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길모퉁이'
너무나도 더운 이번 여름, 난 이 여름을 치열하게 잘 살아내고 있다. 아내와 엄마로서의 삶 말고도
'브런치'와 함께 나를 위한 삶을 말이다.
나는 현재 '현모양처'의 삶을 살고 있다.
첫째 때와는 달리 둘째를 낳고는 복직을 하지 못했다. 남편이 워낙 워커홀릭이기도 하고, 친정엄마에게 애 둘은 봐달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편도 나에게 맞벌이를 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회사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아이들을 잘 돌보고 아내로서의 역할을 하는 '현모양처' 그 자체를 원했다. 그래서 아쉽게도 14년 가까이 다닌 직장을 그만두고 현재까지 현모양처의 삶을 살고 있다.
남편이 어렸을 적 어머니가 일을 하셨기 때문에 학교에 갔다 집에 오면 아무도 없는 집이 참으로 쓸쓸했다고, 그래서 자신의 아이들에게는 집에 오면 따뜻하게 맞아주는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을 돌보며 헛헛해하는 나에게 '키즈플래너'라는 이상한 호칭을 부여해 줬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이 호칭이 하나도 맘에 들지 않는다.
어쨌든, 결혼하고 12년 동안 현모양처의 역할을 잘 해냈다. 아이들이 아기였을 때부터 독박육아를 하고, 그 와중에도 깔끔한 성격답게 집안을 잘 정돈해 놓고, 남편이 몇 시에 들어오든 저녁을 차려주고, 아이들 픽업을 다니고, 공부도 봐주고, 나름 바쁜 현모양처의 삶을 살았다.
그런 만큼 나를 인정해 주고 칭찬도 해주면 좋으련만 표현이 적은 우리 남편은 내가 원하는 만큼의 칭찬을 해주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회사에 가면 도통 연락도 없고 매일 늦는 남편에게 애는 나 혼자 키우는 것 같다며 화를 내고, 내 시간을 뺏기는 듯한 생각에 아이들에게도 종종 짜증을 냈다. 이렇게 아이들과 남편만 바라보는 삶은 지쳐갔다.
물론 아이들을 돌보는 것도 남편을 내조하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가끔씩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이러한 질문들이 불쑥불쑥 올라올 때면, 가슴이 너무 뜨겁고 답답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억누르며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작년부터 그것이 더 심해지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점점 소멸되는 기분이었다.
'난 앞으로 뭘 할까?', '오빠는 내가 뭘 했으면 좋겠어?'라고 남편에게 의미도 없고, 답도 없는 질문을 해대며 나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다.
책을 좋아하기에 짬짬이 책을 읽고, 음악을 좋아하기에 매일 같이 음악을 듣고,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기에 때때로 사람들을 만나며 수다도 떨어봤지만 잠깐의 해소만 될 뿐, 나의 마음 깊숙한 곳의 응어리진 답답한 마음은 해결되지 않았다.
'한 달 한 책' 독서모임에 가다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삶이 아닌 '나'를 위한 탈출구를 찾아야만 했다. 그래야 현모양처의 삶도 잘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책을 좋아하고 사람들을 좋아하니 독서모임을 해볼까 했는데, 그마저도 낯을 가리니 처음 본 사람들과는 엄두가 안 나더라. 그러던 중 때마침 지인이 운영하는 '한 달 한 책' 독서모임에 참여하게 되었고, 책 하나를 읽고 한 달에 딱 두 번 만나는 모임인데도 책 속에 담긴 세상 이야기, 책 밖의 나의 이야기를 하며 그 안에서 비로소 쉼을 얻었다. 여타 엄마들과 의미 없는 수다로 인해 뒤돌아서면 헛헛한 모임이 아닌, 책 하나를 읽고, 씹고, 맛보고, 즐기며 온전히 소화하는 모임이다. 오랜만에 내 안의 '나'가 느껴지고, 숨통이 좀 틔인 기분이었다.
'글 쓰는 오늘' 10편의 글을 쓰다
독서모임에 힘입어 글쓰기 모임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2주 동안 주말 빼고 매일 같이 글을 썼는데, 이때 썼던 10편의 글이 나의 작은 '브런치'였던 것 같다. 누군가가 나의 글을 읽어준다고 생각하니 글자 하나 허투루 쓸 수 없었고, 매일 같이 글감을 생각하느라 머릿속엔 글! 글! 글쓰기만 가득했다. 그리고 온라인방에서 서로의 글을 읽으며 격려하던 귀한 시간이었다.
글을 쓰면서 다시금 '나'를 알았고, '나의 상처'를 알았다. 고작 일기 같은 글을 끄적이는 것뿐이지만, 어쩌면 이것이 미래의 나를 만들어가는 내 꿈의 '지금'이 될 거라 생각하며 글을 썼다. 한 달이 지난 지금, 그때가 정말 나의 모든 것을 쏟아 내며 브런치에 도전하기 전 글 연습을 할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던 것 같다.
'브런치'에 도전하다
10편의 글을 써보니 계속 글을 쓰고 싶었다. 사람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쏟아내고 나면 후련해지듯, 나 자신에게 글로 마음을 쏟아내고 나면 의외로 나의 상처도 담담해지더라. 이게 글쓰기의 매력인 것 같다. 글을 쓰려면 글을 쓸 창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10편의 글을 다듬어 생각만 하던 '브런치'에 도전했는데, 혼자서는 엄두도 못 냈던 것이 역시 함께 하니 되더라. 진심으로 쓴 친정엄마와의 이야기, 남편과의 이야기로 브런치에 합격했다. 합격 메일을 보는 순간! 아내, 엄마가 아닌 원래의 '나'로 이루어낸 오래간만의 성취라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너무 벅찼다.
최근, 어릴 시절부터 나의 인생책인 '빨강 머리 앤'을 다시 읽었다. 40이 가까워지는 나이에 다시 읽으니 더 감동적이다.
'빨강머리 앤'의 길모퉁이
퀸스를 졸업할 땐, 미래가 곧은길처럼 제 앞에 뻗어 있는 것 같았어요. 그 길을 따라가면 중요한 이정표들을 수 없이 만날 것 같았죠. 그런데 걷다 보니 길모퉁이에 이르렀어요. 모퉁이를 돌면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전 가장 좋은 게 있다고 믿을래요...(중략)
어떤 초록빛 영광과 다채로운 빛과 그림자가 기다릴지, 어떤 새로운 풍경이 펼쳐질지, 어떤 새로운 아름다움과 마주칠지, 어떤 굽잇길과 언덕과 계곡들이 나타날지 말이에요.
브런치에 합격하고 보니 '앤'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앤이 소중하게 여기는 '마릴라' 아줌마를 돌보기 위해 대학을 포기한 것처럼, 나도 현모양처로 살며 '나' 자신은 포기한 채 길 모퉁이에 다다랐다.
하지만 그 길모퉁이에 잠시 서
'나'를 재정비하며
또 다른 길을
꿈꿀 수 있는 시간,
그것이 곧 '브런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브런치를 통해 내 안의 '나'가 조금씩 깨어나길 원한다. 그래서 앤처럼 길모퉁이를 돌면 펼쳐질 초록빛 영광과 새로운 풍경과, 아름다움을 기대하며 글을 쓰고 있다.
물론 굽잇길과 언덕, 계곡 같은 험난한 길도 있겠지만 글을 쓰며 '나'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찾고, 지금보다 나은 '나'의 성장이 될 수 있기를, 또한 내가 쓰는 글이 작은 점일지라도 그것이 다른 무언가와 이어져 또 다른 꿈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