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새니얼 호손 <주홍글자>
신체 어느 부분에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표지를 달고 살아가는 삶에 대해 상상해보세요.
몸 어디든 다른 사람 눈에 보이는 이런 표지가 있다면 ‘다름’의 신호가 되겠죠. 낙인, 죄의 표지, 죄책감, 무거움, 다름 등 다양한 의미를 나타낼 수도 있어요. 이 표시로 인해 차별받거나, 때로는 조롱과 멸시를 받을 것 같기도 해요. 어디를 가든 남과 다른 모습은 쉽게 눈에 띄고, 구별되며, 차이로 인해 시선을 받고, 다른 사람이 쉽게 다가올 수 없도록 접근 금지 막이 그 사람 주위로 드리워질 거예요.
19세기 미국의 대표적 작가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자>는 왼쪽 가슴에 주황색 표지를 달고 갓난아기를 안은 아름다운 한 여성이 처형대에 오르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시작이 강렬하죠. 왜 이 여성이 거기에 섰는지도 궁금해집니다. 이어서 호손은 ‘주홍글자’의 의미와 이 글자와 연관된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마음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파고들어갑니다. 호손의 심리 묘사는 뛰어납니다.
소설 속 ‘주홍글자’는 주인공이 죄에 대한 처벌로 받은 표지입니다. 그런데 이 ‘주홍글자’는 화려한 주홍색 실로 수놓아져 있습니다. 화려한 죄의 표시. 어울리지 않는 결합이죠. 이 글자 안에 어떤 의미가 있으리라 추측도 됩니다. 호손은 주홍색의 화려한 글자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한 땀 한 땀 만들어 갑니다. 호손의 문장은 세밀하고 자세한 묘사로 유명합니다. 죄의 표시로서 ‘주홍글자’를 창조해 낸 점과 그 글자를 중심으로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간 부분은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처음 <주홍글자>를 읽었을 때는 주인공이 ‘주홍글자’를 달게 된 이유와 그녀의 비밀스러운 사랑의 상대가 누구인지 관심이 갔어요. 하지만 지금은 ‘주홍글자’를 달고 살아가야 하는 주인공의 삶에 대한 태도가 더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주인공과 달리 눈에 보이는 ‘주홍글자’를 달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자기 가슴에 ‘주홍글자’를 새겨 넣고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에도 관심이 갑니다. 아마도 인간 내면에 대한 호손의 뛰어난 묘사 덕분인 것 같습니다. 호손은 모욕과 조롱의 대상이었던 한 여성이 성장해 가는 모습, 인간을 옭아매는 사회 제도, 내면의 죄의식으로 고통을 겪는 인간의 모습을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호손이 내면을 그리는 데 뛰어난 작가임을 확인할 수 있어요.
실제 우리는 꼭 ‘죄’에 대한 ‘주홍글자’ 뿐만 아니라 ‘다름’에 대한 ‘주홍글자’를 타인에게 달아 주고 고립시키기도 하죠.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내가 속한 집단과는 ‘다른’ 집단에 속해 있어서 상대방에게 ‘주홍글자’를 붙이고 차별하기도 하죠. 사회 여러 곳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고, ‘주홍글자’를 만들어 내고 반응하는 인간의 심리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초등학교 시절 우리 동네에는 같은 학년이지만 늘 혼자 떨어져 농사일만 하던 한 동기가 있었어요. 그 아이의 부르 튼 손과 입술, 침묵, 한 발자국 떨어져 걷던 모습, 우리는 하지 않는 농사일을 하는 모습 등이 낯설어서 우리와는 다르게 여겨졌어요. 그 아이에게는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고, 원래 그런 아이라고 여기며 오랜 시간을 지냈어요. 그 아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 거나 한 건 아니었어요. 그저 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힘든 일을 한다는 점만 달랐죠.
