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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랑의 책읽기 Aug 04. 2020

'정치적'인 것은 무엇인가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2장: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인간의 조건] 리뷰 두 번째, 오늘은 2장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예상은 했지만, 책의 담고 있는 메세지가 워낙 깊고 넓어서 리뷰글 하나로 한 챕터를 제대로 정리하는 건 불가능. 내가 느낀 가장 중요한 점 몇 가지만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앞서도 얘기했지만, 이 책 내내 한나 아렌트의 시선은 제대로 된 “정치적 공동체”(혹은 정치체) 를 만드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아렌트가 생각하는 정치적 공동체의 이상은 매우 까다롭다. 솔직하게 얘기하면, 나는 아렌트의 정치체 개념에 대해 “너무 이상적이 아닌가” 하면서 조금씩 의구심이 생기고 있다. 앞으로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다음 질문을 계속 던질 것이다:



1. 아렌트의 이상적 정치체에 가장 가까운 공동체의 예는 무엇인가? 아렌트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를 계속 언급하지만, 나는 현대, 21세기에서 조금이라도 비슷한 예를 찾아보고 싶다.

2. 아렌트의 이상적 정치체는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공동체인가? 아렌트가 “구성원들이 완벽하게 평등”했다고 서술하는 폴리스는 소수의 지배계급 남성들만이 참여했던 조그만 공동체였다. 여성들과 노예는 참여하지 못했던, 확고한 불평등성 위에 세워진 집단이다. 현대 사회에서 모든 인간들을 그 구성원으로 하는 정치체가 가능한가? 그렇지 않다면, 지금 이를 가로막고 있는 요인은 무엇인가?

3. 아렌트의 이상적 정치체는 “왜 바람직한가”? 정치활동이 없는 단순한 사회,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사회보다 아렌트의 정치체가 덜 위험한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근본적 질문으로 돌아가자. 이상적인 “정치적 공동체”는 어떤 모습인가? 생각보다 쉽게 설명되지 않는 이 개념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아렌트는 우선 “무엇이 정치적 공동체가 아닌가”를 먼저 설명한다.




정치적 공동체는 “사적 영역-가정”이 아니다.


이건 이해하기 쉽다. 공적 영역-정치적 공동체는 사적 영역-가정과 정반대의 개념이다. 아렌트는 이 둘이 다른 종류의 삶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사적 생활 외에 두 번째 삶이라 할 수 있는 정치적 삶을 부여”받았다 [아렌트, 103].


그런데 그 둘이 정확하게 어떻게 다른가? 아렌트는 가정에서 이뤄지는 모든 일들은 생물학적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일들뿐이라고 말한다.


> 가정영역의 뚜렷한 특징은 공동생활이 전적으로 필요와 욕구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 추진력은 삶 그 자체다. (…) 가정의 자연적 공동체는 필연성의 산물이고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은 필연성의 지배를 받는다.
이와는 반대로 폴리스의 영역은 자유의 영역이다. [아렌트, 110-111]


한마디로, 밥짓기, 설거지, 빨래, 청소 등의 ‘집안일’은 개인의 삶을 지속하기 위한 일뿐이라는 것. 거칠게 얘기하면 가정은 더 중요한 ‘정치적 공동체’를 뒷받침해주는 역할에 불과하고, 따라서 공적인 삶이 없는 사적인 삶은 무가치하다는 것이다. 


앞으로 더 얘기하겠지만, 아렌트는 사적인 삶에서 오는 “단순한 행복”도 별로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뭐, 논쟁적인 생각이지만 일단 넘어가보도록 하자.


내가 보기에 더 논쟁적인 생각은, 가정-사적 영역에서 “힘”과 “폭력”이 존재하고, 정치적 공동체는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집단이라는 것. 이 이유는 가정이 “동물의 세계”와 비슷한 집단이기 때문이다. 사적 활동은 필연성에 예속되어 있는 활동이고, “모든 인간이 필연성에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은 타인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한다” [아렌트, 112]


> 가정이 가정 엄격한 불평등의 장소인 반면, 폴리스는 오직 ‘평등’만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가정과 뚜렷이 구별된다. (…) 즉 자유롭다는 것은 지배관계에 내재하는 불평등에서 벗어나서 지배와 피지배 둘 다 존재하지 않는 영역에서 활동하는 것을 의미했다. [아렌트, 113]


> 힘이나 폭력은 정치적 행위가 아니라 생명 유지를 위한 “전 정치적 행위”인 것입니다. 힘이나 폭력이 ‘집’안으로 몰려가고 ‘공적 영역’으로 밀려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시민들은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는 ‘정치’의 본질을 ‘폭력’으로 보는 포스트모던 좌파 논의의 발상과 전혀 다릅니다. [마사키, 104]


정치적 공동체가 지배관계로부터의 자유라니, 너무 이상화하는 것 아닌가. 현실정치가 아렌트가 얘기하는 정치체와 비슷해질 수가 있을까.



아무튼, 결론적으로, “건강과 부를 얻어야 ‘필연’이나 ‘폭력’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 핵심”이다. [마사키, 105] 가정에서의 삶은 진정한 삶을 위한 전제에 불과하다는 것. 



정치적 공동체는 “사회”가 아니다.


자, 이제 어려운 부분 시작. 정치적 공동체는 “사회”가 아니다. 아렌트가 여기서 얘기하는 “사회”라는 집단은 그냥 개인들의 “단순한 집단”이다. 중요한 건, ‘사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치적 공동체’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공적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에서 얘기했던 가정에서의 “사적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공적 생활’ 없이 그냥 필연성을 지닌 생물체로서 서로 집단을 구성한 것이다. 


