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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시저장 Apr 04. 2022

그들의 시위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이 불법이다.

장애인활동지원사가 본 장애인 이동권의 현실, 그리고 그들의 시위

 장애인활동지원사는 장애인의 활동을 지원하는 사람이다. 한 명의 장애인에게 배정돼 정해진 시간 동안 손발이 되어준다. 일 보고 뒤 닦는 손까지 되어준다고 생각하면 업무 이해가 쉽다. 장애인활동지원사라고 하면 “사회복지사세요?”라고 되묻는데, 그것보다는 간병사에 가깝다. 하는 일도, 요구되는 자격사항의 난이도나 근무여건도 비슷하다.


 원래는 장애인활동보조인이었다. 언제부턴가 '보조'가 '지원'이 되고, 사람 '인(人)' 대신에 '사' 자를 쓰는데 그게 교사나 의사처럼 스승 사(師)를 쓰는지, 변호사처럼 선비 사(士)를 쓰는지, 검사, 판사 같은 일 사(事) 자를 쓰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지원사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를 권하는 걸 보니 스승 사(師)일 가능성이 높은 것 같은데, 아마 만든 사람도 한자는 생각지 않았을 것 같다. 그저 사 자 직업을 대우하는 문화니까 홀대하지 말라고 호칭을 바꾼 것 같다. 식당 아주머니를 ‘차림사’로 부르자고 했던 그 시기쯤 바뀌지 않았을까. 어쨌든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도 아직 사 자까지는 오지도 못하고, 놈 자(者)와 사람 인(人) 사이에서 오가고 있으니 장애인활동지원사는 꽤나 높은 직책이 되겠다. 대통령당선사가 되면 겸상이나 할까.


 개인적으로는 직업적 소명의식이나 사명감이 요구되지 않아야 일관되고 지속 가능한 서비스가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에 대우받는 호칭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그래서 그냥 부르기 편하고 입에 붙은 ‘활동보조’를 즐겨 쓴다. 줄여서 ‘활보’라고 읽으면 입에도 착착 붙고, 대로를 활보하는 것마냥 쾌활하게 노니는 느낌도 있다.


휠체어로 가기 힘든 길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다. 


 활보로 일하면 장애인과 일상을 같이 하기 때문에 자연히 그들의 불편을 알게 된다. 내가 보조하는 장애인은 뇌병변 중증으로 손가락 정도만 움직일 수 있는데, 다행히 그 손가락만으로도 전동휠체어는 탈 수 있다. 손가락으로만 조이스틱을 움직이면 온몸을 원하는 대로 이동시킬 수 있으니 전동휠체어는 그에게 자유렸다. 


하지만 그 자유는 잘 닦인 길에 한정돼있다. 길에 조금이라도 요철이 있으면 덜컹거리는 탓에 안 그래도 연골이 메마른 경추에 만만치 않은 충격이 전해지고, 10cm 정도의 턱만 있으면 그 너머는 그림의 떡이 되기 일쑤다.


 예상하듯이 버스, 지하철, 장애인콜택시 등 대중교통에도 몇몇 난관이 있는데 이것도 꽤 재미있는 이야기다. 먼저 버스. 서울시는 저상버스가 꽤나 많은 편이다. 계단이 없기 때문에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탈 수 있고, 정류장 전광판에서 저상버스가 언제 오는지도 쉽게 확인할 수 있어 접근성이 좋다. 그런데 이게 또 장애인에게는 해당이 안 된다. 장애인이 탑승할 수 있는 자리까지 마련돼 있지만 언제나 그렇듯 현실은 다르다.


 저상버스를 이용할 때마다 벌어지는 풍경은 매우 비슷하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면 일단 버스기사가 당황한다. 배워서 알고는 있지만 한 번도 휠체어 탑승용 발판을 꺼내본 적이 없어서다. 이내 버스기사는 땀을 흘리기 시작한다. 발판이 정비가 안 돼 있어 작동을 안 하기 때문이다. 수동으로 꺼내보려고 하지만 역시나 잘 안 된다. 


그러면 5분 이상 지체되기 시작하는데 버스기사도 제시간에 다음 정류장에 가지 않으면 실직 위험도에 ‘+1’이 뜨기 때문에 땀이 비처럼 내리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승객을, 그것도 휠체어에 탄 장애인을 놓고 갈 수도 없다. 어쩌면 이 정도의 진퇴양난은 기사 인생 최초일 수도 있다.


