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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챠오챠오 Jul 18. 2020

내일은 펀치왕

멀리서 보면 희극



몇 년 전 추석 연휴에 한 번은 친한 후배를 만나 신촌에서 술을 진탕 먹었다. 


2차를 마치고 3차로 옮기려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와중에 갑자기 후배가 이걸 꼭 해야겠다고 오락실 펀치 머신 앞에서 날 멈춰 세웠다. 나는 펀치 머신을 쳐 본 적도 없을뿐더러, 내 몸 다치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할 거면 너나 하라고 늙은 선배는 말했지만 했지만 팔팔한 후배는 이미 돈을 집어넣고 "자, 여기를 치시면 됩니다" 하는 것이었다. 


술기운도 올랐겠다, 일단 한번 있는 힘껏 쳐봤는데, 뭔가... 손목이 좀 아프다. 원래 이런 건가 싶은 와중에 점수는 700 얼마 나와서 나름 만족하고 있었다. 이어서 후배가 치는데, 소리부터 화려하더니 점수도 높다. 원래 힘이 센 후배인걸 망각한 늙고 병든 선배는 승부욕이 올라 또 한 번 더 머신에 손을 댔고, 첫 번 보다도 낮은 점수가 나왔다. 으으... 손목만 아프고 말았네 하고선 3 차가서 또 진탕 마셨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는데 손목이 욱신 거린다. 좀 부은 것도 같다. 뭐 하튼, 평소처럼 조깅 갔다가 오른손 엄지로 스마트폰을 쓸 수 없다는 사실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병원을 꼭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점심에 친구들을 만나 밥도 먹고 카페도 갔다가 한가로운 친구와 둘이서 시시덕거리며 근처 큰 병원 응급실로 갔다. 


연휴라 응급실만 열려있는데도 병원엔 사람이 많았다. 친구와 응급실 옆 의자에 앉아 '의자가 참 푹신푹신하고 좋네 그려' 하면서 노닥거리는데 맞은편에 어느 젊은 부부가 앉았다. 여자분이 나처럼 손목을 다친 것 같았는데 정말 아픈지 울듯한 표정이었다. 의사가 응급실에서 나와 여자의 손목을 눌러보자 여자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남자는 사색이 되었고, 의사는 태연하게 "내려가서 엑스레이 찍어보세요" 하고선 응급실로 들어갔다. 친구와 나는 내 손목 정도는 아프다고 병원 오면 엄살이라며 내가 왜 굳이 오늘 병원에 와야만 했는지 변명거리를 생각해내려 애썼다. 여하튼 내 차례가 되었고 의사는 내 혈압과 지병, 임신 가능성을 묻더니 "내려가서 엑스레이 찍어보세요" 라며 진료를 시시하게 마쳤다. 엑스레이를 찍고 다시 응급실로 가니, "다행히 금은 안 갔네요. 깁스해드릴 테니까 내일 다시 와서 정형외과 진료받으세요." 하더니 뜨겁고 축축한 깁스를 대어주었다. 


 붕대가 칭칭 감긴 팔 때문에 뭘 하든 우스꽝스러워서 상당히 유쾌했다. 친구와 신촌 카페에 갔다가 근처에 있던 룸메를 만나 저녁을 먹었다. 왼손으로만 먹다 질질 흘리고 점점 모양새가 궁상맞아지자 결국 룸메가 내 수발을 들어주었다. 깁스 때문에 한껏 유쾌해진 나와 룸메는 어제 내가 쳤던 펀치머신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노래방에 가서 이정현의 와를 부르며 각기춤을 췄다. 부자유스러운 오른쪽 팔이 나의 춤을 더욱더 촌스럽게 만들어서 굉장히 만족스러운 퍼포먼스였다. 


 룸메는 다음날 새벽 외가로 내려갔고 나는 혼자 집에 남아 평소처럼 지내보려는데 생각보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당황했다. 손목 하나 나갔을 뿐인데 간단한 머리 묶기도, 설거지도, 옷 입는 것도, 딸기잼 뚜껑여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정말 누구 불러서 며칠 같이 지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다가 나에게 그 정도로 사려 깊은 친구가 없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꼈다. 흑흑.... 팔을 다친 내가 이 세상에 쓸모 있는 때는 오로지 각기춤을 출 때뿐이로구나.... 슬픔에 빠져있던 나에게 한줄기 빛이 내리듯 문득 아주 오래 전의 수련이 떠올랐다.


 어릴 때 나는 불의의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거나, 시력을 잃거나, 청력을 잃거나 하는 일들에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풍부한 상상력으로 끝없이 그런 상황들을 상상하며 고통스러워하다가 '그런 일이 닥치기 전에 미리 연습을 좀 해두면 상실감이나 공포 같은 게 훨씬 줄어들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그 후로 눈을 감고 하루 동안 생활하며 집 구조와 물건 위치를 익히거나 귀를 막고 다른 사람들의 입모양만으로 하는 말을 맞추거나 다리를 쓰지 않고 집안을 두 팔로 기어 다니는 둥 나 홀로 어디 헌터x헌터에나 나올 법한 여러 가지 괴상한 수련을 했다.

그런 수련들을 통해 의외로 온전하지 못한 신체로도 생활이 가능하단 것을 깨닫는 한편, 사지 멀쩡하게 태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깨달았다.  




그래, 나에겐 아직 멀쩡한 삼지가 있다! 아직 삼지가 멀쩡한 것에 감사하며 두발과 한 손을 이용해 딸기잼 병도 열고, 머리도 감고, 옷 입고 나가서 장도 봤다. 나에게 인대 나간 오른 손목은 장애가 되지 않는다! 삶의 의지가 불타올랐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남은 왼손으로 펀치를 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젠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가 부러지던지 어깨를 접질린다고 해도 살아나갈 자신이 있다. 아아, 어린 때의 수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좋아! 지금은 인대가 나갔지만 언젠가는 꼭 펀치왕이 되겠어! (감사의 정권지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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