도 있었고, 당시 과학선생님과 이야기하는데 내가 미대준비한다는 말에 놀라셨던 기억이 있다.
기억의 순간 #2
치열한 고3 시절을 보내고 끝내 원하는 학교는 한 끗 차이로 떨어졌다. 나군 실기 시험을 한창 치르며 한 시간 정도 남은 그때, 내 그림과 옆 사람의 그림의 완성도는 차이가 꽤 컸다. 아직도 기억 남는 줄리앙과(아니 아리아스였나) 주전자.. 난 약 4년 동안 그림을 그렸음에도 색감과 터치감에 사로잡혀 ‘잘 그린 그림’에 대해 잘못된 편견을 갖고 있었다.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내가 뭐가 부족했는지를 깨닫고 부모님께 재수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다행히 부모님께선 응원해 주셨고 재수 끝에 원하는 학교와 학과에 입학했다.
입시를 준비하면서 패션디자인보다는 입체적인 공감각의 재능을 살리고자 산업디자인과로 목표를 바꿨다. 재수 끝에 원하는 학교에 갔는데 전공수업은 생각보다 재미없었다. 입시 때 ‘잘 그린 그림’에 대해 깨닫지 못한 것과 비슷하게 ’잘 한 디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이 계속되었다. 주변 동기 선후배는 쓱쓱 디자인 쉽게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잘하는 사람은 너무 많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건 이 길이 아닌 것 같았다.
학교생활도 심리적으로 동떨어진듯한 느낌이 많았다. 친구들은 영화를 보며 스토리 이야기를 하는데(대부분의 미대생은 문과에 가깝다) 난 영화를 즐겨보지도 않고 스토리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 겉으론 크게 드러내지 않았지만 속으로 생각하기에 나 혼자 겉도는 느낌이 많았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최선은 아니지만 성실하게 학교 다니며 디자인에 대해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학과 내 제품 소모임도 꾸준히 참여하고, 교수님 덕분에 산학활동하며 레드닷 어워드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졸업이 다가와도 내가 어떤 디자인을 하고 싶은지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대부분 제품디자인을 전공한 동기들은 전자회사에 취업을 희망했다. 하지만 난 0.1mm의 수정을 반복한다는 그곳의 업무가 내가 잘할 수 없을 거란 확신만 가득했다.
난 뭘 하고 싶은 걸까?
나의 진로에 의문이 가득하던 때, 우연히 월간디자인의 인터뷰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미대입시를 준비하며 배운 것
지구력 : 당시 실기시험은 5시간 동안 그림 한 장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집중력이 길지 못했던 나는 시험을 치는 날엔 어쩔 수 없이 5시간 동안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수능이 끝나고 실기준비기간에는 오전, 오후 하루에 두장씩 그림을 완성시키는데 시간을 쏟는다. (+ 피드백 시간은 덤) 체력적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때 지구력을 몸에 체득했던 게 정말 도움이 많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