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1/6)
인문학 초보자의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읽기 시작. 위 사진의 두 책
*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이진우 옮김, 한길사 (2019년 제2개정판)
*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을 읽는 시간], 나카마사 마사키, 김경원 옮김, 아르테
을 번갈아가면서 읽고 있다. 한 챕터 당 한 편 씩 총 6 편의 후기를 쓰려고 한다.
아직 1/3밖에 읽지 못했지만, 간단한 소감: 책이 정말 어렵다. :) 번역을 믿지 못하는 것도 크다. 아렌트의 문장이 난해하여 번역하기가 매우 까다롭다는 사실은 들었는데, 실제로 이진우 교수의 번역을 보고 많이 실망했다. 개정을 두 번 했다는 번역임에도 불구하고, 문장 자체가 거꾸로 되어 있는 게 확실한 부분을 여럿 발견했다. 특히 오른쪽 책에서는 [인간의 조건] 일본어판을 다시 한국어로 옮긴 부분이 많은데, 둘을 비교해보면 아쉽게도 일본어판이 우세한 번역인 경우가 훨씬 많다.
정말 다행히도, 사진 오른쪽 나카마사 마사키의 강독 책이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책이 없었다면 [인간의 조건] 독파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을 듯. 이 어려운 텍스트를 하이데거, 롤스, 샌델과 연결지어가며 차근차근 정직하게 독해해준다. 나카마사 마사키의 다른 해설서도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나같이 인문학 초보자인데 한나 아렌트를 읽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조언:
* 1차 텍스트만 가지고 시작하기는 힘들 것 같다. 강의를 듣거나, 다른 사람과 같이 독해를 하거나 하면 가능할 듯. 나는 그럴 여건이 되지 않아서 혼자서 읽고 있는 중.
* 따라서 우선 아렌트 해설서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나는 상대적으로 쉬운 텍스트였던 한나 아렌트의 인터뷰집으로 시작함.
* [인간의 조건]을 읽고 싶다면, 나카마사 마사키의 책을 꼭 사라.
20세기부터 인간사회는 정신없는 변화를 거듭해왔다. 전체주의, 권위주의 정권의 범람, 파퓰리스트들의 등장, 시장권력의 절대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은 어떠하며, 이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한나 아렌트는 우선 "인간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인문학은 개념의 정확한 이해가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아렌트의 원 텍스트에서도, 마사키의 해설에서도 각 개념에 대한 설명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책에서 나오는 첫 번째 개념들: 아렌트는 인간의 이상적 삶을 "활동적 삶"이라 부르고, "활동적 삶"의 세 가지 기본요소를 노동, 작업, 행위로 정의한다. 각각의 활동은 인간이 존재하기 위한 세계의 조건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 노동은 인간 신체의 생물학적 과정과 일치하는 활동이다. 신체의 자연발생적 성장, 신진대사와 부패는 노동에 의해 생산되어 삶의 과정에 투입된 생명 필수재에 묶여 있다. 노동의 인간적 조건은 삶 자체다. [아렌트, 83]
노동은 “생존을 위해 하는 활동”으로 이해된다. 한 마디로 “돈을 벌기 위한 활동”은 모두 노동이라 볼 수 있다. 모든 직업은 “돈을 버는 행위”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노동이 된다. (물론 하나의 행동은 노동-작업-행위 중 복수의 성격을 띌 수 있다.)
> 작업은 인간의 실존에서 비자연적인 부분에 상응하는 활동이다. 인간의 실존은 ‘인간 종’의 영원한 순환에 완전히 들어맞지 않으며 개별적인 인간의 사멸성이 인간 종의 불멸가능성으로 보상받지도 않는다. 작업은 모든 자연적 환경과는 분명하게 다른 ‘인공적’인 사물세계를 제공한다. 각각의 개별적 삶은 그 경계 안에 자리 잡고 있지만, 이 세계 자체는 개별적 삶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이를 초월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해 작업의 인간적 조건은 세계성이다. [아렌트, 83]
작업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활동”이다. “세계”는 이 책의 여러 개념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개념이 될 것 같다. 여기서 세계는 자연이 아니다. 아렌트의 세계는 과거의 인간들이 행한 (인공적인) 작업의 총합이며, 현재와 미래의 인간들이 처해 있는 삶의 조건을 결정한다. 작업이라는 개념에서는 “기술발전”이 생각나기도 하고, “도시”나 “건축물”이 연상되기도 한다. 건축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좋아할 것 같은 개념.