우리와 같은 학년이었지만 나이가 더 많았고, 학습 능력이 뒤쳐져서 인지 특수 학급에서 배웠어요. 학교를 다니긴 했지만, 늘 논이나 마을에서 일하는 모습을 더 자주 볼 수 있었어요. 짧은 머리는 먼지로 덥수룩하고, 겨울이 되면 입술이 추위로 더 트고 부어올라 두꺼워져 영영 말을 잃어버린 모습처럼 보였어요.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그 아이의 까만 손이었어요. 일만 하느라 더 커 보이고 늘 까맸고, 또래의 손이 구슬을 굴리거나 연필을 잡을 때 무거운 수레를 끌어서인지 유난히 더 어른스러운 인상을 주었어요.
그 아이가 말을 하는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고, 그의 말을 들어주거나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어린 나이지만 늘 무거운 짐을 끌거나 묵묵히 일만 했어요. 주위에 사람이 다가서서 정겹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당연히 웃는 모습도 볼 수 없었죠.
그러다 6학년이 되어 같은 반이 되었어요. 같은 동네, 심지어 우리 집 뒷집에 살았고, 같은 학교 같은 반이었지만 마음속의 ‘우리’라는 원 안에 넣어지지 않던 아이였어요.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우리 집 대문을 두드리며 낯선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불렀어요. 그 날은 학교에 가지 않고, 근처 마을에 현장 학습 같은 걸 가는 날이었는데, 그 아이가 저를 데리러 온 거였어요. 평상시 한 마디도 나눠 보지 않았던 아이가 내 이름을 부르고 나를 데리러 온 그 상황이 굉장히 낯설고 어색했어요.
우리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로 진학할 때 그 아이는 중학교 입학은 하지 않았어요. 고등학생이 되어 저는 그 마을을 떠났고 그의 소식은 더 이상 듣지 못했어요. 아마 그렇게 계속 열심히 일을 하면서 살아갔을 것 같아요.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제가 결혼을 하고 휴가를 맞아 고향에 내려가 볼링장에 갈 기회가 있었어요.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문득 옆을 보게 되었는데, 낯선 듯 익숙한 모습이 보였어요. 순간 깜짝 놀랐어요. 그 동기가 여자 친구와 함께 볼링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 동기는 볼링을 위한 ‘완벽한’ 옷차림을 갖추고, ‘완벽한’ 운동 자세를 취하며, 나란히 늘어선 볼링공을 ‘완벽하게’ 넘어뜨렸거든요.
사실 이런 모습에 놀랐다는 사실 그 자체가 어린 시절부터 그에게 낯섦, 다름, 분리, 차별이라는 이름표를 저 혼자 붙여 두고 생각해왔기 때문이죠. 우연히 그렇게 스쳐간 이후 다시 그에 관한 소식이 들려왔어요. 이륜차를 몰고 가던 그는 자동차 사고가 났고, 그 사고는 죽음으로 이어졌어요. 그 후 사망보험금은 가족에게 지급되어, 새엄마의 아들인 그의 이복동생은 가난한 형편이었지만 형 덕분에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사법고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이어졌어요.
앞뒤 집에 살며 오랜 시간을 같은 마을에서 자랐지만, 늘 우리와는 다른 낯선 모습으로 일만 하고, 한 번의 낯선 인상을 남기고, 마지막까지 안타까운 소식으로 전해진 그 동기의 삶이 문득 생각납니다.
작가 호손은 내성적이고 고독한 작가였습니다. 늦은 결혼 후 생활을 위해 세관 검사원, 리버풀 영사 등 소설 쓰기와 다른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모비딕>의 작가 허먼 멜빌은 이웃에 살면서 호손으로부터 문학적 영향을 많이 받았죠. 그는 ‘나를 사로잡은 것은 호손의 어둠’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어둠’이란 단어에 눈길이 가죠. 호손은 ‘인간 내면의 어두운 면’을 잘 묘사하는 작가로 평가받습니다. 호손은 1804년 매사추세츠주의 항구도시 세일럼에서 태어났어요. 선장이었던 아버지는 호손이 4살이었을 때 열병으로 사망합니다. 그 후 호손의 가족은 가난한 삶을 살았고, 독실한 신앙심을 가지고 어려운 시절을 이어갔어요. 호손은 삼촌의 후원으로 보든 대학에 다니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이 시기에 알게 된 친구들, 시인 롱펠로우, 대통령이 된 피어슨이 호손의 삶에 크고 작은 영향을 줍니다.
