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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리 Oct 26. 2020

일기를 쓴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2년동안 4권의 일기장을 채워보았다.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예쁘게 자리 잡고 있던 날, 어퍼 웨스트에 있는 Neue 갤러리를 향했다. 구겐하임 박물관 옆에 작게 자리 잡은 곳인데, 갤러리 보다도 유럽풍의 카페로 더 유명한 곳이다. 커피를 마시고 본격적으로 갤러리를 구경해 보려고 했더니 마침 다음 전시 준비로 입장이 불가하단다. 그냥 발길을 돌리기는 아쉬워서 갤러리 옆에 붙어 있는 기프트숍에 들렸다. 그곳에서 유독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예쁜 꽃 그림이 그려져 있는 노트를 한 권 구매했다.


주변의 성공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하나 같이 입을 모아 일기 쓰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을 주워듣고 당시 나는 일기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던 참이었다. 일기를 써서  인생이 달라질 것이라는 큰 기대감은 없었지만, 내가 대체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나 궁금해할 미래의 나를 위해 빈 페이지를 채워보기로 결심했다.


지금은 생소해져 버린 일기 쓰기지만, 어려서는 일기를 곧잘 썼다. 아직도 집에는 알아보기 어려운 삐뚤삐뚤한 글씨로 적어놓은 그림일기가 남아있다. 유치원부터 초등학교까지는 일기를 쓰는 게 언제나 방학 숙제였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일기는 결국 누군가에게 (선생님 혹은 부모님) 그 존재를 드러내고 평가받을 것이라서, 그저 오늘 하루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사실적인 기록에 불과했다. 때로는 칭찬을 듣기 위해 나의 진짜 생각이 아닌 남들이 내가 생각한다고 알아주었으면 좋을 생각들을 나의 생각인 것처럼 쓰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자리 잡은 못된 습관으로 인해 일기 쓰기가 더욱더 어려워졌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나를 위해 일기를 한 번 써보기로 했다.

처음 몇 개월 간의 일기에는, 일기를 매일 쓰기가 어렵다는 불평과 나에 대해 실망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왜 하기로 마음먹은 일을 하지를 못할까, 일기 쓰는 것도 못하면 다른 일도 못할게 뻔하다는 둥 - 그래도 그 실망의 끝자락엔 언제나 내일은 더 열심히 살아 보자는 자기 위로가 있다. 매일 일기장을 펴서 몇 글자라도 끄적거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렇게 채워진 페이지가 하나 둘 모여 벌써 4권의 일기장이 되었다. 지난 2년 간의 뉴욕 생활의 고민, 좌절, 분노, 그리고 희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어느새 쌓인 4권의 일기장


일기를 쓰면 좋은 점이 뭐죠?


화장실을 가듯, 마음에도 배출구가 필요하다  


나는 내가 하고은 말을 남들에게 잘 이야기하는 성격이 못된다. 복잡한 생각을 말로 풀어내려고 하다 보면 생각이 정리되기보다는 이미 엉켜버린 얇은 목걸이 체인처럼 뒤엉켜 버린다. 항상 웃으며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나 다운 것'이 되었고, 걱정거리, 속상한 마음, 사소하게 기분이 나빴던 일들 모두 목 뒤로 삼켰다. 몇 번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나면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묵은 감정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몸에 난 상처는 자연 치유가 되지만, 마음에 난 상처는 그대로 두면 곪아버린다. 일기를 쓰다 보면 그동안 모르는 척 해왔던 마음의 작은 생채기들이 자기도 여기 있다며 조심스레 손을 든다. 내가 할 일은 그저 그들의 존재를 알아주고 '그랬구나'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동화를 기억하는가? 임금님의 당나귀 귀를 가리기 위한 모자를 만들게 된 어느 사내가 그 엄청난 비밀을 혼자 간직하다가 결국 화병이 난다. 그는 살기 위해 대나무 숲으로 달려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친다. 그리고 대나무 숲에서 소리친 후 그의 병은 말끔히 사라진다. 일기를 쓰기 시작 한 이후 나에게 일기장은 가장 효과 좋은 대나무 숲이 되었다.



답이 없다고 생각한 질문들에 답을 할 수 있다


구글과 네이버 덕분에 궁금한 것은 무엇이든 간에 인터넷의 방대한 그물망 안에서 답을 찾을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예외가 있다. 쳇바퀴처럼 굴러가던 나의 인생에 브레이크를 걸었던 바로 그 질문이 그러하다.


