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본성과 운명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자기 인생을 이야기할 수 있는 권한이 있지만, 유려하게 이야기로 써 내려가기 어려운 것이 자기 삶인 듯합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나의 삶 또는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봅니다. 문학 작품은 일상적인 언어와 개념을 사용하여 어딘가 정말 있을 것 같은 살아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그려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문학이라는 틀 속에 담긴 이야기를 여러 방향에서 읽습니다. 내가 살아온 시각에 따라 읽기 때문에 여러 갈래의 방향이 생기는 이유입니다.
이 읽기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삶을, 그리고 내 삶을 해석해갑니다. 사회학자 바우만은 “삶을 살아가면서 실수를 피하거나 목적지에 반드시 도달하게 만드는 ‘성공의 보장 원칙’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만약 그런 책이 있더라도 영구히 흰 여백의 페이지들로 가득해야 하고, 새로운 원칙들이 첨가될 수 있는 빈칸을 남겨두어야 한다고 합니다. 1000페이지의 인생 백과사전이 있고 이 백과사전을 모두 꼼꼼하게 읽어 인생의 기승전결을 모두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비켜갈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문학 읽기를 통해 인생에는 불행과 실수와 실패가 있지만 그 속에 의미가 있으리라 믿으면서 인생이라는 미완성의 그릇을 채우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나는 왜 읽는가? 책 읽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스스로에게 한 번쯤 물어본 적 있을 듯한 질문입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라는 질문과도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스스로에게 가끔 질문해보곤 합니다. 글자를 처음 읽었던 때부터 지금까지 인생의 다양한 단계를 거쳐왔고, 그 단계마다 항상 책이 같이 해주었습니다. 아마 모두 책과 처음 만났던 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나의 첫 독서는 다섯 살이었습니다. 글자가 아니라 그림책이었는데, 아쉽게도 이 첫 책의 내용은 끝을 알 수 없는 영원한 물음표로 남아 있습니다. 놀이에서 돌아와 보니 그 그림책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언니에게 화가 난 동생이 그 그림책을 찢어 딱지로 변신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동생은 언니를 골려 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았던 거죠. 사라진 책 때문에 분해서 빈 그림책 가방을 앞에 두고 엉엉 울었던 기억이 어렴풋합니다.
시골집에는 어린아이가 읽을 책이 흔하지 않았습니다. 가끔 엄마의 주부생활이나 새농민 잡지를 읽으면서 문자가 펼쳐가는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도 했습니다. 흙바닥에다 앞이 트인 자연친화적 재래식 화장실에서 책을 읽다 보면 날씨가 좋은 날에는 대나무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고 가끔 거기서 기어 나온 지네의 발소리에 놀랐던 기억도 납니다. 영문학을 전공하던 대학 시절을 지나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낳고 기르던 어느 날 문득 어머니께서 ‘니 계속 공부한다 하면 논이라도 팔아서 유학 보낼라 했더마는 고마 결혼한다고 남자를 데려와서 내 쪼매 실망했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놀랍고 감동스러웠습니다. 평소 말씀이 많지 않으신 엄마가 이리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도 놀라웠고 그 말을 별안간 툭 던지셨으니까요.
공부는 더 하지 않았지만 책은 늘 곁에 있었어요. 그 전에는 읽어 본 적 없던 책들을 가까이하면서 읽는 책의 종류만 바뀌었어요. 결혼 첫 집들이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새벽부터 오후 6시까지 한 상을 준비하고 차렸는데, 그때도 주방 바닥에 요리책이 펼쳐져 있었고, 아기를 낳고 키우는 일은 아무런 경험이 없어 육아 서적을 늘 끼고 있었던 때도 있었어요. 그 후로도 내 잘못이 용서가 되지 않을 때, 이해되지 않는 타인이 있을 때, 미래가 불안할 때, 아이가 기대대로 자라지 않는 것 같은 불안감이 생길 때, 그 모든 엉킨 순간에도 울퉁불퉁 책이 함께 했습니다. 그 수많은 책들이 늘 답을 준 것은 아니지만 살아가는 법을 배워보려고 남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고 싶어서 때로는 위로를 받기 위해서 책을 찾아 읽었던 것 같습니다.