 그즈음이면 같은 노선의 다음 차량이 정류장에 도착한다. 그러면 앞선 버스의 승객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 버스로 이동한다.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선택이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기 싫은 건 그들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니. 이런 일이 출근시간에 일어났다면? 한 명의 장애인만 있어도 출근길 대란은 아니라도 소란 정도는 일으킬 수 있다.


 결말은 포기다. 장애인의 포기. 버스기사와 승객들에 대한 미안함에 장애인을 발길을 돌려 지하철로 향한다. 그나마 지하철은 타고 갈 수는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버스를 탔던 게 10년 전쯤이다. 그때 10번 정도 반복된 경험을 하고는 다시는 버스를 이용할 엄두를 못 냈으니까. 지금도 저상버스를 이용하는 휠체어 장애인을 보기 힘든 걸 보면 그다지 나아지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같은 지하철이지만 휠체어를 타면 동선이 달라진다.


 이제 지하철로 가보자. 지하철은 ‘안전빵’이지만 편한 선택은 아니다. 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냥 엘리베이터만 타면 된다고 생각할 텐데 이게 막상 해보면 녹록지 않다. 지하철 엘리베이터‘만’ 이용한다는 것은 완전히 동선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1층에서 지하 1층 대합실, 대합실에서 지하 2층 승차장으로 최소 2번은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지하철역마다 구조가 달라서 처음 가는 지하철역에서는 40대인 나도 키오스크 앞에서 서성거리는 70대 노인이 된다. 지하철 역사 구조도를 아무리 봐도 어디에서 어떻게 엘리베이터를 타라는지 몰라서 결국 안내데스크를 찾아 구두로 물어보게 된다. 


지상에서는 더 골치다. 물어볼 곳도 없고, 1번부터 8번까지의 출구 중에 몇 번 출구에 엘리베이터가 있을지 몰라서 일단 가서 확인하고 횡단보도를 건너 엘리베이터로 가야 한다. 늘 그렇게 사는 장애인이야 익숙한지 몰라도, 이 사람만 아니면 그냥 계단으로 가면 되는 나로서는 적잖이 짜증 나는 일이다. 그럴 때면 확실히 장애가 없는 게 편하긴 편하다는 생각이 든다.


 환승은 더 문제다. 이건 진짜 기상천외인데 역에 따라 환승을 하려면 지상으로 나가서 다시 다른 노선으로 갈아타기도 한다. 환승이라기보다는 퇴장 후 재입장이라고 하는 게 옳다. 지하철 어플에서 검색한 소요시간은 아무 의미가 없다. 나 혼자 가면 3~5분이면 될 환승이 장애인과 함께라면 10분, 20분이 돼버린다. 그쯤 되면 일상은 여정으로 바뀌고, 기진맥진은 따 놓은 당상이 된다.


엘리베이터가 고장인 건 알겠는데, 여의도역을 이용하라는 게 진심인가 싶어 몇 번을 읽었다. '이용에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의 '대단히'가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또 하나 즐거운 경험은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는 일이다. 여의나루역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을 때가 있었는데 일요일이라 수리가 안 됐다. 이럴 때의 대안은 어이없게도 여의도역뿐이다. 엘리베이터가 안 되면 역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역으로 걸어가야 한다. 그때는 전동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잠시 부러워져 10분만 바꾸자고 하기도 한다. 다리가 매우 아프니까. 물론 아직 한 번도 바꿔준 일은 없다.


 처음 이 일을 겪었을 때는 당황과 황당이 함께 왔다. 역사에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주변에 사는 장애인에게는 문자를 돌렸다고 하는데 우리는 주변에 살지 않았으니 못 받은 것뿐이다. 그렇다고 역사에서 전 국민에게 엘리베이터 고장 사실을 알릴 순 없으니 탓할 수도 없다. 탓할 곳 없는 분노는 꽤나 오래갔다. 탓할 곳이 마땅치 않으니 참 난감했다.


 결국 장애인의 이동수단은 장애인 콜택시로 옮겨 간다. 버스나 지하철과 달리 비용을 지불해야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만큼 편한 것도 없고, 실제 이동 가능한 수단도 그것밖에 없다. 그래서 생기는 문제가 배차 지연이다. 수요에 공급이 따르지 못하니 배차 시간은 점점 늘어난다. 


이건 내가 아는 랜덤 중 최고의 랜덤이다. 배차를 요청하면 바로 올 때도 있고, 심한 경우는 2시간 이상을 기다리기도 하는데, 그게 2시간이 될지를 미리 알 수는 없다. 집에서 불렀을 때야 1시간이든 2시간이든 쉬면서 기다리면 되는데 밖에서 기약도 없이 기다리기는 참 힘든 일이다. 