호손은 보든 대학 시절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소설가로서의 명성은 쉽게 오지 않았어요. 1825년 대학 졸업 후 다시 세일럼으로 돌아와 고독한 세월을 보냅니다. 거의 10년을 자신의 2층 방에서 은둔자처럼 지내면서 밤 시간에만 산책을 하고, 어머니나 여동생과도 소통을 거의 하지 않는 ‘고독의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이 고독의 시간은 38세에 결혼할 때까지 이어졌어요. 호손은 미국 역사, 특히 청교도 역사와 고향인 세일럼에 관심이 있었어요. 특히 고향 세일럼은 그에게 ‘우주의 필연적인 중추’였습니다. 이 소재를 중심으로 홀로 있는 시간 속에서 더 벼려진 섬세함이 소설 속에서는 인간 내면에 대한 탁월한 묘사로 이어집니다. 그는 인간의 심리를 통찰하는 힘이 있었고, 그 부분이 그의 소설 속에 어우러져 있습니다.
1849년 45세에 호손은 근무하던 세일럼 세관에서 해임됩니다. 이것을 계기로 글을 쓸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이 생겨 나 <주홍글자>를 쓰기 시작합니다. 이 소설을 쓸 당시 호손은 소피아 피바디와 가정을 이루고 랄프 월도 에머슨의 할아버지가 지은 목사관에서 신혼을 보내고 있었어요. 이 집은 에머슨이 <자연>을 완성한 특별한 집이에요. 에머슨은 19세기 미국 초월주의 사상에 큰 영향을 준 사상가죠. 소피아가 원래 초월 주의자 모임의 일원이었고, 두 사람 결혼 당시 월든의 작가 소로가 목사관 앞 텃밭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자신이 타던 보트를 이 부부에게 양도하기도 했어요.
이 목사관은 ‘올드 맨션’이란 이름을 갖고 있어요. 호손은 이 목사관에 대해 짧은 글을 쓰기도 했고, 이 곳에서의 시간을 ‘에덴에서의 행복한 시간으로 표현’ 하기도 했어요. 지금도 이 곳 목사관의 창문에는 소피아의 결혼 다이아몬드 반지로 새긴 호손과 소피아의 낭만적인 글귀가 남아 있어요. “인간의 사건은 신이 의도한 것이다. 소피아. 호손. 1843.” 이렇게요. 호손은 미남형에 형편이 어려웠지만 아내 소피아와의 부부관계는 행복했어요.
1850년 주홍글자가 출간되었고, 내용이 음란하고 부패하다는 평이 있었지만, 새로운 형식의 소설을 원하던 대중에게 문학적 관심을 일으키며 초판이 모두 판매되었어요. 변화하는 세대의 요구에 부합하는 소설로 인기를 얻었죠. 당시 독자들은 주인공 헤스터에 대한 연민을 가졌다고 합니다.
호손에게 스스로 마음에 새긴 일종의 주홍색 ‘표지’가 있었습니다. 선조들의 과거가 호손에게 도덕적 부채를 남겼는데 이 역사가 그에게 글을 쓰는 데 소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주홍글자>의 서문 역할을 하는 소설 첫 장 <세관> 부분에 나와 있어요. 호손의 조상들은 세일럼에 정착한 이후 청교도 신념에 따라 살았어요. 특히 증조할아버지 존 해 손은 세일럼 마녀 재판 당시 담당 판사였어요. 호손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관련된 이 피의 사건에 대해 죄책감을 가졌고, 이 사건이 내내 호손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경직된 청교도의 측면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어요. 세일럼의 마녀 재판은 식민지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마녀로 몰아 처형시킨 사건입니다. 경직된 종교적 믿음이 집단 광기로 발현되어 무죄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건이죠.