> 행위는 사물이나 물질의 매개 없이 인간들 사이에서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유일한 활동이다. 행위는 다수성이라는 인간의 조건, 즉 한 인간이 아니라 다수의 인간이 이지구상에 살고 세계에 거주한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인간의 조건의 모든 측면은 어떤 식으로든 정치와 연관되기는 하지만, 이 다수성은 모든 정치적 삶의 ‘필요조건’ 일 뿐만 아니라 ‘가능조건’이라는 의미에서 절대적 조건이다. [아렌트, 83-84]
행위는 “인간들 사이의 직접적 관계맺기”이다. 가장 흥미로우면서 아직 정확하게 이해되지 않는 개념이 바로 행위의 조건인 “다수성”이다. 다수성plurality은 다원성으로도 번역될 수 있을 것 같다. 아렌트는 인간이 “서로 다르다”라는 것이 우리 삶의 중요한 조건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만약 지구에 70억명의 사람이 아니라 70억명의 컴퓨터 프로그램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자. 이들 프로그램은 서로 다르지도 않고, 서로를 완벽하게 융합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서로간의 직접적인 관계맺기가 불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어떤 누구도 지금까지 살았고 현재 살고 있으며 앞으로 살게 될 다른 누구와 동일하지 않다는 점에서만” 동일하다 [아렌트, 85].
아렌트가 생각하는 인간의 궁극적 활동은 행위이다. 아렌트의 말대로 “광야에 사는 은자의 삶도 타인이 있다는 사실을 직간접적으로 증명해주는 세계 없이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 [아렌트, 101] 아직 남은 뒷부분에서 아렌트가 생각하는 “좋은 행위”에 대한 정의, 또 그것이 가능한 세계에 대한 설명이 기대된다.
물론 노동-작업-행위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개념이고, 하나의 활동이 여러 개념 위에 걸쳐있기도 하다. 나카마사 마사키의 다음 설명은 작업과 행위 사이의 관계를 아주 잘 설명해준다.
> ‘작업’과 [행위] 의 관계가 살짝 엿보입니다. 생명체로서 개별 인간은 죽음으로써 끝나지만, ‘공작물’을 만들어 다 함께 공통의 목적을 위해 이용함으로써 자신이 존재한 흔적을 남길 수 있습니다. ‘공작물’을 인프라로 이용하면서 사람들은 [행위를] 통해 ‘정치체political body’를 만들고 유지해 나갑니다. ‘정치체’ 안에 사람들이 존재했던 증거가 ‘기억’이 되고 ‘역사’로서 전해집니다. 사물보다 서사의 영속성이 강화되어 모두 그 인식을 공유하기 쉬워집니다. 아렌트는 ‘정치체’를 물질적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공동체라기보다는 서사를 지어내고 공유하고 계승하는 공동체라고 보는 듯합니다. [마사키, 43]
“서사를 지어내고 공유하고 계승하는 공동체”. 유발 하라리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정치적 공동체political body에 대한 아렌트의 개념은 흥미롭고, 좀 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다. 인간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인간들이 모인 정치체의 성격은 구성원들이 퇴장하고 등장함에 따라 계속 새롭게 변화한다. 끝없는 “창시” 가 생겨난다.
> 사람이 혼자 살아간다면 ‘활동’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이 있어야 합니다. 가은 구성원끼리 ‘활동’을 계속 하면 그 방식이 점차 고정되고, 새 구성원이 들어오면 네트워크가 그만큼 복잡해지고 ‘활동’의 여지가 넓어져 서사가 새롭게 전개될 가능성이 생겨납니다.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폴리스의 구조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을 가리켜 ‘시작이나 ‘창시’라고 일컬은 것입니다. [마사키, 46]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명한 어록, “정치는 생물이다”가 명확하게 이해되었다. ‘정치’ 대신 ‘정치체’를 넣으면 이 문장은 완전히 아렌트적인 명제가 된다.
이 개념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 (그리고 내가 흔쾌히 수긍할 수 없는 부분)은 바로 목적론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적 시각이다. 다음 마사키의 해설이 이를 잘 보여준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철학적 목적론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폴리스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은 당사자가 명확하게 의식하고 있든 아니든 ‘선한 삶good life’이라는 이상을 공유하고, 그에 따라 살아감으로써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전제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철학을 전개했습니다. 그것이 시민의 공통 ‘목적’으로서 ‘공통선common good’입니다. ‘목적’이란 시민이 ‘최후=끝’에 도달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마지막에 도달해야 할 것이 있다는 전제에 입각해 그것을 탐구하는 것이 ‘목적론’입니다. (…)
아렌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관에 상당히 기대고 있지만 목적론과는 선을 긋습니다. 그것은 ‘목적론’의 부활을 꾀하는 샌델과 아렌트가 다른 점이기도 하지요. (…) 아렌트가 ‘시작’이나 ‘창시’를 강조하는 배경에는 ‘목적론’에 대항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적론’에 따라 생각하면 폴리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목적이 정해져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에 반해 ‘출생’에 의한 ‘시작’은 그때까지 상정한 ‘목적’과는 다른 새로운 ‘목적’을 폴리스에 가져다줍니다. (…) 아렌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려 낸 ‘폴리스적 삶’의 의미를 다시 읽어 내려고 하는 듯합니다. 보통의 방식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으면 샌델처럼 ‘공통선’의 이상을 강조하게 된다고 봅니다. 반면, 아렌트는 ‘공통선’을 고정하는 데 저항하면서 그렇지 않은 방향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어 내려고 합니다. [마사키, 47-49]
아렌트가 말한대로, “지구는 가장 핵심적인 인간의 조건”이다. [아렌트, 78] 우리가 다른 행성으로 옮겨간다면 “노동, 작업, 행위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방식의 사유는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구에서 온 이 가상의 이주자는 여전히 인간일 것이다.” [아렌트, 86-87]
그런데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 을 쓰고 60년이 넘은 지금, 아렌트의 노동, 작업, 행위에 대한 정의는 여전히 유효할까? 재미있게도, [인간의 조건] 서문에서 아렌트가 우려했던 세계의 변화는 2020년에도 현재진행형이다. 서문에 드러난 아렌트의 문제의식은, 이 책이 2020년에 출간되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생생했다.