아마 장애인 중에 휠체어에 앉아 2시간 이상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 당연히 힘들 거다. 근데 이건 나도 힘들더라. 언제 온다고 알려주지도 않으니 어디 들어가 있기도 불안하고, 휠체어를 타고 들어갈 수 있는 카페를 찾는 것도 크나큰 과업이라 대개는 도로에서 그냥 기다리는데 이거 매우 힘들다.


일요일인데도 사람이 꽤 있고, 개중엔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도 많다. 휠체어는 기민하지 않아서 적시에 들이밀어야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다.


 가끔 그런 생각도 해본다. 장애인 고용이 문제라고 고용을 늘리라고 하는데, 늘리면 감당할 교통편이 있나? 지금도 장애인 콜택시는 출근 시간 배차를 예약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하지만 예약이 금방 차고, 다행히 예약을 했다고 해도 배차가 30분은 늦을 때가 많다. 장애인 고용을 늘리면 아마도 그걸 감당할 교통수단까지 같이 늘어나든지 2시간 지각 정도는 용인을 해야 될 것 같다.


 이런 문제들이 있기 때문에 수많은 장애인들이 이동권을 보장하라고 피켓을 드는 거다. 늘 파업이나 시위가 있으면 시민 불편을 조명하는 언론들에게는 애초에 큰 기대가 없다. 하지만 그나마 장애인의 일이라면 슬쩍 눈감아주던 시민들의 여론도 이번에는 좀 다른 모양새라 걱정이다. 


아마도 먼저 나서 장애인 시위가 선을 넘었다고 외치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몸빵’을 해주니 그간 약자를 배려하는 여론에 막혀 있던 볼멘소리가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것일 테다. 불만은 숨겨져 있는 것보다 공론장으로 나오는 편이 나으니 나쁘지는 않은 일이다. 오히려 이렇게 말할 일이 생겨서 좋기도 하다.


 시민들의 불편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나도 활보로서 전장연 시위에 따라 가보기도 하고, 먼발치에서 몇 번 보기도 했었는데 과격할 때는 참 과격하다. 그리고 전동휠체어라는 것이 꽤나 무겁고 강철이라 작정하고 달려들면 전투 마차 같은 느낌이 나기도 한다. 붐비는 지하철에서 그런 쇳덩이를 이리저리 휘둘렀으니 시민들의 공포도 컸을 거고, 그걸 이용해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행동이 과하게 보이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지극히 개인적으로는 그들의 과격보다 오랜 기간 거절당한 삶이 가진 울분과 독기가 먼저 보인다. 누구든 자존감, 자기 존재의 가치를 고민하지만 나는 장애인들만큼 자기가 존재해도 될 이유를 필사적으로 찾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정말 필사적으로. 하지만 그것까지 느낄 필요가 없다. 장애는 어쨌든 많은 사람들에게 먼 이야기니까 먼 채로 살아도 괜찮다. 그저 조금만 이해를 하면 될 일이다.


발빠짐 주의. 사진 속 휠체어는 고오급이라 바퀴가 커서 빠진 적은 없다. 가끔 사이가 많이 넓어 조마조마 할 때는 있다.


 무엇보다 ‘자신의 기본권을 보장받기 위해 타인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부정적인 여론, 그래서 ‘불법’이라는 결론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나의 기본권을 위해 타인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일이 대부분의 경우 용납이 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나 살아보니 세상 모든 원칙에는 항상 예외라는 것이 있더라.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용납되지 않는다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폭력을 응원하거나 비폭력을 답답해한 경험이 있을 거다. 아직 그런 경험이 없다면,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이라는 영화를 조심스레 권한다. 절대 진리일 것 같은 금언도 세부 상황에 따라 예외를 둘 수 있다.


 그런 경험에 비추어 시민을 볼모로 삼고 그들의 기본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 그래서 장애인의 시위를 용납할 수 없다는 원칙 또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인지, 보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는 게 좋겠다.


 어느 사회든 장애인은 전체 인구의 5~10% 정도는 된다. 그중 휠체어를 이용하는 중증장애인은 통계를 찾을 수는 없지만 200명 중에 1명은 되지 않을까 싶다. 1~4호선 지하철 한량의 적정 탑승인원이 160명이라고 하니 비율로만 따지면 2량에 1명 정도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없다. 출근시간에 지하철을 탈 수 없으니까 없다. 어딜 가도 당연하게 장애인은 출근시간을 피한다. 붐비는 지하철에 휠체어를 들이밀 수가 없으니. 