그때 피해자들의 저주가 후대에 영향을 주고, 그때 저지른 죄의 무게감이 자신에게도 이어진다는 생각이 호손의 ‘주홍글자’였던 거죠. 물론 호손은 이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도 있었어요. 호손의 집안의 성은 원래 해손이었어요. 아버지의 성도 원래는 해손이었지만 보든 대학에 다니던 호손이 자신의 성에 알파벳 ‘더블유’를 추가하여 호손으로 바꿨습니다. 아마 조상들의 그림자로부터 약간 비껴가고 싶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뉴잉글랜드와 청교도 사상은 <주홍글자>와 연관이 깊습니다. 뉴잉글랜드의 대표적인 정착민은 청교도입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미국을 건설한 사람들이죠. 청교도는 영국 국교에 뻗어 나와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타락한 교회를 바로 세우고,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살아가려는 기독교의 한 종파였어요. 이 청교도인들이 영국 내에서는 박해가 심하니까 종교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대륙의 영국 식민지로 이주했습니다. 그때 ‘메이플라워’라는 배를 타고, 배 안에서 새롭게 건설할 공동체의 규율과 법을 만들었어요. 이 규율은 새 사회를 위한 순기능도 있었지만, 소설에서 보여지듯이 지나친 종교적 신념이 개인의 삶을 제한하는 면도 볼 수 있어요.
17세기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는 기독교의 규율을 엄격히 지키고, 검소한 삶을 살면서 욕망에 이끌리는 것을 죄악으로 여겼어요. 특히 성경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계율을 중요시했고, 남성 중심 사회였기 때문에 ‘간음’의 죄를 지은 여성은 사형되기도 하던 시대였어요. ‘간통’이 큰 죄악으로 규정되었던 이유도 그 당시 시대적 특징이었던 거죠. 소설도 이 계율을 어긴 한 여성이 공개 처형대에 선 모습으로 시작하죠.
<주홍글자>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전에 ‘세관’이라는 부분이 먼저 나옵니다. 이 부분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모르고 읽으면 도대체 ‘주홍글자’ 이야기는 언제 나오지 하고 초조해질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호손의 묘사가 약간은 장황하거든요. 호손은 여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고향 세일럼에 뿌린 조상 이야기로 시작하여 세일럼 세관의 건물 묘사에서 세일럼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에 대한 스케치로 이어집니다.
‘세관’ 부분에는 호손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실제 호손이 세일럼 세관에서 3년 이상 근무했거든요. 여기서 호손은 초월주의자들 친구, 브룩 농장, 세관 검사원으로 재직하는 일로 인해 글 쓰는 감수성과 재능이 잠재워질까 봐 우려하는 모습, 소설 스타일 등 여러 가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자신은 신상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밝히며 시작하지만,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요. 자세한 묘사가 호손 글의 특징이거든요.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뒤에 이어질 ‘주홍글자’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가 이 부분에 나온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지금으로 보자면 아주 길고 긴 ‘작가의 후기’라고 이해해도 괜찮습니다. 화자는 어느 비 오는 날 낡은 세관 건물 2층에서 우연히 낯선 서류 꾸러미들 사이에서 ‘주홍글자’를 발견합니다. 그 주홍글자를 가슴에 대보는데, ‘그 순간, 몸이 타는 듯한 열기를 느끼는’ 경험을 합니다. 그 후 화자는 3년의 검사관 공직에 변화를 맞습니다. 화자가 지지하던 당의 반대당 후보가 대통령 직에 당선되어, 갑작스러운 파면을 당하거든요. 이 일을 계기로 ‘종이와 잉크와 펜을 사서 책상으로 돌아가 글쟁이’가 된다고 밝힙니다. 그러면서 <주홍글자>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주홍글자>에서 주제를 그림자, 변화, 대조 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전체 분위기가 어둡고, 내면의 어두운 면은 그림자처럼 소설 곳곳에 드리워 있어요. 그리고 모든 인물들이 가진 특징들은 한 가지 특징이 아니라 대조적인 면을 한 몸에 지니고 있어요. 그리고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은 변화해가는 과정을 거쳐요. 그중에서 헤스터의 성장 과정, 딤스데일 목사의 고뇌, 이 두 사람을 지켜보는 칠링워스, 그리고 세 사람의 어른들과는 대조적으로 타고난 성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자연 그대로의 펄을 중심으로 읽으면 좋습니다. 17세기 뉴잉글랜드라는 차이점이 있지만, 모든 문학이 그렇듯 <주홍글자> 안에도 지금 우리가 읽어 낼 수 있는 보편성이 있습니다.