> ‘인간’이라는 생물에 속하는 개체가 모두 속해 있는 ‘사회’를 상정하는 것이 왜 문제일까요? 그것은 상호 간에 아무런 관계도 없이 각자가 고립적으로 살아가면서 ‘활동’을 하지 않더라도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인간이라는 종족의 사회’ 구성원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생활’과 관계없이 ‘사회’가 성립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정치’와 ‘사회’는 완전히 관계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마사키, 88]


아렌트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가정-사적 영역과 폴리스-공적 영역의 경계선이 분명했다. 집안일 (“노동”)은 여성과 노예들이 전담하고, 성인 남성들은 폴리스에서 “활동”을 했다.


그런데 근대로 들어오면서, “사회”라는 개념이 생겨나며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 사적 영역도 공론 영역도 아닌 사회적 영역의 출현은 엄격히 말하면 비교적 새로운 현상이다. 이 현상의 기원은 근대의 출현과 일치하며 그 정치적 형식은 국민국가다 [아렌트, 108]
>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경계선이 우리에게 분명치 않아 보이는데, 그것은 우리가 민족집단이나 정치적 공동체를 가족의 이미지로, 즉 그 일상사를 거대한 범국가적 가계행정의 차원에서 처리되는 가족의 이미지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아렌트, 109]


아렌트의 “사회” 개념은 전체주의 국가에 대한 그녀의 반감과 맥을 같이한다. 주체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고 마치 동물처럼 국가의 명령에 따라 충성하는 인간집단은 개개인이 주체적인 “활동”을 하는 정체적 공동체와 크게 다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회’가 아닌 ‘정치적 공동체’를 형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인간의 조건] 나머지 부분에서 그 메세지가 나오길 기대.



정치적 공동체는 경제학이나 통계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


마지막, 나에게는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 경제학이나 통계학은 정치적 공동체를 서술할 수 없다. “일상적인 말” 이 아닌 “수학적 언어”에 대한 아렌트의 거부감이 드러난다.


왜 그런가? 우선 위에서 아렌트가 ‘공적 영역’이 아닌 단순한 ‘사회’를 경계했다는 것을 기억하자. ‘공적 영역’에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개성을 발휘하면서 집단의 다양성plurality에 일조하는 반면, 단순히 개인들이 뭉친 사회 안의 사람들은 개성이 없다. '사회' 안의 사람들은 단순히 다른 존재 (권력자 혹은 관료) 가 원하는 방향에 순응한다. 아렌트는 근대사회의 “평등”이 이렇게 사람들을 동질화한다고 비판한다.


> 이런 근대적 평등은 사회에 내재하는 순응주의에 기초하고 있고 또 행동이 인간관계의 최고 양태인 행위를 대체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 공론 영역은 개성을 위해 준비된 곳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바꿀 수 없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아렌트, 123]


그런데 “동질화된 욕망”은 경제학의 가장 첫번째 가정이다. 미시경제학이론의 가장 첫 강의에서는 경제적 주체인 Homo economicus를 설명한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하나의 목적-개인이익의 극대화-를 쫓아 기계처럼 ‘자동적’으로 행동하는 존재이다. 여기에 각자의 개성이나 주체적인 사고는 들어갈 여지가 없다.


> 근대 경제학은 이와 동일한 순응주의에 기인한다. 즉 사람은 행동할 뿐이지 다른 사람을 고려하여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는 가정에 뿌리를 둔다. 경제학의 탄생은 사회의 발생과 일치하며, 그것은 주요한 기술적 도구인 통계학과 더불어 가장 우수한 사회과학이 되었다. (…) 경제학은 사람들이 사회적 존재가 되어 한결같이 일정한 행동유형을 따르고 규칙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비사회적, 비정상적이라고 간주될 경우에만 과학적 성격을 획득할 수 있다. [아렌트, 123-124]


통계학도 마찬가지. “law of large number”는 집단의 크기가 커지면 그들 행동이 결국 평균으로 수렴한다는 애기이다. 통계학자들은 이에 기초해 집단의 행동의 평균을 주된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아렌트는 이러한 움직임이 역사의 발전을 잘못 이해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어떤 역사적 시기는 그것을 밝혀주는 소수의 사건 속에서 그 의미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아렌트, 124]


페이스북은 수많은 사용자들의 데이터를 가지고 고도의 통계적 기법으로 최적의 광고를 내보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통계학은 “페이스북의 탄생”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다.


아렌트는 경제학과 통계학에 대한 경계심을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순응주의적 학문들이 계속 자신의 자리를 넓혀갈 것이라 본다. 다음 문장에서는 패배주의적 관점이 엿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더 비슷하게 행동하게 되고 더욱더 다른 행동을 관용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는 불행한 것이지만 행동주의에 관한 진리이고 또 그 ‘법칙’의 타당성을 보여준다. (…) 실제로 행위는 행동의 급류를 막을 수 없을 것이고 사건들도 그 자체의 의미, 즉 역사적 시대를 밝혀주는 능력을 점점 상실할 것이다. [아렌트 125]


아렌트가 최근의 행동경제학의 득세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사람들의 사회는 결국 정교한 통계적, 심리학적 기술에 의해 프로그래밍 될 것인가, 아니면 아렌트의 ‘정치적 공동체’가 결국 우위에 서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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