 장담컨대 휠체어 1대면 출근길 지하철 대란을 일으킬 수 있다. 특별한 방법이랄 것도 없다. 그냥 출근시간에 출근만 하면 된다. 크다 큰 전동휠체어 하나가 만원 지하철을 타려고 하면 벌어질 풍경은 뻔하다. 모든 승객들은 선의를 가지고, 휠체어에 자리를 비워주고 싶을 거다. 하지만 상황이 절대 그렇게 될 수가 없다. 이미 지하철 안은 꽉 차있고, 누가 어디를 어떻게 비워줘야 할지 알 수 없을 거다. 


 그러면 자연히 휠체어는 바퀴 하나만 걸친 채 있을 거고, 출입문이 안 닫히면 그제야 승무원이 와서 교통정리를 시작할 거다. 탑승객 수십 명을 내렸다 다시 태우기도 뭐하니 대개는 장애인에게 다음 열차를 타라고 할 텐데, 다음 열차가 오더라도 탈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이 과정에서 최소 5분은 지연될 거고, 장애인이 나도 출근해야 하니 타겠다고 버티기라도 하면 지하철은 더 지연될 거다. 


미리 타고 있는 휠체어를 만나면 낭패다. 오도가도 못하고 비장애인, 장애인 모두 불편한 상황이 된다.


 이처럼 우리 공동체가 마련한 대중교통 체계는 출근 시간에 단 한 대의 휠체어만으로 무너질 수 있을 정도로 취약하다. 그런 교통체계만으로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이유는 자의든 타의든 장애인들이 지금까지 줄곧 자신의 기본권을 포기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변변한 직업이 없이 복지관에서 제공하는 1년 만기의 공공일자리로 연명하고, 출근은 고사하고 외출도 삼가면서, 버스나 지하철로 가야 할 먼 길을 휠체어로 이동해가며 세상에 없는 듯 살았기 때문에 비장애인들은 아무 일 없는 듯 일상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애인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는 쉽게 공감하기 어려울 거다. 척수장애라도 와서 하반신이 마비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세상 일이 다 그렇듯, 내 일이 아니면 공감이 어려운 법이니까. 그래서 장애인들은 자신의 불편을 호소하기 위해 비장애인들을 공감케 하는 기법을 다양하게 개발한다. 그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는 ‘미장애인’이다. 


 장애인이 아니라는 '비장애인'에서 점 2개를 떼어내 ‘아직은’ 장애인이 아니라는 ‘미(未)장애인’을 만든 거다. 우리 가족 중에도 미장애인이었다가 장애인이 된 사람이 둘 있다. 한 명은 뇌졸중이고, 한 명은 암이다. 막 추락사고, 교통사고 이런 드라마틱한 게 아니라도 우리는 장애인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한 번은 장애인이 된다. 그러니 그들의 시위도 혹시 모를 우리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이걸로도 설득이 되지 않으면 이렇게라도 생각해보자. 개인에게 장애는 우연이지만 공동체에게 장애는 필연이라고. 몇 해 전, 서울에 물난리가 났을 때 서울의 하수도 시설이 10년 강우량을 기준으로 만들어져 100년 강우량을 견디지 못한다고 비판하는 기사가 있었다. 100년에 1번 꼴이라도 필연적으로 찾아올 위험이라면 대처했어야 하지 않냐고 성토하는 글이었다. 물난리가 강남에서 나서 그런 것인가 싶기도 한데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조금 차이가 있는 문제이긴 하지만 장애인 문제와는 사뭇 접근방식에 차이가 있다. 장애는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존재할 필연인데 그에 대한 대처는 100년에 1번꼴로 나타나는 홍수만도 못하다. 아마도 그렇게 내버려 둬도 내 기본권은 침해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미장애인 여러분, 장애인 이동권 보장 시위의 불법성을 토로하는 여러분들에게 꼭 이 말을 드리고 싶다. 지금의 대중교통 체계는 장애인의 기본권을 상시적으로 침해할 때에만 제대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여러분은 지금 부지불식간에 여러분의 기본권을 보장받기 위해 장애인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그걸 바로 잡으려는 장애인의 이동권 시위가 여러분의 기본권을 침해해서 불법이라면, 매우 안타깝지만, 여러분이 당연하다는 듯 누리고 있는 그 일상 또한 불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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