헤스터의 가슴에 매단 ‘주홍글자’는 배우자가 아닌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어 아기를 낳았기 때문에 사회가 준 죄의 표지입니다. 헤스터 자신에게도 치욕의 상징이었죠. 원래 기능은 젊고 순결한 여자들이 그 주홍 글자를 보면서 배우도록 하는 교육 기능이었어요. 초반부에 헤스터가 서게 되는 형벌대는 착한 시민을 길러내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작용하고요. 이 시대에는 죄를 지은 사람을 공개 처형대에 오래 세워 두고 모욕을 받도록 하는 벌을 주었’어요. ‘죄’의 의미도 지금도 다르고, 형벌 제도도 다르죠.
헤스터는 영국에서 좋은 집안 태생으로 교육을 잘 받은 여성이었어요. 영국에서 남편과 결혼한 후 헤스터 먼저 뉴잉글랜드로 보내졌고, 남편을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죠. 그러는 동안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 아기를 낳았고, ‘주홍글자’를 달게 된 겁니다. 이 ‘에이’ 글자는 영어 단어 ‘간음, 간통’이라는 단어의 첫 글자에서 따온 겁니다. 사회에서 이 글자가 표시하는 힘은 커서 헤스터는 계속해서 사람들로부터 치욕, 고통, 모욕, 냉소를 받습니다. ‘주홍글자’가 헤스터 주위로 ‘마법의 원’을 그려 놓고, 고립시키고 늘 죄를 잊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이 소설에서 돋보이는 부분은 이 글자의 의미가 변화한다는 점이에요. 청교도 사회는 헤스터에게 죄의 표시를 주었지만, 이 글자를 가슴에 단 헤스터는 죄를 짓고 사회에서 추방된 존재에만 머물지 않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여성으로 나오거든요. 사회 모든 구성원들이 그녀에게 보이는 몸짓, 태도, 침묵이 그녀가 추방된 처지임을 드러냈어요. 그리고 공포와 혐오와 경멸의 대상이 되었죠. 헤스터는 청교도 사회가 부여하는 ‘고통의 맥박’을 끊임없이 느끼며 살아가야 했어요.
하지만 카인의 이마에 찍힌 낙인과 같은 강력한 ‘주홍글자’의 상징에도 불구하고 헤스터는 그 지역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사회로부터 매장되지도 않습니다. 이유는 그녀가 가진 재능 덕분이었습니다. 헤스터는 지금의 싱글맘인데, 생활고에 시달리지 않아요.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거든요. 청교도 영향으로 사치품을 멀리 하는 사회였지만, 헤스터의 작품은 공직의 위엄을 더해 주는 필수품으로 여겨졌어요. 장례, 탄생의 순간에도 함께 하는 작품이었기도 하고요. 서로 헤스터의 작품을 가지려고 해서 생활이 어렵지 않았던 거예요. 나아가 자신의 여윳돈을 자신보다 불행하지 않은 가엾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합니다. 자비를 베푸는 선행이 모욕당하기도 하지만 선행을 멈추지 않아요.
