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뮬러1 그랑프리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차들이 벌이는 레이스다. 1등으로 골인한 레이서가 우승하는 개인 스포츠지만 팀워크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피트스톱. 타이어를 갈아야 할 때, 고장난 부품을 바꿔야 할 때 등은 경주로에서 벗어나 교체를 진행한다. 시간 싸움이다. 교체를 얼마만에 완료하는지, 즉 피트스톱을 몇 초에 끊는지에 따라 순위가 바뀐다. 더 심하게는 스태프의 실수, 장비 고장 등으로 피트스톱 완료가 안 돼 그대로 레이스가 종료될 때가 있다.
광고회사에 피트스톱과 비슷한 분야가 있다. 기자재 업무. 클라이언트 보고 시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장비를 챙겨가고 재빨리 세팅하는 일이다. 이게 얼핏 쉬워 보여도 나름의 전문성을 요한다. 빔 프로젝터, 스피커 등 평소에는 노트북과 연결에 문제없던 장비들이 중요한 보고가 되면 기가 막히게 안 된다. 담당자는 주로 팀의 막내나 남자 직원들이 하는데, 발표까지 남은 시간을 고려해 판단을 내려야 한다. 노트북을 껐다 켤지, 노트북 설정을 다시 한 번 들여다 볼지, 아니면 여벌로 가져온 장비로 대체할지.
사실 이 분야는 나의 치부와도 같다. 그동안 크고 작은 기자재 사고들의 중심에 있었다. 내 손에 기자재가 싫어하는 기운이 있는지 원망도 했었다. 그 시작은 처음 경험한 경쟁 프레젠테이션. 당시 준비해야 하는 기자재와 세팅이 상당히 복잡했다. 공유기 같은 걸 가져가서 스피커, 빔 프로젝터, TV에 동시에 출력을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여러 장비들을 잘 챙겨야 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 현장에서 기자재를 정신없이 세팅하고 있는데, 선이 하나 없었다. 스피커를 노트북에 연결하는 오디오 선이.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서늘하다. 함께 갔던 PD 형이 다른 곳에서 재빠르게 RGB 선을 구해와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 날 저녁 회사에 돌아와 보니, 그 선은 회의실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프레젠테이션 중간에 노트북이 멈췄던 적도 있었다. 보고용 노트북이 따로 있었는데, 인터넷이 접속된 상태에서 사번과 패스워드를 입력한 후 반출해야 락이 안 걸린다. 그걸 모르고 가져갔다가, 발표가 시작된 뒤 얼마 되지 않아 화면이 잠기고 사번과 패스워드 창이 뜨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러한 형태의 멈춤도 있고 동영상으로 인한 멈춤도 있었다. 보고 때 가져가는 시안영상의 화질이 보통 초고화질인데 이따금 재생이 원활히 안 돼 마음을 졸였다. 추가로, 테스트 때는 잘 나기만 했던 동영상의 사운드가 발표 때만 되면 안 날 때가 있었다. 스피커 전원이 자동으로 꺼졌거나, 블루투스 연결이 원활하지 않거나, 컴퓨터와 파워포인트의 사운드 설정이 명확히 안 된 경우다.
기자재와 관련된 크고 작은 사고는 주니어들의 자존감을 철저히 무너뜨린다. 어린 연차 때는 “병신증후군”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맡은 일은 선배들이 하는 일보다 사소하고 쉬운 건데, 이마저도 못하는 내가 병신 같다는 컴플렉스. 마땅한 치료법 같은 건 없었다. 다음 기회가 오면 문제없이 기자재 세팅을 하고, 이러한 성공이 누적되며 과거의 경험을 밀어내는 수 밖에. 옛날의 안 좋은 기억들을 내스스로 술자리의 안주거리로 올리면, 그 때가 비로소 “병신증후군”을 치유했다는 신호이다. 다만 몸은 마치 트라우마처럼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아직도 기자재를 만져야 할 일이 생기면 심장이 벌렁벌렁하다.
다행히 지금의 기자재 환경은 과거와 비교해 보면 천양지차이다. 노트북, HDMI만 가져가면 준비한 내용물을 웬만한 곳에서 문제 없이 틀 수 있다. 심지어 화면 미러링 지원으로 노트북만 챙겨가면 되는 곳도 꽤 있다. 가장 중요한 시안 영상도 지금의 노트북 사양이면 전원 없이도 수월히 재생된다. 후배들이 기자재 스트레스 없이 광고일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정확한 매체비 청구, 꼼꼼한 팩트북 정리, 퀵 배송 등, 안 그래도 “병신증후군”에 빠지게 만들 거리들이 도처에 널려있는데 기자재 만큼은 그들을 괴롭히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