상실이나 좌절이 마음에 가득 차 고통이 오래 지속될 때 책 읽기는 마음을 위로하는 효과 있는 약이 되기도 하죠. 좋아하는 후배가 잊혀지지 않는 말을 해 준 적이 있습니다. 그녀의 사랑하는 조카가 잠시만 만나자고 전해왔지만 공교롭게 그날 다른 일이 있어 만나지 못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카의 죽음 소식을 들었다고 했어요. 그녀는 만약 내가 만났더라면 이라는 가정을 되풀이해서 했고, 너무나 슬펐고, 되돌릴 수 없음이 고통스러웠다고 했습니다. 그런 때 그녀는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을 펼쳐 읽었고, 이 과정이 그녀에게 영혼의 위로를 건넸다고 합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미국의 어느 변호사는 사랑하는 언니가 췌장암으로 사망한 후 고통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고,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500 페이지의 책을 하루 만에 단숨에 읽고는 편안한 잠에 빠졌고 그 후로 매일 책 한 권 읽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책의 내용이 위안이 되었을 수도 있지만, 책을 읽는 물리적 시간 그 자체와 순수하게 책 속에 몰입할 수 있음이 위안과 의미를 주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외에도 책 읽기가 준 의미가 나이 들면서 커진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고등학교 수학교사인 친구는 우연히 독서 모임을 같이 하게 되었고, 지금은 문학 작품 읽기에 푹 빠져 전문적인 책 읽기 수업을 듣습니다. 아이 문제로 힘들 때 책 읽기가 위안이 되었다는 언니도 있고, 아이가 고3을 끝내고 대학 진학한 후 더 열심히 책을 읽으며 책 읽기가 삶의 오아시스라고 하는 후배도 있습니다. 책으로부터 위안과 즐거움을 얻는 독자들이 더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나이에 따라 처한 상황에 따라 독서의 목적이 다를 겁니다. 초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점수를 올리기 위해 책을 읽고 잘 읽기 위해서 수업을 받기도 합니다. 직장인은 삶의 의미를 찾거나 재테크 방법을 찾기 위해 자기 계발서를 읽기도 할 것입니다. 어린 시절 터득한 책 읽기의 즐거움을 놓치고 싶지 않아 자기 만의 공간에서 앉거나, 심지어 걸어 다니면서 읽기도 합니다. 각각 독서의 형태나 방법이 다릅니다. 하지만 자녀가 읽기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갑을 열고 격려해주는 엄마들은 읽기의 기회를 많이 갖지 못합니다. 나의 삶을 위해 읽기라는 포괄적인 의무의 기회를 가져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럴 때 함께 읽기를 하면 효과가 큽니다.
같이 읽는 문학은 서로를 연결시켜주는 가늘지만 튼튼한 실이 되어 개별적인 우리를 묶어 주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아무리 책을 좋아하더라도 물리적인 시간이 나지 않아 책 읽기가 뜸했는데, 후배가 장영희 교수님의 에세이에서 이름을 따온 ‘문학의 숲’이라는 독서 모임을 만들고 저를 초대해주었어요. 거기서 문학 작품 발제를 한 경험이 한 고등학교 학부모회 독서 동아리 어머니들과 문학 함께 읽기로 이어졌습니다. 지금도 일 년에 서너 번 학부모들과 계속 같이 읽고 있습니다. 옆의 고등학교에서도 그 소식을 듣고 책을 읽고 싶어 하셔서 같이 읽기도 했고요.
처음에는 학부모인 엄마들과 문학을 함께 읽는 일이 효과가 있을까 엄마들이 문학을 좋아할까 라는 의문이 마음 한편 있었지만, 이 기회에 평소 읽기 기회를 갖기 어려운 문학을 함께 읽고 엄마들도 자신 만의 소중한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 초중고등학교 수가 10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이 모든 학교에는 학부모회가 있고, 여기 학부모회에 독서 동아리가 생겨나고, 한 권의 문학작품을 함께 읽는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라는 상상을 해봅니다.
작년 판교의 한 고등학교 학부모 독서동아리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함께 읽는 날이었습니다. 울프와 소설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 후 한 젊은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아 그런 뜻이었군요. 제가 밥 하고 청소하는 틈틈이 읽었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더라고요. 다시 읽으면 더 잘 읽히겠어요.’ 어머니들도 살면서 한 번은 버지니아 울프 소설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는 의미에서 이 책을 추천했고, 집안일 틈틈이 읽고 모두 모여 울프 이야기를 나눈 시간이었습니다.
틈틈이 읽기. 이렇게 분주한 순간 틈틈이 읽는 울프는 색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구 목적으로 연구실에서 읽을 수는 있습니다. 문학 이론을 연구하고 적용하고 읽기를 할 수도 있고, 전문적인 읽기를 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생활 속에서 읽기는 더 의미 있어 보입니다. 매년 빌 게이츠와 오바마의 독서 목록이 주목을 받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같이 읽다 보면 우리만의 독서 목록을 만들어 발표하고, 문학 읽기에서 다른 분야 책 독서로도 넓혀 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함께 읽을 수 있어서 의미가 더 클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삶은 다 반짝반짝 빛이 난다고 생각해요. 아름다운 형태로 존재하는 주변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문학 속의 이야기들과 연결해가다 보면 문학이 생각한 것보다 더 재미있고 구체적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