거기다 주홍글자가 헤스터에게 새로운 감각을 부여해줍니다. 다른 사람의 가슴에 숨겨진 죄를 직감적으로 알고 공감하는 능력입니다. 헤스터는 처음 이 능력을 알아채고는 공포에 휩싸이죠. 겉이 순결해 보여도 사실은 거짓에 불과하며 진실을 밝혀 보면 헤스터의 가슴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가슴에도 주홍 글자가 타오르고 있다는 점을 알았거든요. 이 부분은 이 소설의 대표적인 주제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과정에서 헤스터는 죄를 상징하던 모습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사회에서는 그녀에 대한 애정이 조금씩 싹틉니다. ‘주홍글자’는 그녀가 그동안 행한 수많은 선행의 징표로 바뀌어요. 모든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신성함을 부여해주기도 합니다. 헤스터는 연약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으므로 준엄해졌어요. 자신을 죄의 상징으로만 옭아매려는 낡은 편견의 지배 체제를 뒤집어엎고 재정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성장해 갑니다. 자신의 죄의 표지를 아름답게 수놓는 그녀가 비범해 보이긴 했지만, 소설이 전개될수록 내면의 힘을 지닌 그녀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헤스터의 딸인 펄의 존재도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우선 ‘주홍글자’처럼 펄의 존재 자체가 헤스터가 지은 죄의 상징이죠. 이름이 ‘진주’인 이유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얻은 대단히 값진 존재이면서 헤스터에게는 하나뿐인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림같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펄의 외적인 모습마저 변화무쌍해요. 펄의 내면 생활이 다양하기 때문이라고 설명되어 있어요. ‘요정’으로 등장했다가 ‘악마의 씨앗’으로 등장했다가 변화무쌍하게 해석됩니다. 그러면서 헤스터의 모든 것이고 그녀에게 축복인 존재로 자라납니다. 펄은 자기가 태어난 세상과 별 상관이 없는 존재이고, 규칙을 따르지 않고, 법칙을 깨지만, 자신만의 질서를 가진 존재입니다. 사회의 규범으로는 훈육하기는 어렵지만, 내면의 질서로 고유한 힘을 가지고 성장해가는 존재입니다. 펄은 세상에 태어나 엄마의 ‘주홍 글자’를 가장 먼저 알아보고, 만져 보고, 때로는 떼내려는 손짓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펄에게는 그 ‘주홍글자’가 특별한 죄의 표지가 아니라 엄마가 늘 지닌 화려한 장식품처럼 여겨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헤스터의 죄라는 것이 사회에서 규정한 것이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고요.
변화의 주제는 또 다른 주인공 딤스데일 목사에게서도 보입니다. 이 젊은 목사가 사회에서 얼마나 존경받는지는 소설의 여러 부분에서 자세히 묘사됩니다. 하지만, 딤스데일 목사의 내면의 비밀과 그로 인한 고통은 아무도 알지 못해요. 그를 향한 지역 사회의 존경의 높이가 큰 만큼 이 인물이 가진 내면의 고뇌도 그만큼 강력합니다.
헤스터의 ‘주홍글자’는 모든 이에게 공개되어 있지만, 딤스데일 목사는 스스로 가슴에 ‘주홍글자’를 새겨 넣습니다. 그의 ‘주홍글자’는 아무도 볼 수 없지만 내면에서 강력하게 빛납니다. 딤스데일의 경우 그의 사회적 지위나 종교적 신념과 더해져 자신에게 가하는 형벌은 존재 자체를 시들어가게 만듭니다. 고뇌하는 젊은 목사의 내면 갈등을 호손이 정말 세밀하게 잘 표현하고 있어요. 딤스데일이 헤스터가 섰던 광장의 처형대에 두 번 오르는 장면은 완전히 다른 딤스데일 목사의 어두운 자아가 표출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마음속의 고뇌로 몸이 병들고 말하지 못하는 근심으로 마음이 괴로울수록 성직자로서의 인기는 점점 커져 갑니다. 그의 외모에서 나오는 슬픔이 큰 역할을 하죠. 그 당시 목사는 영국에서 뛰어난 학식을 쌓고 신대륙으로 온 존재로 딤스데일 목사의 경우 명성이 나날이 커져 갔어요. 이해력과 교리적 지식이 유능하며 성정은 담백하고 무뚝뚝하며, 세속에 관심이 없는 인물로 비치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사색하는 지적인 능력을 단련하고, 천국과 영적으로 교류하며, 운명처럼 짊어진 죄악의 고통을 짊어지고 신성의 산봉우리에 오르려는 인물로 여겨졌어요. 설교할 때 그의 웅변력은 많은 사람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숭배하는 마음이 커져갔어요. 딤스데일 목사의 경우 진실을 말하려고 해도 거짓으로 변모되고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처지랍니다. 철야 기도를 하고 무자비한 채찍질을 가하면 할수록 존경의 마음이 커지는 아이러니를 보여 줍니다.
소설에서 ‘죄’와 관련된 주제도 큰 부분을 차지하므로 과연 인간에게 ‘죄’는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소설에서 호손은 칠링워스를 통해 ‘인간의 성역인 마음을 침범한 죄’를 그립니다. 나아가 가슴에 ‘에이’ 자를 달고 살아가는 헤스터가 가장 큰 죄인이 아니라 마음의 성역을 침범한 죄를 큰 죄로 보고 있어요. “노인의 복수가 더 사악하오.”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통해서도 그렇게 드러냅니다.