첫번째, 노동. 근대세계는 “사람들이 노동의 방식으로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평등해진” 세계이다. [아렌트, 81] 그런데, AI를 필두로 한 자동화가 앞으로 인간의 직업을 없애나간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우리는 지금 노동이 없는 노동자 사회, 즉 인간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활동이 없는 사회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것이 최악의 상황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아렌트, 81]
여러 선진국에서 대안으로 논의되는 기본소득제 (UBI) 는 아렌트의 관점에서 보면 흥미롭다. 근대사회에서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필수재”를 노동의 댓가로 얻었다면, UBI는 노동 없이도 필수재를 공급하려 한다. 그런 상황에서 인간이 하는 행위는 노동이 아니게 된다. 노동이 필요없는 사회에서 인간은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작업과 행위에 더 몰두할 것인가?
두번째, 작업. 21세기 과학기술의 발전은 어지럽다. 실리콘밸리의 혁신에 의해 조건이 완전히 뒤바뀐다. 우리가 딛고 있는 세계가 몇 년, 아니 몇 달 단위로 틀을 바꾼다. 아마도 그 중 가장 무서운 것은 세계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 자체”의 변화일 것이다. 유전자변형이 가능한 시대의 인간의 조건은 무엇일까?
> 현재 진행되는 위대한 과학적 연구의 상당수는 인간생명을 ‘인공적’으로 만듦으로써 인간을 자연의 자녀에 속하게 하는 마지막 끈조차 없애려고 한다. 시험관에서 생명을 만들려는 시도, 즉 “능력이 증명된 사람을 현미경으로 추출하여 동결시킨 생식세포를 혼합하여 크기와 모양 기능을 면화시켜 좀 더 우월한 인간을 만들려는” 시도는 지구라는 감옥에서 탈출하려는 희망과 동일한 것이다. (…) 과학자들이 100년 안에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미래 인간은 이미 주어진 대로의 인간실존에 대한 반항심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렌트 78-79]
> 존 롤스나 로널드 드워킨의 <정의론>은 각자가 자신의 행위로 초래된 것이 아닌 선천적인 불평등, 당사자가 보기에는 우연한 불평등에 어떨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중심적인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유전자를 바꿀 수 있게 된다면 처음부터 평등해지는 것도 가능합니다. 사회의 이상을 맨 처음 설정해 놓고, 그것에 맞추어 인간의 생명을 변경할 수도 있습니다. 아렌트의 공공성론을 계승했다고 알려진 위르겐 하버마스나 공동체주의의 대표자인 마이클 샌델은 유전자를 조작하면 자유, 평등, 정의 같은 규범적 개념의 의미가 변화한다는 시각에서 염려를 나타냅니다. [마사키, 29]
마지막으로, 행위. 저 멀리 앞서나가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보면, 그냥 체념하고 변화하는 세상에 수동적으로 밀려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다. 가속도가 붙은 기술발전은 공동체의 지속과 발전에 새로운 문제점을 안긴다.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고도의 수식이나 전문용어들은 일반 대중을 소외시키고, 공동체의 필수 요건인 “말”의 발전을 저해한다.
“말이 힘을 잃은 세계” [아렌트, 80] 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미약하지만 개개인이 자신의 말을 강하게 만드는 수 밖에 없지 않을까. SNS로 생겨난 새로운 세계는 그동안 역사적으로 소외되어 왔던 사람들이 직접 자신의 서사를 말할 수 있는 마당을 제공한다. 공동체의 말이 새로운 서사로 풍부해질 것인가, 아니면 전문가들의 용어에 밀려 납작해질 것인가, 두려움과 희망을 가지고 지켜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