'대체 내가 원하는 게 뭘까'


대학교 진학만 하면, 취업만 하고 나면, 진급만 하고 나면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거야 - 오아시스를 쫓아 전력 질주를 했지만 도착한 곳엔 언제나 다음 목적지만이 존재했다. 스스로 목적지를 정해 보겠다고 직장, 가족, 친구들을 모두 뒤로 한 채 낯선 타지로 왔지만 영화나 소설처럼 운명적으로 정답이 나타나 주진 않았다.


답을 찾기 위해 나는 계속 묻고 또 물었다.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 어떤 라이프스타일을 살고 싶은지, 잘하는 게 무엇인지, 부족하다면 배워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렇게 하루하루 묻고 답하다 보니 구름에 쌓여 멀게만 느껴졌던 '원하는 것을 하며 사는 삶'이 지금 내가 사는 이 삶이 되었다.


이 외에도 애매모호한 사소한 질문들도 일기장에 적기 시작하면 내 안에서 마법처럼 대답이 떠오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새로운 취미생활을 찾는 일부터 남자 친구를 만드는 일들까지-)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


나는 마음먹기에 따라 인생이 바뀐다고 믿는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살고자 한다면, 가장 쉬운 방법은 나의 마음을 바꾸는 일이다. 마음을 바꾸기 위해선 지금 내 마음이 어떤가를 알아야 한다. 마음을 들여다 보기에 가장 효과가 좋은 것은 일기를 쓰는 일이다.


나의 마음을 그대로 보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살다 보면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하거나, 섭섭한 마음이 쌓여 엉뚱한 데서 화를 내는 일이 왕왕 있다. 진짜 속마음은 점점 더 마음속 깊숙한 곳에 묻어두고서. 그런데 그 묻어 둔 속마음은 마치 마당에 잘못 떨어뜨린 잡초의 씨앗처럼, 어느새 싹이 나고 잎이 나서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마당을 점령한다. 일기를 쓰면서 나는 비로소 내가 어디에 씨앗을 뿌리고 있었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내가 왜 게임중독에 빠졌었는지, 왜 지난 연애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는지, 왜 내가 하겠다고 자처한 일을 하는데 억울한 마음이 올라오는지 - 기억 저편의 사건들이 갑자기 밀물처럼 밀려올 때면 팔이 저려올 때까지 계속해서 빈 페이지를 채워나갔다. 그렇게 나의 마음을 글로 풀어놓고 나면 도무지 이해가 안 됐던 나의 행동들이 이해가 가고,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실마리가 보인다.




마무리하며..


나의 일상은 이제 일기를 쓰는 것을 떼어놓고는 상상을 할 수 없다. 일기 쓰는 일은 나에게 치유의 수단이자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자 나를 돌아보는 거울이 되어주었다. 이 글을 본 당신도 오늘부터 일기를 써보는 것은 어떨까? 하지만 꾸준히 일기를 쓰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가 않은 것을 나도 잘 안다. 그래서 그동안 쌓인 나름의 비법을 공유한다.


좋은 종이와 좋은 펜

장비 빨은 등산할 때만 세우는 게 아니다. 일기를 꾸준히 쓰려면 내 손에 꼭 맞는 펜과 페이지가 잘 넘어가는 노트가 필수다. 펜을 좋은 펜으로 바꾸고 나서 일기 쓰는 것이 훨씬 더 즐거워졌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펜은 Zebra에서 나온 G 402이다. 노트는 개인적으로 몰스킨 같이 넘겼을 때 잘 넘어가는 스타일의 노트북을 선호한다.


일기를 쓰는 시간과 장소를 정할 것

일기를 쓰는 것은 새로운 습관을 형성하는 일이다. 새로운 습관을 형성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일을 규칙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 아침에 일어나 아침밥을 먹기 전에 책상에 앉아서 30분 동안 일기를 쓴다. 일기를 쓰고 난 다음에는 맛있는 아침밥을 먹기 때문에 일종의 보상심리도 작용을 한다. 습관 형성에 관하여 더 궁금한 분께는 James Clear 의 Atomic Habits이라는 책을 (정말로!) 추천한다.


일기 쓰기에 도움을 준 책

The Artist's Way by Julia Cameron

Big Magic by Elizabeth Gilb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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