로저 칠링워스는 자신이 목사의 신뢰받는 유일한 친구가 되어 목사가 지닌 온갖 두려움, 양심의 가책, 죄책감, 고민, 참회를 털어놓게 할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어요. 가슴에 꽁꽁 숨긴 슬픔과 용서를 모두 그에게 털어놓도록 하려고 하죠. 이 인물은 고통으로 가득 찬 누군가의 마음을 끊임없이 분석하며 거기서 기쁨을 얻고, 자신이 분석하고 흡족하게 바라본 그 불 같은 고통에 기름을 붓는데 열중합니다. 목사의 가슴속을 파헤치고 들쑤시고, 생명을 움켜쥐고 매일같이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도록 하면서 자신의 복수를 행하는 인물입니다.
소설 속에서 숲의 의미도 다양합니다. 우선 호손 소설에서 숲은 인간 내면의 어두운 면이 발현되는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많이 나타납니다. 인간이 하나의 모습만 지니지 않았고, 대립되는 다양한 모습을 가진 존재이며, 특히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내면의 모습이 대조적일 수 있음을 호손은 숲이라는 공간 속에서 자주 보여줍니다.
숲은 인간이 만든 길, 교회, 학교, 행정 체계가 없죠. 인간이 조직한 사회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죠. 숲이 아닌 공동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사회 제도에 맞춰 행동하고 살아가죠. 하지만 숲은 원시림처럼 어둡고 광대하고 복잡한 곳으로 나옵니다. 어떤 규칙이나 도덕이 없는 황야로 묘사되어 있어요. 헤스터에게는 숲이 그녀의 지성과 감성의 발상지가 되기도 하고, 여자로서의 성, 젊음, 아름다움이 되살아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문명과 품위가 더 편한 목사는 숲에서는 또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21세기 숲이 가지는 의미와 많이 다르죠.
숲 속에서 딤스데일을 만난 헤스터는 두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행복, 베풀 수 있는 선행, 거짓된 삶을 참된 삶으로 바꾸자고 제안하지만, 딤스데일 목사는 자신의 오랜 고뇌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합니다. 목사와 칠링워스의 마지막을 꼭 확인해보세요.
마지막에 이르러 헤스터의 ‘주홍 글자’는 세상의 멸시를 받는 표식이 아니라, 공감과 존경의 상징으로 바뀝니다. 상처 입고, 버림받고, 시련을 겪고 있고, 아무런 존중도 받지 못하고, 쓸쓸하고 불행한 여성들이 헤스터의 오두막을 찾아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조언을 구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19세기 작가인 호손이 헤스터라는 여성 인물을 이렇게 결론 내린 부분이 좋았습니다.
호손이 도덕적인 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인간 경험이 어떻게 문화와 공동체 속에서 변화해 가는지 그 속에서 우리 인간의 심리는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어요. 가슴에 새긴 ‘주홍글자’가 죄에 대한 단죄에서 능력이나 유능함에 대한 의미로 변화해 가는 과정도 흥미롭고요. 그래서 이 소설은 죄의 표시 ‘주홍글자’로서 읽어도 좋지만,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자기 삶을 개척해 가는 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로 읽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누구나 유능을 의미하는 ‘에이’를 가슴에 달고 있다는 사실을 읽어내면 더 좋습니다.
‘주홍글자’에서 요즘 인기 있는 ‘강한 언니’의 면을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낙인이 찍혔지만, 이에 무릎 꿇지 않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 가는 강한 언니의 모습이 보여요. 나아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처럼 고통을 겪는 같은 처지의 동료 여성들에게 조언과 위로를 전해주는 모습은 전형적인 강하고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언니’ 모습 같아요. 싱글맘으로 한 아이를 키우면서, 자신의 비밀은 끝까지 지키면서, 내면의 규율에 따라 자신이 가진 능력을 발전시켜서 자기 삶에 빛이 들도록 이끌어 가는 언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