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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랑의 책읽기 Sep 23. 2020

치열하게 노비의 삶을 사는 한국인들

[임계장 이야기], 조정진


피가 끓는다. 아무생각 없이 지나쳤던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런 삶을 살고 있었구나.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인가.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면 꼭 이 유튜브 클립이라도 보시길 추천.


https://youtu.be/fILPDff8XEw


저자는 서문에서 ‘임계장’의 뜻을 설명한다.


> 나는 퇴직 후 얻은 일터에서 ‘임계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는 ‘임시 계약직 노인장’이라는 말의 준말이다. 임계장은 ‘고,다,자’라 불리기도 한다. 고르기도 쉽고, 다루기도 쉽고, 자르기도 쉽다고 해서 붙은 말이다. 고용주들에게 이 고다자 임계장들은 시급만 계산해 주면 다른 아무것도 신경쓸 필요가 없는 매력적인 노동력이다. 석 줄짜리 구인 광고를 내면 일자리를 원하는 노년의 노동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고용주는 이 중에서 “고분고분한 자, 뼈와 근육이 튼튼한 자”를 고르기만 하면 된다. -[서문]


이런 식이다. 페이지마다 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가슴을 조여오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은 “노비의 삶”이다.


공기업에서 30년 넘게 근무하다가 정년퇴직을 한 저자는 예상치 못했던 재정적인 압박에 비정규직 노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4년동안 4곳의 직장을 전전하면서 본 노동의 실상은 참혹했다. 그는 석면가루가 흩날리는 아파트 지하실에서 점심을 먹어야 했고, 배기가스가 자욱한 빌딩 지하 6층 주차장에 마스크도 없이 하루 몇 시간씩 있어야 했고, 공중화장실과 붙어 있는, 불이 켜져 있는 공동숙소에서 몇 년 동안 빨지 않은 침구에 잠을 자야 했다. 


독자일 뿐인 나에게도 책 한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고문일 정도의 이야기들. 괴로워하면서 책을 읽어나가다가 아파트 동료 경비원이 저자에게 해주는 이 말에 맥이 탁 풀렸다. 


> 그가 내 손을 잡더니 또박또박 말했다. “자네는 경비원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그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네.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런 폐기물 더미에서 숨을 쉴 수 있겠는가?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런 초소에서 잘 수 있겠어? 사람이라면 어떻게 석면 가루가 날리는 지하실에서 밥을 먹을 수 있겠는가? 자네가 사람으로 대접받을 생각으로 이 아파트에 왔다면 내일이라도 떠나게. 아파트 경비원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경비원은 할 수가 없어.”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고통에서 해방되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래, 나는 인간 대접을 받자고 이 아파트에 온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하더라도 서러워 말자. -[두 번째 일터-아파트 경비원이 되다]


사람이 아니다. 이들은 노비의 삶을 살고 있었다. [공부란 무엇인가]에서 김영민 교수는 한국사회에서 경쟁에 실패한 사람들은 “삶의 노역이 되물림되는 상태, 즉 노비가 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딱히 경쟁에서 실패하지도 않았다. 충실히 주어진 인생을 다 산 후에도, 몇 개의 불운이 겹쳐지면 인간대접을 못 받는 처지로 전락하는 사회가 과연 정상적인가.



불확실성: 모든 돌발상황을 약한 노동자를 갈아서 해결한다.


저자가 경비원으로 일하던 아파트 지하실에 하수구가 터져 오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그런데 관리사무소에서는 하수관을 제대로 점검할 생각을 하지 않고 경비원을 시켜 똥물을 손으로 퍼나르게 한다. 며칠동안의 사투에도 똥물은 계속 늘어나기는 한다. 결국 경비소는 외부업체를 불러 점검을 맡기고, 그 업체는 지하실이 아닌 근처 정원에서 누수를 발견한다.  저자는 이 사건 이후 피부가 독가스를 견디지 못해 뒤집어진다.


모든 일에는 돌발상황이 생기기 마련이고, 삶은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그런데 한국의 기업들은 불확실성을 약한 개인에게 모조리 전가한다. 사람을 갈아서 돌발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돌발상황이 덜 발생하도록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지하실에 오물이 차는 것은 경비원의 책임이 되는데, 경비원의 가족이 상을 당하는 돌발상황을 회사는 책임지지 않는다. 가족이 상을 당해도 휴가를 내지 못한다니.


노동자의 삶에는 절대적 임금 수준 만큼이나 ‘불확실성의 정도’가 중요하다. 직장이 삶의 범퍼가 되는 것과 삶이 직장의 범퍼가 되는 것의 차이는 크다. 불확실성을 노동자가 아닌 기업이 책임지는 사회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갑질과 감정노동: 한국인들은 필요없이 불행하다.


저자가 노동에서 받는 고통 중 가장 심한 부분은 바로 ‘갑질’이다. 빌딩관리업무를 하면서는 건물주 사모님의 차를 알아보지 못하고 차를 빼라고 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한다. 아파트에서는 양동이로 물을 주었다고 아파트 자치회장이 양동이를 짓밟고 던지더니, 재계약에 실패한다. 마스크를 달라고 하니 “늙은이가 얼마나 더 살려고”라는 말을 듣는다. 


생각해보면, 한국인들은 전혀 받을 필요가 없는 고통을 받고 있다. “늙은이가 얼마나 더 살려고”라고 말한 사람은 그 말을 해서 행복해졌을 리가 없다. Zero-sum도 아닌 negative-sum이다. 1인당 gdp 3만불인 한국사회가 불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른 사람을 밑으로 뭉갬으로써 자존감을 세우는 사람들. 따지고 보면 그 사람들도 불행한 것이다. 동등한 관계에서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니, 어떻게든 남의 위로 올라가서 억지로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들도 자신이 깔아뭉개는 사람들이 바치는 ‘존경’이 거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냥 모든 사람을 이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는 동지로 인식하고, 동등한 위치에서 친절을 베푸는 관계를 만들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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